원작 대 영화

진짜 ‘나’를 찾기- <어디 갔어, 버나뎃>

VS

두 가지 질문

나뎃 폭스에게 “어디 갔어”는 두 가지 질문이다. 하나는 그녀의 행방이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자신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는 남편에게 절망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죽었는가, 아니면 아직 살아 있는가. 물론 이 질문은 무슨 범죄스릴러나 되는 것처럼 심각하지는 않다.

물음의 또 하나는 ‘자아’이다. 천재들에게만 주어진다는 ‘맥아더상’을 최연소로 수상한, 미국에서 가장 촉망받던 여성건축가로 혜성처럼 나타나 독특한 발상으로 두 개의 건축물을 남긴 버나뎃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그녀는 왜 세상에 등을 돌리고, 모든 사람들과 단절한 채 시애틀의 빗물 새는 낡고 큰 집에서 불안과 불면에 시달리면서 살고 있는가. 그녀의 실체는 무엇인가.

마리아 셈플의 소설 『어디 갔어, 버나뎃』은 이 두 가지 물음을
씨줄과 날줄로 엮으면서 여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여행이
끝나는 곳에 진짜 버나뎃이 있다.

사라지기 전의 일상 엿보기와 사라진 그녀를 찾아가는 과정은 일종의 유도등이자 가이드맵이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소설이 던지고자 하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만난다.
지금의 나는 진정한 ‘나’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뎃에게는 세상사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시애틀이란 도시의 모든 것이 짜증나고 못마땅하며, 삶의 한순간 한순간이 불안하고 심각한데 왜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까. 그런 그녀의 모습에 독자는 우울해하거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반대로 유쾌하다. 심지어 귀엽다. 18년 동안이나 그렇게 살아 벌써 쉰 살이나 된 그녀로서는 화가 치밀 일이다.

그것은 작가(마리아 셈플)에게 따질 일이지, 독자에게 화를 낼 일은 아니다. 정말이지 그녀만큼 독특하고 재미있는 캐릭터도 드물다. 하는 행동은 또 어떻고. 주변 20마일 반경 내에서만 자재를 구해 건축을 했던 건축가로서의 과거는 물론이고,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임원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남편 엘지와 4번의 유산 끝에 낳았지만 몇 번의 심장수술을 해야 했던 딸 비를 위해서만 사는 지금의 별난 모습도 마찬가지다.

회성이 전혀 없는 그녀는 거리낌 없이 모든 이웃들을 ‘각다귀’라고 말한다. 아랫집 여자 오드리가 경계를 넘어와서는 정원을 망친다고 블루베리 넝쿨을 없애달라고 하자 그렇게 해주고는 언덕에 ‘사유지 출입 금지, 게일러 스트리트 각다귀들은 발각 즉시 체포되어 각다귀 감옥으로 이송됨’이란 커다란 팻말을 망설임 없이 세운다.

상과 단절한 그녀는 모든 일을 시간당 75센트를 주고 고용한 인도의 온라인 비서 만줄라에게 이메일로 맡긴다. 심지어 집 창문에서도 보이는 식당 예약까지도 직접 하지 않는다. 딸이 우등생이고, 8학년 성적이 모두 최고 등급인 S를 받아 명문인 초트사립학교에 가게 되어도 학교 활동에 지금까지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뒤에서 ‘각다귀’들이 수군거려도 무시해 버린다.

소설 속 버나뎃의 ‘자아 찾기’

설은 집에서, 약국에서, 식당에서, 거리에서 이런 그녀의 기행과 그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과 해프닝, 파장을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메일(대부분 이메일)을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을 열여섯 살의 딸인 비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정리한다. 때문에 『어디 갔어, 버나뎃』은 서간 문학이자 3인칭 시점의 소설이고, 이야기 전체는 딸인 비가 오드리의 아들인 카일이 해킹으로 얻은 자료(이메일)를 바탕으로 쓴 책의 형태이다. 서간 문학이라고, 어린 딸의 시선이라고 이야기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작가의 타고난 감각이 심각하고 무거운 길을 사뿐사뿐 걸어가게 한다

런 선택으로 소설은 버나뎃의 두 개의 ‘어디 갔니’를 양손에 든다. 버나뎃이 주고받는 메일로는 그녀의 ‘자아’를, 딸인 비의 서술로는 가족 사랑. 어느 잡지의 기사 PDF파일과 버나뎃과 가까웠던 건축학자 폴에게 보낸 장문의 이메일, 일기장 같은 딸의 서술이 버나뎃의 영광과 좌절의 과거와 현재, 딸에 대한 사랑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과거 두 개의 건축물이 ‘성녀 버나뎃’인 로르드의 성모마리아의 열여덟 개의 계시 중 첫 번째, 두 번째라면 딸은 나머지 열여섯 개의 계시를 모두 포기하고 얻은 소중한 생명이다.

의 시선으로 보는 엄마이기 때문에 가슴 찡한 가족 사랑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소설은 버나뎃의 자아 찾기에 좀 더 많은 시선을 두었다. “다시는 설계를 하지 않겠어요”라고 신에게 맹세하면서 얻은 생명에 대한 엄마의 사랑은 변할 리 없다. 이제 남은 것은 ‘나’이다. 신과의 약속 때문에 정신병원에까지 가야할 정도로 남은 삶을 불안과 대인기피, 불면과 권태로 끝까지 살아야 할까. 그렇게 사는 것에 대한 넋두리와 미련, 억지 합리화를 길게 늘어놓는 그녀의 메일에 폴 교수는 짧은 답장으로 명쾌한 답을 내린다. ‘버나뎃, 다 끝났나? 이런 헛소리가 설마 자네의 진심은 아니겠지. 자네 같은 사람은 창조를 해야 해. 창조하지 않으면, 버나뎃, 자넨 공공의 적이 되고 말 거야.’ 

마도 ‘공공의 적’이 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적’이 되고 말 것이다. 벌써 그렇게 되었다. 18년 동안, 쉰 살이 되도록 그래 왔다. 끝없이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소설은 그것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딸의 졸업선물로 남극 가족여행을 계획했고, 뜬금없이 만줄라의 정체로 FBI를 등장시켜 버나뎃을 국제범죄자로 몰았고, 정신병원 입원까지 들먹여 결국 아무도 몰래 남극으로 혼자 떠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버나뎃에게 남극기지 건설이란 건축가로서의 진짜 자신을 찾게 해주었고,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을 고쳐주었다.

은 일은 그런 엄마를 딸이 만나는 것.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비는 믿고 있다. 아무리 춥고 먼 남극이지만, 모두가 행방불명이나 실족사로 생각하지만, 16가지 계시를 포기할 만큼 딸을 사랑한 엄마는 살아있다는 것을. 물론 우리도 그렇다. 그래야 ‘어디 갔니’의 두 개의 답을 완벽하게 쓸 수 있으니까. 이 모든 것들이 현실과는 먼 동화 같은 환상, 코미디 같은 이야기라 해도 어쩔 수 없다. 꼭 사람이 살지 않는 남극이어야 진짜 나를 되찾을 수 있나 라고 시비하지도 말자. 소설이니까.

영화 속 버나뎃의 ‘가족 사랑’

재, 주제, 배경, 이야기만 얼핏 보면 『어디 갔어, 버나뎃』은 영화로 만들기에 제격이다. 그러나 생각만큼은 쉽지 않다. 편지와 일기체를 서사구조로 풀어야 하고, 등장인물들의 역할도 영화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너무나 개성적이고 입체적인 주인공의 캐릭터를 살릴 배우가 있어야 한다. 두 개의 사랑(자아, 가족)을 자연스럽게 감동으로 연결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어수선하고 비현실성으로 극적 긴장감도 떨어진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은 나름대로 현명했다. 케이트 블란쳇이란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여배우에게 버나뎃을 맡겼고, 메일이 하나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소설의 서술 구조와 순서를 철저히 해체했다. ‘자아 찾기’ 못지않게 ‘가족 사랑’이란 카드를 위해 버릴 것은 버리고, 바꿀 것은 바꾸었다. 남편 엘지의 부하 여직원과의 외도, 버나뎃과 폴 박사와의 관계에 대한 엘지의 오해, 오드리 가족의 아픔과 추락 등은 빼버렸다. 대신 엘지를 예술가를 이해하는 방법을 몰라 버나뎃이 얼마나 힘든지 뒤늦게야 알았지만 누구보다 아내와 딸을 사랑하는 남자로 변신시켰다.

이런 미묘한 변화와 해체와 영상언어화가 작품 분위기와 무게중심에 미묘한 차이를 가져왔다. 별난 인물의 두 개의 사랑잡기가 아닌 별난 엄마와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딸과 남편이 빚어낸 감동적인 가족영화 냄새가 조금 더 강하다. 상투적인 선택을 했다고 실망할 일은 아니다. 영화는 소설을 속속들이 이야기할 수도 없고,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없으니까. 그게 마뜩잖다면 감독의 시선(카메라)만 따라가지 말고, 버나뎃의 마음속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된다.

이대현
글 / 이대현

언론인, 영화평론가, 1959년생

저서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소설 속 영화,영화 속 소설』
『내가 문화다』 『유어 낫 언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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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1-27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