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이 커서 미스코리아가 되는 꿈들을 한 번씩 꿔가면서 가족이 저녁을 마치고 조그만 방에 도란도란 앉아 누가 왕관을 쓸지 점쳐가며 힘들고 고단한 삶을 이겨나가던 시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우리만의 추억입니다.”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인 김종규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의 글 일부다. 미스코리아대회를 창설한 한국일보사가 2016년 6월 발간한 ‘미스코리아 60주년 기념집’에 실린 이 축사에 나타난 모습이 바로 한국 근대의 한 풍경이라 할 수 있다.
미스코리아는 하나의 독립된 명사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도 같은 책에서 “부른다는 것, 이름을 부른다는 것, 그것은 잠든 것을 일깨운다는 것이며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에 다가서도록 하는 것이며 침묵하는 것을 말하게 하는 것”이라고 썼다. 미스코리아가 한국과 한국의 미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창설된 것임을 상기시키는 언급이다.
1972년에 등장한 ‘미스코리아’ 노래는 “꿈속에서 꼽힌 너는 미스코리아 / 꽃구름에 싸인 너는 미스코리아”로 끝난다. 한국을 대표하는 미녀는 이렇게 꿈속에서 자라나고 꼽혀서 꽃에 싸여 세상에 알려진다. 1957년 5월 19일 서울 명동 시립극장에서 열린 첫 대회가 온 국민의 관심과 열광 속에서 치러진 이래 미스코리아는 국가적 이벤트로 자리 잡았다. 초대 미스코리아에게는 상금 30만 환과 양단저고리, 양복지, 은수저 같은 부상이 주어졌다.
20세기의 한국판 신데렐라들은 연예계를 비롯한 대중문화계의 스타가 되었다. ‘온 국민의 아이돌’이자 ‘한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미스코리아들의 시가행진은 큰 구경거리였다. 6.25전쟁 후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볼거리가 없었던 시대에 미스코리아대회는 국민들에게 축제의 장을 마련해 주고 외국과의 교류가 미미한 상황에서 국제 미인대회에 나가 국위를 선양할 기회를 제공했다. 국내 엔터테인먼트 및 뷰티 산업의 성장을 주도하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미스코리아대회는 1980년대 이후 불공정 심사 시비와 금품 수수, 선발된 미스코리아들의 스캔들 등으로 점차 그 위상이 낮아졌다. 특히 여성을 상품화한다는 비난 속에 안티 미스코리아 운동이 벌어지고, 미스코리아대회와 유사한 각종 미인대회가 늘어나면서 미스코리아의 사회적 비중과 인기가 떨어졌다. ‘여성 상품화’라는 비난의 근거인 수영복 심사가 폐지되고 운영방식 변경이나 TV중계가 축소된 것은 달라진 시대상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미스코리아대회가 국내 첫 미인대회는 아니다. 처음 미인대회가 열린 것은 1929년 6월 창간된 <三千里(삼천리)> 잡지가 1931년 10월 창간 3주년 기념으로 기획한 ‘삼천리 일색(一色)’이었다. ‘일색’이란 ‘뛰어난 미인’이라는 뜻이다. 1942년 7월까지 총 152호가 발간된 <삼천리>의 발행인은 서사시 「국경의 밤」으로 유명한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 1901~?)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가장 성공한 대중잡지였지만 당시는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 1899~1931)이 발행하는 <별건곤(別乾坤)>을 따라잡기 위해 생각해낸 기획이었다.
심사방식은 여성 독자들에게 상반신 사진을 보내도록 해 그중 최고 미인을 골라 표지에 싣는 지상(誌上) 미인선발대회였다. 심사위원은 이광수, 염상섭, 김안서, 안석주, 이승만, 이청전, 허영숙, 나혜석, 김일엽, 최승희 등 문화계 명망가들이었고, 최고의 영예인 특선 미인에는 당시 18세인 최정원이 뽑혔다. 소설가 최정희의 동생이었으니 나중에 파인의 처제가 되는 여인이었다. 잡지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삼천리>는 1935년 10월 ‘여성들을 위한 미용체조법’을 싣기도 했다. ‘가슴을 앞으로 그냥 내밀며, 양손을 위로 쭉 뻗었다가, 손끝이 발가락에 닿을 때, 양손을 아래로 뻗으며, 전신을 굽힌다. 이 운동을 계속하면 가슴의 모양이 곱게 발달되고 미끈한 각선미를 갖게 된다.’ 오늘날 미인들의 필수 요건인 ‘S라인’이 이미 90년 전부터 각광받았던 셈이다.
1949년에는 월간지 <신태양>이 ‘미스 대한(大韓)’을 뽑았다. 응모자의 사진을 확대해 덕수궁 뜰에 진열해 놓고 시민들에게 투표를 하게 한 결과, 최고 미인에는 명동의 다방 마담 임현숙(나중에 영화배우)이 뽑혔다.
얼굴과 몸매를 직접 보여주는 본격적 미인대회는 6.25 정전협정 두 달 전인 1953년 5월 임시수도 부산에서 열렸다. 1945년 창간된 중앙신문사가 ‘여성경염(競艶)대회’라는 이름으로 주최한 대회였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좌익계의 논조로 지면을 제작하다가 미군정 당시 폐간된 신문이다. ‘키는 다섯 자 정도일 것. 얼굴은 둥그스름하고 복스러울 것. 이빨이 반듯하고 하얗게 반짝거릴 것. 현모양처 감으로 부족함이 없을 것.’ 이게 심사기준이었다. 수영복 심사도 했다. 제1회 대회 대상은 숙명여대 재학생 강귀희에게 돌아갔다. 강 씨는 그 뒤 첫 결혼에 실패하고 프랑스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하기도 했는데, 고속철도 테제베의 한국 도입을 둘러싼 국제 비즈니스계의 로비스트로 활약했다. 불꽃 튀는 로비 전쟁과 정치, 경제계의 뒷거래 내막까지 자신의 삶을 기술한 회고록 『로비스트의 신화가 된 여자』(1998, 문예당)를 내기도 했다.
이화여대에서는 메이퀸이라는 미인대회를 운영했다. 1908년 5월 31일 제24주년 개교기념일에 처음 개최된 메이퀸 선발대회에서는 설립자 스크랜튼 부인이 초대 여왕으로 선발됐다. 그렇게 학교의 유공자나 존경받는 교수들이 선출되다가 학생들이 메이퀸으로 선발된 것은 1927년 이후이다. 1933년부터는 일제에 의해 메이퀸 대신 '자세의 여왕'을 뽑기도 하였다. ‘자세가 곧고 걸음걸이가 아름다우며, 균형 잡힌 체격’이 선발조건이었다. 이대 메이퀸 선발대회는 1947년 아펜젤러 교장의 환갑잔치와 더불어 부활됐다가 사회적 혼란과 6.25전쟁 등으로 중단됐다. 이어 1956년 개교 70주년에 다시 시작됐지만, 학생들이 성 상품화와 평등권 위배 등을 들어 반대하는 바람에 1978년에 완전 폐지됐다. 첫 대회가 열린 지 70년 만이었다.
이 밖에 우리나라에는 민속미인 선발대회, 직장미인대회, 동포미인 선발대회, 미스육군 선발대회, 각 지자체가 홍보를 위해 주관하는 ○○아가씨 선발대회 등 향토미인대회가 많다. 이 중 상당수가 없어지거나 규모가 줄어들었지만 지금도 미인대회는 열리고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와 동경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같다. 다만 여성의 아름다움을 남성의 눈으로만 보고, 그 시각이 사회적, 문화적으로 지배적인 풍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1920~30년대 예술지상주의, 유미주의적 경향이 문화계에 확산되면서 당시 예술인 등 유명 인사들이 건강한 몸보다 예쁜 몸에 더 중점을 두는 경향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때의 미인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소설가 현진건의 글이 거론되곤 한다. 그는 “키가 조금 큰 듯하고 목선이 긴 여자가 좋다. 제아무리 얼굴이 예쁘장하고 몸맵시가 어울려도 키가 땅에 기는 듯하고 목덜미가 달라붙은 여자는 보기만 해도 화증이 난다”고 썼다.
이런 여성관, 미인관에 따라 여성들은 자신을 남성의 눈으로 만들고 가꿔왔고, 여성의 상품화와 미모의 상업화 논란이 커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를 주도하는 미인대회도 없고, 종래의 지배적인 미인관도 대세를 잃은 게 아닌가 싶다. 미인대회의 역사를 훑어보면 우리 사회의 변화를 잘 읽을 수 있다. 미스코리아대회의 진선미는 미스터트롯의 진선미로 연결됐다. 아름다운 것보다 더 좋은 것은 다양한 것이며 이제 한국 사회는 다양성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할 만큼 커지고 성장했다. 범상하고 편안한 시각으로 미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미인대회는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갈등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미인을 선발하는 과정까지 아름다울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