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은 울창한 숲속을 산책하며 여기저기 산재한 우리 근대사의 인물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일단 눈에 들어오는 봉분, 비석, 장식물 등의 모양이 과거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고, 나아가 많은 비석에는 근대의 역사와 정신, 문화가 당대 최고의 지식인과 서예가의 글로 새겨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인의 묘를 찾아와 묘역을 둘러보고 비문을 읽는 행위를 통해 다양하고 심층적인 근대의 풍경에 접하게 된다. 공원 내를 한 바퀴 도는 도로만 해도 4.7km이니 그 실제적이고 정신적인 범위는 그 어느 곳보다 넓고 깊다.
일단 여기에 오면, 교과서에서도 접했던 위인을 비롯하여 근대사를 장식한 60여 명의 유명 인사를 만날 수 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한용운(불교), 오세창(천도교), 박희도(기독교) 등 3인이 있고 그밖에 지석영, 오긍선, 조봉암, 장덕수, 문일평, 아동문학가 방정환과 강소천, 화가 이인성과 이중섭, 조각가 권진규, 시인 박인환과 김상용, 소설가 계용묵, 김말봉, 최학송, 극작가 이광래와 함세덕, 가수 차중락 등 저마다의 분야에서 선구자적인 혹은 최고의 업적을 쌓은 인물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애국지사 도산 안창호, 남파 박찬익, 송암 서병호 등과 야구선수 이영민 등의 오래된 비석(금석문)이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있어 우리에게 감동적인 말을 전하고 있다. 아직 자료 조사와 인터뷰가 끝나지 않아 글로 발표하지 않은 인물도 있어 전체의 숫자는 70여 명에 이를 전망이고 서민의 비명에 대한 조사까지 끝나게 되면 더욱 많은 근대의 스토리가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1933년부터 시작된 시립망우리공동묘지는 1973년에 4만 7천여기로 만장이 되어 묘지 신설을 중단하고 지속적으로 나무를 심으며 시민의 공원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997~98년에 공원 둘레 길에 고인의 말과 연보를 적은 큰 돌인 연보비 15개가 세워지고 1998년부터 망우리공원으로 이름이 바뀌며 역사문화의 현장으로 발돋움을 시작했고, 2009년에 필자의 저서 『그와 나 사이를 걷다 - 망우리 사잇길에서 읽는 인문학』(2009 초판, 2018 개정 3판)이 나오면서 많은 유명 인사가 존재하는 역사문화공원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 확산에 부응하여 지자체는 2016년에 인문학길 ‘사잇길’의 조성 사업을 통해 묘역과 탐방로의 정비, 이정표와 안내판의 설치로 시민에게 인문학적 체험을 제공하기에 이르렀고 이후 지속적으로 해마다 예산을 투입하여 공원의 정비에 힘쓰고 있다. 내년에는 기존 관리사무소 자리에 예술적인 새 건물도 들어설 예정이다. 그리고 망우리공원의 인근 지역은 도시재생사업을 망우리공원의 근대성을 연장, 확산시키는 방향으로 추진하고 있다. 망우리 인물의 기념관이나 도서관, 미술관, 거리, 카페 등이 적당한 곳에 하나둘 만들어지면 망우리의 근대 풍경은 주변 지역까지 확산된다. 장기적으로는 근대사 테마파크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과거에는 공동묘지의 어두운 이미지 때문에 이름조차 바꾸고 싶었던 망우리라는 지명이 이제는 인문학과 근대사의 상징으로 돌아왔다.
망우리공동묘지의 사용 시기(1933~1973)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시기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시기가 마치 액자처럼 잘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의 흐름에 뒤떨어져 답답했던 조선말, 치욕적인 일제강점기, 해방 후의 혼란기, 그리고 6.25전쟁의 폐허와 그 폐허를 딛고 일어난 산업화의 초기가 여기에 모여 있다.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아닌 시기에 돌아가신 고인이 이곳에 모여 있으니 파란만장한 우리 근대의 풍경이 망우리에 모여 있는 셈이다. 동시에 이러한 격동적인 근대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씨앗과 뿌리가 되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니 우리는 망우리의 고인을 찾아가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여기 계시는 한 분 한 분을 하나의 창이라고 치면, 여기에는 현재 60여 개의 창이 존재하여 그 창을 통해 다양한 근대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그리고 망우리공원을 인문학공원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 위에 열거한 유명 인사의 면면을 보면 애국지사도 있지만 친일의 멍에를 쓴 사람도 있고, 사회주의 계열에 속해 오랫동안 교과서에 등장하지 못했던 사람도 있다. 국립묘지는 애국지사 같은 위인이 계시는 곳이니 그것으로 충분히 높은 위상을 갖지만, 망우리공원은 우리가 지금 사는 사회와 다를 바 없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볼 수 있는 곳이며,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서민도 함께 존재하기에 국립묘지보다 인문학적으로 더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또한, 망우리공원은 묘지공원이다. 죽음은 인문학 최고의 화두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속세의 삶 자체가 힘들어 묘지를 멀리했다. 죽음 자체를 문화로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과거와 달리 많은 사람이 해외여행을 가면서 선진국에서는 묘지가 학생의 수학여행 장소요 시민의 공원이라는 것을 목격했다. 묘지가 선진국형 문화 체험의 장소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고인의 생가나 거주지는 전시물로 가득하지만 사실 묘지가 고인을 가장 가깝게 만날 수 있고 고인의 작품이나 삶을 가장 압축적으로 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것을 우리는 예전에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우리는 망우리공원에 찾아가 묘지 사이를 걸어간다. 즉 삶과 죽음의 사이, 고인과 나의 사이, 어제와 오늘의 사이, 좌와 우의 사이를 걸어가며 생각한다. 망우리공원의 인문학길 ‘사잇길’의 이정표 아래에는 “경계를 넘나들고 경계를 허무는 길”이라고 적혀 있다. 즉 이곳에서는 속세의 이념이나 파벌을 갖고 싸우지 않는다. 속세의 아귀다툼을 벗어나, 사람 그 자체를 바라보고 사람 간의 인연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우리는 망우리공원에서 인문학적 체험을 한다. 운명적으로도 명칭이 ‘망우(忘憂)’다. 근심을 잊는다는 뜻이다. 태조 이성계가 지금의 건원릉을 자신의 묏자리로 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언덕에 서서 묏자리를 내려다보며 이제야 근심을 잊겠다고 하여 이 동네가 망우리가 되었다. 근심이란 오늘부터 잊어야지 생각한다고 잊히는 것이 아니다. 근심을 잊기 위해서는 독서, 등산, 참선, 종교 활동 등을 통한 마음의 수행이 필요하다. 망우리공원을 한 바퀴 돌면 몸의 근육이 강해지면서 마음의 근육도 강해져 어느새 근심 하나가 사라진다. 인문학의 체험, 공부는 바로 망우하기 위함이다. 필자는 답사 안내를 끝내고 늘 사람들에게 묻는다. “한 바퀴 돌아보시고 어떻게 망우 좀 하셨습니까?”
망우리공원이라는 근대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돌아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역사 인물의 삶을 보고 읽으며 자아를 성찰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근대의 풍경 속에서 근대의 정신을 배운다. 문명사적으로 근대의 정신이란 전근대적인 미몽의 상태, 구태를 깨치고 얻은 새로운 정신을 말한다. 근대는 우리가 항상 되새겨야 하는 새 출발의 기점, 순수, 이상의 시대이다. 전근대를 극복하기 위해 온몸으로 치열하게 살다간 근대 각 분야의 선구자들이 지금 망우리공원에서 여러분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독자라면 손님으로서의 자격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