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 후 이야기

B사감과 운명의 화살 - 한창훈

B사감과 운명의 화살 - 한창훈 B사감과 운명의 화살 - 한창훈
1924년 『개벽』 48호에 발표된 그의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은 인력거꾼의 비애를 그린 작품으로 도시하층민의 운명을 추적하며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95년이 지난 오늘 김종광 최진영 정찬 윤고은 강석경 조경란 등 여섯 작가가 다양한 상상력으로 운수 좋은 날을 새롭게 그려냅니다. 현진건 소설 「운수 좋은 날」의 마지막 시점과 가까운 순서대로 작품을 배치하였습니다. 현진건 소설의 감동과 여운을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5화 운수 좋은 날 - 강석경

세 학생의 입에서 시작된 풍문은 동풍을 만난 산불처럼 단숨에 기숙사를 점령하고 말았다. 깊은 밤 그 또한 급한 소변이 이유이었던지, B사감의 흥분이 도가 지나쳤든지, 따로 들었던 이들도 더 있었던 것이다. 소문은 당사자 귀에도 들어가기 마련이다. B사감은 기숙생 하나만 만나도 노발대발한다.

“내가 그 시간에 그런 더러운 소리를 할 리가 없지 않겠어? 누가 이런 헛소문을 냈는지 잡기만 하면 아가리를 찢어놓을 테다”라고 외치거나 “이 모든 게 필경 나에게 지적을 당한, 행실 불량한 학생들의 모함이야”라고 할 때마다 눈이 파르르 떨리고 염소똥 머리 뒤꽁지는 바람개비처럼 흔들렸다.
그것도 부족하다 여겼는지 기숙생들이 가장 많이 스쳐가는 계단참에서 하느님 아버지,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교원이자 사감인 저를 악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리려는 저 학생들을 용서하소서,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그 말은 누가 들어봐도 절대 용서하지 마옵소서, 로 들렸다. 기숙생들은 못 본 척, 안 들리는 척 고개 숙이고 지나치지만 열 발자국도 못 가 얼굴을 찡그리거나 침 뱉는 시늉을 했다.

그들 중에는 최초 발견자인 셋째 처녀처럼 장난 잘 치고 짓궂은 짓 잘하는 이들이 없지 아니하여 제 스승의 찰진 야소꾼 흉내를 내곤 했는데 급기야 그날 밤의 사건을 누가 더 비슷하게 흉내 내나 시합까지 벌이게 되었다. 이를테면 앉아 구경하는 기숙생 중에 영숙이가 있다면 경숙이 이름을 대신해

“영숙 씨가 좋으시다면 내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영숙 씨에게 바친 나의 타들어가는 마음을 이제야 아셨습니까?”

떠벌려서 다들 배를 잡게 하고 다른 방의 기숙생은 내용도 한걸음 더 나아가

“키스를 너무 오래하였더니 입술이 아프고 그대의 수염자리가 찔러서 입가도 아파요.”
“오, 비여사. 그럴 수밖에 없소. 내 입술은 오로지 비여사 그대를 위하여 이십 년 동안 준비되고 비장되어 왔더랬소.”

이렇게 스승의 이름을 넣어가며 굵직한 남성 목소리까지 뽑아내어 배를 잡던 동무들을 데굴데굴 구르게 만들기까지 했다. 이 또한 B사감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B사감은 역시나 뒤꽁지 머리를 흔들며 두 주먹을 움켜쥐고 이를 갈았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속담처럼 이제 소문은 학교 담을 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인근 여학교로 퍼졌고, 곁가지 따라 남학교로도 흘러갔으며 기숙사에 자녀를 맡긴 학부형의 입과 입으로까지 전달되었다. 말이란 입을 하나 거칠 때마다 새끼를 치기 마련이라, 기숙사 사감이 어린 남학생을 숙사로 들여와 무엇 무엇을 했네, 를 시작으로 사실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네, 커지다가 임신을 했다네, 로 발전하였고 곳에 따라서는 아이를 출산했네, 도 튀어나오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뒤틀린 권위는 한번 무너지면 속수무책 걷잡을 수 없기 마련이다. 소문대로만 하면, B사감은 40 가까이 되도록 이루지 못했던 결혼에 성공을 한 것이고 이미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있어야 했는데, 실상은 이랬던 것이다.

학생을 맡긴 학부형 중에는 엄격하고 근엄한 이들(이상하게도 여러모로 B사감과 비슷한)이 있어 자기들끼리 모여 성토하고 그중 몇몇은 직접 찾아와 교육의 신성함에 대해 논하며 교장에게 직접 압력을 넣기도 했다.

B사감은 <풍기 문란 교원 진상조사단>에 불려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교장과 교감, 몇몇 교원들이 그 안에 있었다. 모인 사람들 얼굴이 하나같이 어두웠지만 그중 보아주기 힘든 얼굴이 B사감이었다. 학생들이 복도에 몰려들어 커튼 사이로 구경하고 있어 더욱 그랬다.

진상조사단 대표 질문자로 교무과장이 나섰다. B사감의 성깔머리 때문에 교원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있어왔는데 그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의복이 조금이라도 깨끗하지 못한다 싶거나 머리 굵은 여제자(알다시피, 그래야 18세이지만)에게 실없는 농담을 할 때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입니다. 교원의 행실이 모범적이어야 학생들이 제대로 배우고 따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지적을 종종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고소한 기분을 애써 숨기며 차분한 말투로 질문을 시작했다.

“소문이 사실입니까.”

교무과장이 물었을 때 B사감은 입술에 힘만 주었지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사감 선생님의 동작을 흉내 내는 시합이 처음에는 기숙사 방마다 벌어졌는데 이제는 학급마다 벌어진다고 해요.”

굴비를 생각나게 하는 이마를 찡그리며 B사감은 간신히 한 마디 대꾸했다.

“저는 지금 심한 모욕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를 먼저 말씀하십시오.”
“……”
“기숙생들을 조사해봤는데 기숙사로 들어오는 모든 편지를 사감 선생이 수거했으며 일일이 불러 앉혀두고 닦달을 했다고 하더군요.”
“……”
“그러니까 결론은, 기숙생들은 그런 짓을(이 단어를 말할 때 그는 쾌감과 동시에 같은 교원으로서의 찝찝함도 느꼈다)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편지를 사감 선생님이 가지고 계시니까요.”
“교육 차원에서 압수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편지를 낭송 한 사람이 장본인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얼결에 한 대답은 편지 압수는 물론 당일의 행위에 대하여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왜, 왜 그런 짓을, 이 성스러운 학교 기숙사에서, 그것도 깊은 밤에 하셨나요?”

B사감의 얼굴에는 그늘이 더욱 깊어졌다. 자신이 타인을 비난하기 위해 했던 말을 스스로 듣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건 그 사람들의 심리를 알아보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심리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문란한 학생들이 어떤 심리를 가지고 서로에게 접근하는지 종교와 학술적 차원에서 접근하여……”
“좀 이상하군요. 종교와 학술의 차원이라면 진지하고 무거워야 할 텐데 기숙생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그날 사감 선생님의 목소리는 단지
심리를 검토해보는 선을 넘어서 떨리고 흥분되었으며 숫제 그 사람이 되어버린 듯했다고 하더군요.”

창밖 구경꾼들 사이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서 B사감은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B사감과 운명의 화살 - 한창훈

“무엇보다도 우리 학교와 기숙사의 명성이 땅에 떨어진 게 문제입니다. 우리 학교와 기숙사가 성스러운 교육의 장이 아닌, 염문과 연애의 온상이 되어버린 작금의 사태에 대하여 사감 선생님이 책임을 지셔야……”

교무과장은 거기까지 말해놓고 입을 다물었다. 좌중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구경꾼들도 웃지 않았다. 교원들이 잔을 딸깍거리며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마시는 소리가 몇 번 들리고 나서야 한 젊은 교원이 나섰다.

“저도 소문을 들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이해해 주신다면 제가 잠깐의 실험을 하고 싶은데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교원들은 떨떠름한 표정만 지음으로써 동의를 표현했다. 책임에 으레 따라 나오는 징계나 파면 따위의 단어를 입에 올리기가 부담스러운 데다가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이 수세에 몰린 B사감이 언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B사감의 성질로 보면, 징계나 파면을 앞서서 주장하는 동료교원들을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거라는 짐작이 뻔했던 것이다. 젊은 교원은 B사감 쪽으로 걸어가서 종이를 건네주었다.

“여기 있는 내용을 사람 마음 그대로 표현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건네받은 것을 흘깃 쳐다본 B사감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교원들은 물론이고 창밖의 구경꾼들도 무슨 상황인가 싶어 침만 삼켰다. 젊은 교원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현재로선 이 난관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B사감은 기침을 네다섯 번 정도 하고 마른침을 두 번 연거푸 삼킨 다음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그대가 굳이 결혼한다면 나의 저주를 혼수 삼아 보내리다. 그대가 아무리 얼음처럼 정결하고 하얀 눈처럼 순결하다 해도 이 세상의 구설을 피하지는 못할 거요, 어서 수녀원으로 가시오, 어서.”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젊은 교원은 계속 더 하라고 손짓했다.

“저 별이 불덩이가 아닐까 의심하고, 태양이 정말로 움직이는 것일까, 의심하고 세상의 진실이 사실은 전부 거짓이 아닐까 의심해도 좋지만은 단 하나,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절대 의심하지 말이요, 그대.”

B사감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지면서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포악한 운명의 화살이 꽂히는데도 죽은 듯 잠든 것이 옳은 일인가. 아니면 창칼을 들고 거센 파도처럼 밀려드는 재앙과 싸워 물리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아, 죽는 것은 잠자는 것, 단지 그뿐 아닌가.”

사람들의 마음은 낭송 내용의 정황과 감정 쪽으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해골도 한때 혀가 있어 노래를 부를 때가 있었지. 아, 너무도 추하고 더러운 이 몸뚱아리. 녹고 녹아 이슬이라도 되어 없어져 버려라. 차라리 이 땅에 자살을 죄로 몰아치는 신의 율법이 없었던들…… 못 견딘다. 싫구나…… 세상만사가 모두 내게는 진저리나고 고리타분하고 밋밋하고 부질없구나.”

감정의 폭은 더욱 확산되었고 그리고 이 마지막 문장에는 혼신의 힘이 실렸다.

“사랑하는 오필리아. 나의 시는 서툴기만 하도다. 그러니 시로써 내 마음을 담아낼 길이 없구나. 그러나 그대에게 보내는 사랑을 의심하지 마라. 이 목숨 다할 때까지 사랑하는 이여. 나의 오필리아. 나는 영원한 그대의 햄릿.”

B사감은 감정의 회오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취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서있었다. 사랑하는 오필리아를 읽을 때 떨리던 울대가 여전히 떨리고 있었고 좌중은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게 앉아있기만 했다.

“아시다시피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그 유명한 햄릿이라는 작품의 일부입니다.”

젊은 교원은 좌중을 훑어보며 걸어가서 창문의 커튼을 걷었다. 숨어 구경하던 학생들이 깜짝 놀랐다.

“전 어제 학생들이 사감 선생님 흉내 내는 것을 잠시 숨어서 지켜봤습니다. 감정 몰입, 효과적인 분출, 관객의 반응…… 누군가를 조롱하기 위해 흉내 낸다는 것만 제외하면 아주 훌륭한 연극의 한 무대였습니다.”

사람들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키케로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연극은 인생의 모사요, 관습의 거울이요, 진리의 반영이다’라고. 그렇게 멋진 연극의 무대를 우리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배우지도 않고 해낸 것이죠.”

“……”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감 선생님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고 과도한 노력이 필요한 그 연기와 무대의 연습을 집중적이고 효과적으로 가르쳐버린 것입니다. 의도를 했든 안 했든 말입니다. 그래서 교장선생님께 제안합니다.”

“말씀하세요.” “저는 대학에서 연극을 취미로 했습니다. 작년에 부임을 와서 연극부를 만들고 싶었지만 혼자서는 언감생심이었습니다. 이제 사감 선생님이 도와주신다면 훌륭한 연극부를 만들 수 있겠습니다. 이미 우리 학교에 뛰어난 학생들이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까요.”

B사감에게 기숙사 사감을 사임하게 하고 연극부 교원으로 발령을 내는 것으로 <풍기 문란 교원 진상조사단>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작년에 대강당을 지으면서 잡동사니 창고로 전락해버린 소강당이 연극연습실로 개조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원하는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이제 연극부 연습실에서 격정을 내뿜으며 마음껏 낭송하는 B사감과 학생들을 볼 수 있게 됐다. 총 15명으로 꾸려진 그들은 첫 번째 무대를 앞두고 연습을 시작한 것이다. 첫 번째 작품은, 젊은 교원의 뜻에 의해 이런 제목이 만들어졌다. ‘B사감과 운명의 화살’

B사감과 운명의 화살 - 한창훈

〃 작가소개 〃

한창훈 소설가

소설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 「가던 새 본다」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
장편소설 「홍합」 「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 「열 여섯의 섬」
산문집 「내 밥상위의 자산어보」 「내 술상위의 자산어보」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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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7-01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