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인으로 시작해 왕비가 된 것도 모자라 사약을 받기까지 삶 자체가 드라마였던 인물 장옥정. 1961년 개봉한 영화 <장희빈>부터 2013년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까지 40여 년간 끊임없이 콘텐츠로 생산됐다. 장옥정 역은 배우 김지미, 윤여정, 이미숙, 전인화, 김혜수 그리고 김태희 등이 선보이며 동시대 최고의 연기자만이 맡을 수 있는 배역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과연 장옥정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을까? 지금부터 그녀의 자취를 뒤쫓아보자.
숙종과 사랑을 나누었던 수표교
장옥정의 어머니 윤씨는 노비라고 묘사되곤 했으나, 이는 왜곡된 것이다. 당시 조선은 왜란과 호란을 겪고 상업이 발달하며 신분제도가 흔들리던 시기였다. 옥정의 집안은 중인 출신이긴 하나 양반 부럽지 않은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인 장형이 일찍 사망하자 숙부 장현이 장옥정을 거두게 된다. 인동 장 씨 집안은 조선 대대로 역관을 지냈고 특히 장현은 인평대군이 청나라 사신으로 갔던 때 그를 모심으로 왕실과 돈독한 인연을 자랑했다. 그렇다면 옥정은 왜 궁녀의 신분으로 궐에 들어가게 된 것일까?
1674년 14살의 나이로 즉위한 숙종. 어린 나이에 즉위를 하면 대부분 대비가 대리청정을 하지만 숙종은 직접 정사를 다스린다. 대리청정을 하게 될 경우 궁의 큰 어른인 대왕대비 그러니까 숙종의 증조할머니인 자의대비가 맡게 되는데,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이를 원치 않았던 것. 명성왕후는 서인이었고 자의대비는 남인으로 정치적으로 부딛히는 관계였던 것이다.
서인과 남인의 보이지 않는 전쟁은 옥정이 궁에 들어가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옥정의 집안, 특히 숙부 장현은 대표적인 남인으로 옥정이 숙종을 사로잡아 남인의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장현은 옥정을 궁녀 중에서도 자의대비전에서 수발을 드는 역할로 입궐시킨다. 숙종은 아침마다 자의대비전을 찾아 아침 문안 인사를 드려야 했으므로 옥정이 왕의 눈에 띄기에 가장 적합한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수표교는 장옥정과 숙종이 사랑을 나누었던 장소이다. 숙종이 선왕들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에서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장옥정을 처음 만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수표(水標)’란 수위 변화를 측정하는 도구이니, 수표교는 홍수로 하천이 범람하는 것을 예측하고자 만든 시설물인 것이다. 처음 수표교가 세워졌던 세종 때엔 나무로 지어졌으나 성종 때 돌로 재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9행 5열로 배열한 2단 기둥 교각 위에 난간이 있는 보다리 형태인데, 원래에는 지금보다 다리가 수면에 더 가깝고 폭도 좁았으나 다리 위로 물이 넘치는 현상을 겪으며 증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홍제동으로 옮겨졌고, 1965년 장충단 공원으로 이전되어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숙종이 선물한 취선당
“어느 날 임금이 숙원을 희롱하려 하자 달아나 왕후의 내전에 뛰어들었다. 제발 나를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는데 이는 인연왕후의 기색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중전이 시키는 일에 공손하지 않아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장씨가 원한과 독을 품었다" (1686년 12월 10일)
왕의 사랑을 독차지해 숙원으로 등극한 옥정은 이후 인현왕후와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옥정의 악녀 이미지도 이 시기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통해 꾸며진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위에 인용한 1686년 내전에 뛰어들었던 사건 외에는 사실 그 어떤 역사서에도 희빈의 악행에 대한 기록은 없다. 표독스러운 그녀에 대한 이미지는 작가 미상의 인현왕후전(인현성후덕행록)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 비련의 국모라는 인현왕후의 이미지 또한 잘못되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이를 증명하는 사건이 하나 있다. “제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 선왕 선후이신 현종과 명성황후가 말씀하시기를 숙원은 전생에 짐승의 몸이었는데 주상께서 쏘아 죽이셨으므로 묵은 원한을 갚고자 다시 태어났다 하셨습니다. (중략) 또 팔자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주상이 노고(勞苦)하셔도 공이 없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는 인현왕후가 숙종에게 고한 내용이다. 우리는 인현왕후가 한없이 착하다 못해 바보 같은 여인이라 기억하지만, 기록이 증명하는 바에 따르면 그렇지만도 않다. 인현왕후는 숙종의 사랑이 옥정에게만 집중되는 것이 못마땅하여 후궁을 들이기에 이른다. 하지만 숙종은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후궁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옥정은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정2품 소의 첩지와 함께 취선당이라는 별당까지 선물로 받았다.
취선당의 흔적을 찾기 위해선 창경궁으로 가야 한다. 창경궁은 성종 14년에 지어진 궁궐이며 조선시대 궁궐중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취선당은 영조시대 화재로 전소되어 지금은 터만 자리하고 있다. 한중록 기록에 의하면 저승전의 건너편에 위치했고 영조시대에 저승전의 소주방으로 개조되었다고 한다.
숙종의 사랑으로 왕비가 되고, 숙종의 명령으로 사약을 받다
1688년 10월 옥정은 왕자 윤을 출산한다. 윤은 생후 3개월만에 원자 책봉되고 옥정에게는 정1품 희빈 재위가 내려진다. 뿐만 아니라 숙종은 과거 선대왕이 꿈에 나왔다는 이유로 희빈을 모함했던 사건을 문제 삼아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는다. 그러나 옥정은 시호를 받지는 못하였다. 왕자 윤이 경종이 된 후 옥산부대빈이라는 칭호가 생겼지만, 이는 존호이지 시호가 아니다. 시호는 중전 또는 대비의 자리에서 생을 마감했을 경우에만 부여된다.
1694년 숙종은 다시 서인을 등용하고 남인들을 유배 보내고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 이로써 옥정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인현왕후 복위에 분노한 그녀는 불치의 종기를 앓는 인현왕후가 일찍 죽길 바라며 신당을 차려 저주를 퍼부었다고 알려져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인현의 인형을 만들어 바늘로 찌르고 화살을 쏘는 희빈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이는 어떠한 역사서에서도 기록되지 않은 내용이다. 사실 관계를 떠나 안타깝게도 희빈은 인현을 저주한 죄목으로 숙종에게 사약을 받았다. 숙종은 희빈 장씨가 2년 동안 한 번도 병문안을 가지 않은 점, 인현을 민씨라고 칭하며 요사스럽다고 말했던 점 등을 증거 삼아 희빈에 대한 발고를 사실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인현왕후를 저주한 혐의로 자진한 희빈. 최초엔 구리시 인창동에 묘가 조성되었고 이후 오포읍 문형리, 그리고 현 위치인 서오릉로로 이전되었다. 아들 경종은 즉위 후 왕의 사친으로 희빈을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하고, 사당의 이름은 대빈궁, 묘소의 이름을 대빈묘라 하였다.
(위치: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
우물터로 남아있는 그녀의 흔적
폐위된 희빈이 사가에 머물며 이용했다고 전해지는 우물이다. 기록으로 고증이나 검증은 없지만 연희동에 오래전부터 구전으로 내려온 내용으로 주민들이 대대로 가꾸어왔다. 2009년 우리 동 보물 찾기 사업으로 선정돼 주민의 뜻에 따라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었다.
(위치: 연희로 11길 )
역사서에 기록된 일부 내용과 야사들이 대대손손 전해져 내려오며 장옥정은 악녀로 그려져 왔다. 하지만 그 어떤 공식적인 기록도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과연 옥정은 정말 희대의 악녀였을까? 혹은 서인과 남인의 정쟁 속에 희생된 사랑에 목마른 여인일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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