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몰랐던 역사 속 장소들이 최근 멋진 모습으로 탈바꿈해 시민에게 찾아왔다. 영화-식사-카페 이런 진부한 데이트 코스를 거부하는 젊은 커플들이 앞다퉈 발걸음을 옮기는 곳을 소개한다. 여의도 지하 비밀벙커, 덕수궁 돌담길 미개방구간, 상암동 문화비축기지 그리고 용산공원 갤러리까지. 서울 시내에 위치해 접근성까지 갖춘 미지의 공간들. 역사가 깃든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도심 속 비밀벙커, 복합예술문화공간으로 거듭나다
복잡한 여의도 한복판. 뜬금없이 지하에 260평에 달하는 비밀 벙커가 숨겨져 있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SeMA벙커라고도 불리는 여의도 지하 비밀벙커는 자칫하면 지나치기 쉬운 공간이다. 복잡한 여의도 버스환승센터 앞 도로에 위치한 작은 입구를 통해 계단을 내려가면 예상외로 넓은 규모의 내부를 만날 수 있다.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 2017년 ‘잘 생겼다! 서울 20’ 프로젝트에 선정된 이곳 SeMA 벙커의 역사는 40년이 넘는다. 2005년 5월, 여의도 환승센터 건립 도중 처음 발견되었고 시민 편의 시설로 바꿔 개방될 예정이었으나 사업성이 약하다는 이유로 폐쇄 조치가 내려지며 시민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갔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 2017년 10월 여의도 지하 비밀벙커는 서울시립미술관이 운영하는 SeMA 벙커로 개관해 다양한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 공간은 대통령 대피 시설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벙커의 위치가 5.16 광장에서 개최된 국군의 날 행사 당시 사열대의 배열과 일치하고 50cm 두께의 단단한 콘크리트로 감싸여 있을 정도로 견고하기 때문이다. 서울시가 항공사진을 토대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곳은 1976년 말이나 1977년 초에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시장 공간을 지나 역사갤러리에 들어서면 66m2 크기의 작은 방을 마주할 수 있다. 이는 박 전 대통령의 집무실로 추정되는 VIP실로 호피무늬 소파를 중앙에 복원해놨다. 한 켠에는 개인용 화장실과 샤워장이 설치돼 있다. 벙커의 두께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코어 조각을 보니 이 장소가 외부의 폭격을 피하기 위한 용도로 설계되었을 것이란 확신이 든다.
오늘날 서울시립미술관은 벙커의 역사성과 미학적 특성을 반영한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기획하여 진행하고 있다. 특히나 미디어아트 특별전과 실험예술 프로젝트 등을 통해 문화예술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여의도 지역에 특화된 복합문화예술공간을 지향한다. 단순히 이곳 벙커를 기록보관소의 의미가 아닌 미래를 향해 열리는 가능성으로 채워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역사를 보존하고 예술성을 지향하는 다양한 시도가 더욱 기대된다.
두 번의 개방, 온전한 돌담길 한 바퀴
덕수궁 돌담길은 2018년에 완전히 개통되었다. 연인과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는 유명한 데이트 코스인데 최근에야 개통되었다니, 무슨 말이냐고? 사실 그동안 연인들이 주로 걸었던 메인 길은 월곡문과 대한문 사이에 위치한 돌담길로, 덕수궁 돌담길을 온전하게 한 바퀴 돌 수 없는 구조였다. 영국대사관 건물에 막혀 걸을 수 없었던 170m에 이르는 구간이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이곳은 어떻게 59년 만에 우리 품으로 돌아왔을까?
영국대사관 후문부터 대사관 직원 숙소 앞까지 이어지는 100m의 길은 2017년 8월 개방되었다. 서울시는 영국대사관의 점유로 막혀 있었던 돌담길을 긴밀한 협력을 거쳐 반환받은 것이다. 특히나 이 길은 고종이 선왕의 어진이 모셔진 선원전과 경희궁 등으로 드나들던 길목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아름다운 길을 걷자 하니 근대사의 한 장면을 밟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영국대사관 후문에서 정문까지 이어지는 70m 길이의 덕수궁 내측 보행로는 2018년 12월 개방됐다. 보안 문제를 우려한 영국대사관의 요청에 의해 막혀있던 구간인데, 서울시에서 담장 안쪽으로 길을 새로 만들고 돌담에 출입구를 설치하는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이로써 오랜 기간 미완의 길로 남아있던 덕수궁 둘레 한 바퀴가 완성된 것이다.
출입문을 통과해 영국대사관 정문으로 이어지는 내측 보행로는 흙길과 보행 데크로 이루어져 있다. 덕수궁에 위치한 고즈넉한 옛 정취를 느끼며 한적한 길을 걷다 보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든 계절이 아름다운 이곳 돌담길이야말로 완벽한 비밀 데이트 코스가 아닐까.
멋진 친환경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난 과거의 석유기지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 반대편에 자리 잡은 문화비축기지. 과거 석유비축기지였던 이곳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오디오 가이드 대여 가능 시간_ 10:00~17:00(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제공)
해설사와 함께하는 시민 투어_ 화~토요일 14:00, 16:00 (홈페이지에서 사전 신청 필수)
문화비축기지의 옛 이름이었던 마포석유비축기지의 역사를 살피기 위해서는 197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4차 중동전쟁 당시 아랍 산유국들이 석유 무기화 정책을 펼치며 전 세계적으로 제1차 석유 파동이 발생했던 시기이다. 서울시는 이를 대비한 대책을 마련한다. 국내 석유 수급 및 가격 안정과 더불어 경제 발전을 위해 민간 유류 저장 시설을 이곳 마포구에 세운 것이다. 아파트 5층 높이의 탱크 5개에 당시 서울 시민들이 한 달간 사용할 수 있는 6,907만 리터의 석유를 보관했다고 하니, 그 거대한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후 2002 한일월드컵 개최를 위해 길 건너편에 서울월드컵경기장이 세워지고, 석유비축기지는 위험시설로 분류되어 2000년 12월 폐쇄되고 만다. 한동안 임시 공영 주차장으로 사용되던 이곳이 다시 활기를 띤 것은 2015년 말부터. 국제 현상공모 당선작인 ‘땅으로부터 읽어낸 시간’의 일환으로 친환경 복합문화공간 조성을 위한 공사에 들어간 것이다.
기존의 탱크 T1~T5는 매일 색다른 문화를 창출하는 문화탱크로 탈바꿈하였고, T6는 해체된 탱크의 철판을 활용해 새롭게 건설되어 시민들에게 커뮤니티 공간을 제공한다. 비어있던 야외 공간은 T0라는 이름으로 밤도깨비야시장, 대규모 공연 등이 펼쳐지는 시민들을 위한 문화마당으로 조성되었다.
매주 매일 다양한 공연이 펼쳐지는 이곳 문화비축기지는 어딜가나 생동감이 넘친다. 방문을 계획했다면 미리 홈페이지에서 프로그램 계획표를 살펴보는게 좋다. 6개의 탱크를 방문하고도 체력이 남는다면 문화비축기지 뒤편에 자리한 매봉산 산책코스를 걸으며 맑은 공기를 들이마셔 보자.
미군을 위한 USO 건물, 갤러리로 거듭나다
다음 비밀 데이트 코스는 약 110년 동안 일반인 출입이 불가능했던 땅이자 현재 서울에 남은 금단의 땅, 용산미군기지 내에 위치한 용산공원 갤러리다. 이 작은 건물은 무슨 일을 겪었을까?
용산기지 버스 투어_ 용산문화원 홈페이지(www.ysac.or.kr)에 접속하여 개별 신청 후 참여 가능
갤러리 내부에 들어서면 벽면에 여러 개의 큰 지도가 걸려 있다. 무료로 상시 제공되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용산구가 시대에 따라 변화한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했던 용산구에 위치한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의 창고사무소로, 6.25 전쟁 이후에는 USO(주한미군 미국위문협회) 건물로 쓰였다. 두 번째 지도를 보면 학교와 도서관, 수영장 등 일반인들이 사는 마을의 형태를 연상케 한다. 미군들은 병영이 아닌 ‘기지’의 개념으로 이곳 영토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건물이 속한 캠프킴 부지와 이 건물은 일반인들에게 어떻게 공개된 것일까? 2017년 7월을 시작으로 2018년 6월까지 미8군사령부와 주한미군사령부가 평택으로 이전하였다. 이와 동시에 서울시와 주한미군은 65년간 서울에서 함께한 미군의 흔적을 기념하고 향후 용산공원 조성을 위해 USO 건물의 공개 방안을 결정하였다. 1951년 설립된 USO는 주한미군들의 사기를 증진하는 프로그램이 진행된 곳으로 실제 마릴린 먼로가 방문하기도 했다. 갤러리 내부에는 캠프킴과 더불어 캠프 코이너에 관한 이야기, 짧은 동영상 외에 라디오 부스 시설도 전시가 되어있다. 천천히 걸으며 그 역사를 살펴보자.
용산공원 갤러리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미군에 의해 사용된 건물 내부가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전시를 둘러보고 2층에 올라가기 전 보이는 공간이 눈에 띈다. 1225 카페라고 쓰인 이곳은 분명 카페인데 아무것도 팔지 않는 점이 이상하다. 이곳은 과거 휴게시설 역할을 하였지만 아직 미국 관할이기에 카페로 운영은 할 수 없다고 한다. 따스한 햇볕이 들어오는 이 공간을 더 많은 시민이 이용하는 상상을 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랜다.
용산공원 갤러리는 끊임없이 시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과거의 기록을 전시해둔 아카이브 기록실과 소통 공간을 운영한다. 실제로 처음 오픈한 2018년 11월 30일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토크 콘서트를 개최, 앞으로 용산에 남아 있는 미군부지의 활용 방안을 다양하게 모색하였다.
용산기지에서 최초로 개방된 공간인 용산공원 갤러리는 추후 용산공원 조성에 있어 의미하는 바가 크다. 남은 기지의 폐쇄와 반환 시점은 정확하지 않지만, 더 많은 시민의 관심이 필요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우리에게 허락된 작은 건물에서 기나긴 역사를 살펴보고 미래를 고민해보자.
잘 생겼다 서울이란?
앞서 소개한 네 곳의 장소 중 무려 세 곳이 '잘 생겼다 서울'로 선정되었다. 여의도 지하 비밀벙커는 ‘잘 생겼다 서울 20’에, 덕수궁 돌담길, 문화비축기지, 용산공원 갤러리는 ‘잘 생겼다 서울 2019’에 선정되었다. 잘 생겼다 서울이란 무엇일까?
서울시는 2017년부터 새롭게 개장한 시설과 공원 등을 하나로 묶어 ‘잘 생겼다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30개소를 소개한다. 신규 개장 시설뿐만 아니라 재생을 통해 친환경적 장소로 탈바꿈한 장소들을 방문해 우리 역사에 대해 더 알아보는 뜻깊은 데이트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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