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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에 담긴 결정적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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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10.5센티미터, 세로 15.5센티미터. 각양각색의 두꺼운 표지와 그 가운데 위치한 국가 문장. 이 작은 책자는 외국을 여행할 때 우리의 신분을 증명하는 문서, 바로 여권이다. 1920년 국제연맹이 여권의 통일 모델을 채택하면서 오늘날 여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때 합의된 규정에 따라 앞쪽 4페이지까지는 개인 정보를 담고, 그 뒤 페이지는 출입국 심사 시 도장을 받거나 발급된 비자를 부착하는 사증 페이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증 페이지에는 각 나라를 대표하는 이미지들이 삽화로 담겨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표적인 국보인 숭례문과 다보탑이 등장하고, 미국은 국가 이념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과 독립선언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또 중국 여권에는 만리장성, 장가계 등 각 지역을 대표하는 명소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캐나다 여권에는 우리에게 다소 낯선 삽화가 담겨 있다. 31페이지. 잔뜩 찌푸린 얼굴로 힘겹게 달리고 있는 한 남성의 동상, 그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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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캐나다 여권 속 남자의 정체

다큐 책을 읽다 : 여권에 담긴 결정적 순간들-1
1980년 4월 12일, 한 청년이 캐나다 동부 끝에서 서쪽을 향해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달리는 모습이 좀 남달랐다. 오른발로 땅을 한 번 구른 다음, 왼발로 두 번 땅을 구르며 힘겹게 달리고 있는 청년.

그렇다. 왼쪽에 비해 앙상한 청년의 오른쪽 다리는 의족이었다. 그래서 양발의 보폭을 맞추기 위해 의족으로 한 번, 다른 발로 두 번 땅을 디뎌야만 했던 것이다. 청년은 이렇게 매일 40킬로미터를 서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왜 불편한 몸으로 달리기를 하고 있었던 걸까?
청년의 이름은 테리 폭스. 그는 육상 선수와 농구 선수로 뛸 정도로 건강한 스포츠맨이었다. 하지만 18살이 되던 해, 그의 몸에서 골육종이라는 악성종양이 발견되었고, 암이 더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오른 다리 전체를 포기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청년은 병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암으로 고통 받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고민에 빠졌다.

“암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연구기금이 필요한데…
기금을 모으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심 끝에 청년은 캐나다 횡단 마라톤을 결심한다. 암으로 다리를 잃은 자신이 마라톤을 하면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불편한 다리로 매일 달리다 보니 물집이 잡히고 살이 쓸렸다. 운전자들은 도로에서 비켜나라 소리쳤고, 기금도 생각만큼 모이지 않았다. 계속된 고통과 무관심 속에 그는 점점 지쳐갔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반응이 나타났다. 그와 함께 뛰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언론사에서는 인터뷰를 청해왔다. 캐나다 국민들은 그가 얼마나 달릴지, 모금액은 얼마나 될지 관심을 갖고 지켜보기 시작했다

역경을 이겨내는 테리 폭스의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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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달리기는 곧 멈추었다. 1980년 9월 1일, 마라톤을 시작한 지 어느덧 143일, 총 8,000킬로미터의 여정 중 5,373킬로미터를 지나던 도중 기침과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쓰려졌던 것이다. 진단 결과, 재발한 암세포가 폐까지 전이되어 있었다.

이듬해인 1981년 6월, 그의 마라톤은 영원히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암을 극복하려는 테리 폭스의 의지만은 멈추지 않았다.
매년 9월이 되면 그의 중단된 마라톤을 잇기 위한 ‘테리 폭스 달리기 대회’가 열렸다. 이를 통해 6천억에 달하는 기금이 모아졌고, 지금도 전 세계의 암 치료 기관에 기부되고 있다.

캐나다는 암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달렸던 테리 폭스를 기리기 위해 그를 국민 영웅으로 세우고, 여권에도 새겨 넣었던 것이다.

뉴질랜드 여권 속 평화와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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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역사, 문화는 물론 추구하는 가치까지 담은 여권. 그중에는 표지만으로 국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나라도 있다. 바로 뉴질랜드다. 뉴질랜드 여권은 멀리서도 한눈에 구분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바로 검은색 바탕에 은박으로 새겨진 고사리무늬 때문이다. 뉴질랜드 고사리 잎의 앞면은 녹색이지만, 뒷면은 은색이다. 이 고사리 뒷면을 여권에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왜 고사리일까?

고사리는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족을 상징한다. 마오리족은 사냥이나 전투를 위해 먼 길을 떠날 때 자신들이 지나가는 지점마다 고사리 잎을 뒤집었고, 집으로 돌아올 때 달빛에 반짝이는 은색 고사리를 따라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마오리족의 지혜를 담은 고사리 문양뿐만 아니라 여권 제목과 국가 문장에서도 마오리족을 발견할 수 있다. 뉴질랜드 패스포트라는 단어 밑에 ‘우루베뉴아 아로테아로아’라는 글자를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우루베뉴아’는 마오리어로 ‘여권’, ‘아오테아로아’는 ‘길고 흰 구름의 땅’, 즉 마오리족이 ‘뉴질랜드’를 부르는 말이다. 또 그 아래 위치한 국가 문장을 살펴보면 왼쪽에는 영국인을 상징하는 백인 여성이 국기를 들고 있고, 오른쪽에는 마오리족을 상징하는 추장이 창을 들고 서 있다. 원주민인 마오리족과 이주민인 영국인, 두 민족이 연합한 국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유럽인이 원주민을 정복대상으로 여겨 원주민이 하위 계층으로 추락하거나 소멸되었다. 뉴질랜드 역시 초창기에는 마오리족과 영국인들이 갈등을 빚었지만 공존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한 결과 오늘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그 평화에 대한 희망을 여권에도 담고 있는 것이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2017년 우리나라의 해외출국자 수는 2,650만 명, 2019년에는 3천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설레는 마음으로 떠나는 이들 3천만 명의 손에 들려 있는 대한민국 여권, 여기에 반드시 담겨야 할 우리의 역사, 문화, 그리고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
다큐 책을 읽다 : 여권에 담긴 결정적 순간들-4
[참고도서] <비행하는 세계사> 이청훈, 웨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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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12-16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