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 일행이 피신했던 장소였다. 청의 압박으로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고민했던 인조와 신하들의 대립, 그리고 백성들과 군사들의 생존과 죽음이 오갔던 치열했던 겨울날. 1636년 그 현장으로 떠나보자.
세 개의 문을 지나야 하는 행궁, 임금의 임시 거처지
남한산성은 하남시, 성남시, 광주시에 걸쳐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데 그 중심에는 산성로터리가 있다. 로터리의 정면으로 보이는 행궁은 전란에 대비하여 1626년 건립되었다. 인조뿐만 아니라 숙조, 영조, 정조 등 많은 왕이 머물며 이용한 행궁을 구석구석 살펴보자.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행궁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큰 정문을 마주하게 된다. 한강 남쪽 성진의 누대를 뜻하는 한남루를 바라보다 보면 행궁의 웅장함을 느끼게 된다. 궁궐의 정전까지 3개의 문을 거쳐 들어가는 것이 법도인 ‘삼문삼조’에 따라 한남루 뒤에 두 개의 문을 더 통과해야 외행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궐의 중심 건물로 정당이라고도 불리는 외행전은 임금이 신하들과 국정을 운영하는 장소였다. 특히나 이 장소는 2010년에 복원이 되며 발굴 과정에서 통일신라 관련 유구들이 발견되었다. 건물 우측에 위치한 통일신라 건물지에 가면 당시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외행전 뒤편으로 돌아가 높은 계단을 올라가면 외행전과 외관상 비슷한 내행전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임금의 침전으로 중앙의 대청과 양옆의 온돌방과 마루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담으로 둘러싸인 내행전은 다소 폐쇄적인 구조인데, 임금의 안위를 보호하고자 함이다.
내행전을 지나 행궁의 가장 안쪽으로 걸어가면 작은 정원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정자의 형태를 띤 이위정이 있는데, 순조가 왕위를 이어가던 시절 활쏘기 연습을 하기 위해 지은 곳이다. 이위정이 위치한 풀밭 언덕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평화로운 행궁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다.
인조 앞에 선 두 세력, 주화파와 척화파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즉위한 인조는 광해군과 달리 친명배금 정책을 펼쳤다. 명나라를 섬기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펼친 조선에게 후금(청)은 새로운 관계를 맺길 요구했으나 조선은 척화로 맞선다. 이로 인해 1627년, 청은 조선을 침략하였고(정묘호란) 1636년, 2차 침입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다. 강화도로 피신하는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대피한 인조 앞에 신하들은 두 파로 나뉘어 대외정책을 논하고, 청은 외부와의 고립을 꾀하며 항복을 촉구한다.
“한 나라의 군왕이 어찌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치욕스러운 삶을 구걸하려 하시옵니까.”
-예조판서 김상헌
“저들이 말하는 대의와 명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옵니까?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시옵소서. 삶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대의와 명분도 있는 것이 아니옵니까.”
-이조판서 최명길
척화파는 청의 굴욕적인 요구를 배척하고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는 반면, 주화파는 명분보다는 실리를 따지며 화친을 주장한다. 영화 속 두 세력을 상징하는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는 왕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의견을 피력하고 인조의 고민과 한숨은 깊어간다.
남한산성 전투, 압도적 규모의 청군에 맞서다
병자호란 중 1637년 1월 10일부터 47일간 벌어진 남한산성 전투는 시작부터 조선군에게 불리한 전투였다. 방어전에 유리한 지형을 택하였으나 사전에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았을뿐더러 궂은 날씨와 식량 문제가 더해져 조선은 하루하루 위태로운 나날을 이어갔다. 신식 무기와 압도적인 숫자를 겸한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며 공격을 퍼부었다.
남한산성 전투 외에도 광주의 쌍령에서 펼쳐진 쌍령 전투와 강화도에서 방어전을 펼쳤던 강화부 전투는 조선군에게 뼈아픈 패배와 수많은 사상자를 안겨줬다.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리다
청군이 강화도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47일 만에 항복하게 된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푸른 죄수복을 입고 서문 밖으로 나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삼궤구고두'를 하였다. 이는 한번 무릎을 꿇을 때마다 머리를 땅에 대고 세 번 조아리는 것인데, 당시 인조의 찢어진 이마에서 흐른 피로 땅이 흥건해졌다고 한다. 조선 역사상 가장 잊고 싶은 치욕적인 순간일 것이다.
병자호란은 조선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을까. 청나라에게 항복한 조선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청나라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50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청군의 포로가 되어 만주로 끌려간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또한 인질로 잡혀간다. 외교적, 군사적 힘이 약했던 조선의 대외정책의 실패와 내부 분열이 초래한 가슴 아픈 결과이다. 2017년 영화가 개봉할 당시 많은 정치인은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평화로운 성곽길과 외부로 이어지는 네 개의 문
치욕스러운 역사의 현장은 오늘날 평화롭기만 하다. 치열했던 엄동설한 전쟁의 현장은 이제는 등산객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고, 서울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상에서의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낸다.
탐방로를 따라 걷다 마주하게 되는 네 개의 문 중 북문과 서문 앞에 발걸음을 멈추어보자. 전승문이라고도 불리는 북문은 이름과 달리 병자호란 당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가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를 겪었던 문이다. 서문은 인조 일행이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나간 문으로 삼전도가 위치했던 지금의 송파구에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에서 남문으로 향하는 길에는 수어장대가 가장 높은 지대에 있다.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으로, 남한산성에 지어졌던 5개의 장대 중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지붕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감상해보자. 영화 속 김상헌이 인조의 글을 군인들 앞에서 읽으며 결사항전을 다짐한 장면과 장군이 군인들을 지휘한 모습의 배경이 된 이곳을 마주하니 엄숙함 마저 느껴진다.
알고 가기
많은 관광객과 등산객이 찾는 남한산성을 더욱 알차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다. 토요일에 방문한다면 토요상설공연을 놓치지 말자. 매주 토요일 2시와 3시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이 공연은 남한산성 취고수악대가 종각 앞에서 연주를 한다. 경쾌한 음악 소리에 몸이 들썩인다.
이뿐만 아니라 남한산성 행궁은 평일과 주말에 해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사전 예약 시 외국어 해설도 가능하니 외국인 친구와 동행한다면 미리 살펴보자. 로터리를 기준으로 사방으로 위치한 수많은 음식점은 관광객들로 하여금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가족 또는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성곽길을 걸은 후 막걸리 한잔을 곁들이며 인조를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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