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 후 이야기

운수 좋은 날 - 강석경

기획특집 운수 좋은 날 그 후 이야기 05 운수 좋은 날, 이어쓰기 기획특집 운수 좋은 날 그 후 이야기 05 운수 좋은 날, 이어쓰기
1924년 『개벽』 48호에 발표된 그의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은 인력거꾼의 비애를 그린 작품으로 도시하층민의 운명을 추적하며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95년이 지난 오늘 김종광 최진영 정찬 윤고은 강석경 조경란 등 여섯 작가가 다양한 상상력으로 운수 좋은 날을 새롭게 그려냅니다. 현진건 소설 「운수 좋은 날」의 마지막 시점과 가까운 순서대로 작품을 배치하였습니다. 현진건 소설의 감동과 여운을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5화 운수 좋은 날 - 강석경

서울 나들이가 삼 주 만인가. 정자가 살고 있는 용인에서 광역급행버스를 타면 한 시간 안에 서울에 오지만 대학병원 예약이 아니면 특별히 서울 갈 일도 없다. 동창 모임에 안 나간 지 십여 년이 되고, 다리가 아프고부터는 옛 친구가 먼저 전화해야 일 년에 두어 번 얼굴을 볼 정도이다. 형제도 마찬가지여서 겨울에 본 동생 정옥이 사흘 전 모처럼 전화해서 오늘 점심을 먹자 했다. 강남 노보텔 호텔 뷔페 쿠폰이 생겼다고. 늘 그날이 그날인 정자도 기분전환으로 옷장을 열어놓고 화사한 기명색 재킷을 골라 입었다.

노보텔은 작년에 동생의 손녀 돌잔치를 했던 호텔 옆이라 쉽게 찾아갔다. 이층 뷔페 홀 안으로 걸어가니 오른쪽 테이블에 앉아있던 정옥이 손을 들었다. 강남 빌딩 주인 같지 않게 정옥은 하얗게 올라온 뿌리머리를 방치한 민낯으로 네 살 차 언니를 반겼다.

“이렇게라도 안 보면 보기 힘들어서.”

“나야 병원 다니느라 그렇고, 바쁜 건 너지. 멋진 호텔 뷔페에 불러줘서 고마워.”

“요새 육십은 청춘이더만 언닌 형부 간병하느라 삭아서 그래. 형부 돌아가시자 기다렸다는 듯 척추협착 수술하네 재활 치료하네, 대학병원 출입 시작했잖아. 벌써 약을 네 가지나 먹는다니 시간 날 때마다 운동하고 잘 먹고 살 좀 쪄, 나이 들면 먹는 게 뒷심이야.”

“혼자 먹자고 싱크대 앞에 서 있고 싶겠니. 무슨 노동을 한다고 하루 삼식을 채워. 그래도 병원 가는 날은 상 주듯이 맛있는 외식 먹어.”

정옥 말대로 소홀히 한 영양을 보충하려고 정자는 전복죽과 샐러드, 갈비찜으로 접시를 채워 왔다. 십 년 전 남편이 명퇴할 때 졸라 삼십 평대 목동 아파트에서 산이 보이는 경기도 전원주택으로 이사 가니 서울 집값은 폭등하고 남편은 사 년 뒤 폐암 진단을 받았다. 투병하다 남편이 이 년 만에 세상을 뜨자 모과나무가 있는 수지 집을 팔아 외아들 재훈이 분양받은 새 아파트에 유산 겸 일억을 보태주고 가까이 있는 작은 아파트로 옮겼다. 식사도 두 끼로 줄이고 본격적인 홀로서기를 시작한 셈이다. 정자가 조카들 안부에 이어 제부 근황을 묻자 요즘 수출사업이 잘돼서 이윤을 직원들에게도 돌렸다며 정옥은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주었다.

“언니한테도 나눠줄게. 며느리가 주는 돈은 치료비로 모자라지.”

“나까지? 박 서방이 부지런히 사업하니 처형한테도 훈김이 오네. 자식한테도 돈 줄 때가 좋지 의무로 받는 건 별로야.”

부잣집 곳간에서 인심이 나온다던가. 베푸는 정옥의 모습이 보기 좋다. 옛날엔 정자도 손이 커서 밥값은 도맡아 내고 아낌없이 썼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다. 며느리가 애교 있게 기름값 명목으로 매달 입금하는 이십만 원은 말 그대로 차비다. 자매는 중소도시의 유치원 원장인 막내 근황을 얘기하며 오순도순 세 접시를 갖다 먹었다. 커피까지 마시고 일어설 채비를 하며 정옥이 가을엔 두 자매를 평창에 초대하겠다 했다. 정옥의 별장이 있는 곳이었다. 이제야 꽃 피는 봄이지만 계획 없는 정자는 벌써 가을이 기다려졌다. 정자는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정옥에게 오늘 두루두루 고마워, 손을 흔들고 호텔 밖으로 나섰다.

특별히 한 얘기도 없는데 시계를 보니 벌써 두시다. 오후 진료가 시작됐을 테니 정형외과에 가자고 선뜻 마음을 정했다. 어깨가 아프기 시작한 것이 사오 년 전부터다. MRI를 찍었더니 어깨 관절을 둘러싸고 있는 회전근개가 이 센티 파열됐다고 했다. 수술할 크기는 아니라서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며 진통소염제와 물리치료를 받았지만 그때뿐이었다. 작년 봄엔 전국 체인인 한방병원에서 특수침 치료를 두 달 받고 호전되었다. 그 뒤 방치했더니 지난겨울부터 밤이면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에 잠을 깨곤 했다. 어젯밤에도 어깨 통증에 신음하다가 내일 서울 가면 병원에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거기다 뜻밖에 큰돈이 생겼으니.

사실 병원은 일주일 전부터 정해놓았다. 인터넷에서 명문의대 출신 박사가 진료하는 병원을 찾았다. 세계적인 학술지에 박사의 논문이 실리고 세계 3대 인명사전 의학 분야에 모두 등재되었다는 소개가 눈을 잡아끌었다. 치료 방법도 구체적으로 나와 있어 신뢰감을 듬뿍 주었다. 다른 건 몰라도 병만큼은 빚을 지더라도 최고의 의술로 치료받아야 한다는 게 정자의 경험이고 믿음이었다. 밤마다 통증에 잠을 깨는 걸 보면 상처가 깊어진 듯했다.

병원은 바로 강남 한가운데 있어 정자는 걸어서 찾아갔다. 부근의 고층건물이 낯익어 다시 보니 아는 정형외과 이름이 상호로 적혀있었다. 전에 한번 가본 적 있는 병원이었다. 젊을 때부터 허리가 좋지 않아 여러 병원을 거친 터였다. 삼 년간 다녔던 대학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은 척추수술을 하려던 담당 교수가 갑자기 미국에 들어갔고 지금은 동네 한방에서 침 치료를 받으며 통증이 완화됐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위력인지 병원은 과연 붐볐다. 첫 환자로 등록하고 기다리던 정자는 가방을 들쳐보다 정옥이 준 봉투를 꺼냈다. 이삼십만 정도려니 했지만 꽤 두툼했다. 정자는 오만 원 다발을 꺼내 세며 열 장이 넘어가자 고개를 갸웃했다. 스무 장이라니 기대치 않은 백만 원이었다. 얼마 만인가. 백만 원 현금을 선물로 손에 쥐다니 철없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 차례가 되어 정자는 간호원이 일러준 대로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척추 엑스레이를 여러 장 찍고 여의사 진료실로 가서 어깨 초음파를 찍었다. 오 년 전 찍은 MRI 결과를 말하니 지금 상태가 심한 건 아니라고 했다. 걱정한 만큼 나빠진 건 아닌 것 같았다. 다시 나와 원장 진료를 기다리는데 카운터의 직원이 정자를 호명했다. 여자는 정자 앞으로 종이를 내밀며 원장님 진료 들어가기 전에 읽어보라고 했다.

“여기 진료비 나와 있죠. 초음파는 십육만 원. 처방으로 맞는 주사비는 한 대에 십오만 원인데 상태에 따라 두 대 맞을 수도 있어요. 동의하면 사인해주세요.”

무슨 주사인지 비싸지만 박사의 치료라 특별한가 보다. 정자는 더는 따지지 않고 사인했다. 원장은 정자가 앉자 차트를 보며 용인에서 여기 어떻게 알고 왔어요? 물었다. 인터넷 보고요, 정자는 자신도 정보에 밝은 현대인이라는 자부심을 슬쩍 비쳤고 박사는 용인서 온 사람이 또 있어서-하고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 박사는 밤의 물결처럼 움직이는 거뭇한 초음파 화면을 보여주며 친절히 일러주었다.

“전에 2센티 파열됐다는데 그때보다 더 커졌어요. 이 부위는 저절로 아무는 데가 아니라 두면 점점 더 커져요. 3센티가 되면 수술해야 하지만 아직은 수술하기 아까우니 치료받으면 되겠어요. 오십견도 약간 있고 주사를 두 대 놓습니다.”

한방의 침처럼 따끔한 흔적만 내고 치료가 끝났다. 처방한 부위엔 반창고가 붙여졌다. 이 주사로 통증이 없어지는지, 치료는 얼마가 걸리는지, 파열된 상처는 어떻게 마무리하는지 정자가 물으니 삼 개월 정도면 치료되고 상처는 뒤에 시술을 할 거라 했다. “주사 맞았다고 통증이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이건 증식이에요.”

증식이 무언지는 몰라도 치료는 간단했다. 의사가 사흘 후 오라고 한 걸 보면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치료할 모양이었다. 정자가 진료실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고 카운터로 가니 직원이 프린트된 종이를 주며 사십구만 팔천육백 원이에요, 했다. 무슨 오십만 원이나. 정자가 놀란 눈으로 계산서를 들여다보니 처치 및 수술료가 비급여로 삼십만 원이 기재돼 있었다.

주사 한 대에 십오만 원이라면 두 대에 삼십만 원이 맞다. 원장도 두 대를 놓는다고 말했지만 등 뒤로 그 말을 듣고 '두 대라면?' 하고 가격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확인해야 했나. 이런 반응을 예상한 듯 여직원이 정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기가 강남이라 비싸겠지만 과하네. 올 때마다 십오만 원의 주사인지 침인지 맞아야 한단 말이지. 혹은 두 대씩.

문득 십 년도 전 석관동 큰 정형외과에서 비싼 기계 처치를 받으며 거의 백만 원을 부었던 것이 기억났다. 티브이에 자주 나오는 그 병원장의 한결같은 미소를 보고 의술이 인술은 아니라는 건 알았지. 가방의 봉투에서 오십만 원을 빼내니 갑자기 사기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내년에 지공파가 될 무직자에겐 한 달 용돈이 될 터였다. 백수 주제에 일류의사병에 걸려 인터넷을 뒤지다가 츠츠. 언젠가 동창이 정옥의 사주를 보고 돈이 들어와도 다 새나간다더니 이런 거구나.

호텔서 나설 때 하늘이 흐리더니 병원에서 나서자 비가 부슬 내리고 있었다. 오늘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고 했다. 정자는 준비한 우산을 가방에서 꺼내며 먼저 은행에 들러 입금하기로 했다. 현금이 문제다. 돈이 있으니 쓰고 싶어 제 발로 나가지. 정자는 현금을 탓하며 지나가는 길에 있는 은행 인출기에 남은 돈을 입금했다. 감금이라도 하듯. 정자는 돈 무게만큼 가벼워져 허청 걸어가다 유리 안으로 커피숍을 보고 들어갔다. 커피 마시는 정경은 늘 유혹적이다.

5화 운수 좋은 날 - 강석경

마시면 특별할 것 없이 씁쓸한 커피 맛을 확인하려니 갑자기 진동 벨이 울렸다. 진료를 받느라 진동으로 해놓고 미처 풀지 못했다. 발신인이 뜨지 않았지만 이날 처음 온 전화라 무심히 받았다.

“김정자 씨 폰 맞죠. 황녀 크림 받아서 써본 분-”

‘황녀크림’이란 말에 정자는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아, 제가 며칠 전 택배로 다시 보냈는데 받았죠?” 상대는 “받긴 받았어요” 하고 뜸을 들이더니 “샘플은 다 발라 본 거죠? 회수한 크림에 사용 흔적이 있는데 이런 건 팔 수가 없어요” 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정자는 커피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폰을 바짝 귀에 댔다

“아니 크림을 누가 사용해요. 전화 잘못한 거 아녜요? 며칠 전 그쪽에서 전화해 샘플 사용 의견을 묻기에 다 말해줬어요. 피부가 맑아지는 것 같다고. 주변에 권할 수는 있지만 삼십만 원짜리 크림 바를 여유가 없으니 받아 가라고요. 택배사가 환수한다기에 왔던 그대로 박스를 봉해 보내고요. 사지도 않을 걸 내가 왜 남의 물건에 손댑니까.”

“누가 봐도 사용한 흔적이 있는데 그러시면 어떡해요. 사진 보낼 테니 보고 말씀하세요.”

정자는 무언지 모르지만 그러라고 대응했다. 초진에 오십만 원의 진료비를 날리고 커피숍에서 머리를 비우려 했더니 이건 또 무슨 홍두깬가. 열흘 전 정자에게 화장품사에서 전화가 걸려와 세포줄기로 만들어진 신품을 개발하여 홍보 중이라 했다. 신상품과 함께 샘플 두 개를 보낼 테니 느낌만 말해달라고. 무차별로 연락한 것이며 상품도 구경하라고 함께 보내는 거니 부담 갖지 말라고 거듭 안심시켰다. 기초화장으로 로션 정도 바르는 정자이지만 며느리가 떠올라 샘플을 써보기로 한 거였다.

폰으로 잠시 후 사진이 들어왔고 정자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크림 통 한쪽이 손으로 덜어낸 듯 움푹 패어 있었다. 다른 쪽 가장자리에도 손가락으로 휘두른 자국이 있었다. 누가 봐도 훼손된 상품이지만 물론 정자는 크림 통에 손도 대지 않았다. 정자의 주소가 쓰인 택배 상자 사진도 들어와 있었다. 상대 여자가 뭐라고 떠드는데 벌떼처럼 귓가에 웅웅거렸다.

“이게 내가 한 짓이라는 건가요. 미쳤어요. 이건 화장품을 사용한 흔적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휘젓고 덜어낸 흔적이네요. 비싼 밥 먹고 내가 이런 짓 할 리가 있어요. 누가 한 짓인지는 모르지만 회수해간 택배사나 당신들 쪽에서 알아봐요.”

상대가 다시 대거리해서 정자는 한숨을 쉬었다. “삼십만 원이 내 통장에 있긴 하지. 덮어씌워서 그걸 빼내고 싶다면 변호사라도 상담해요”하고 폰을 꺼버렸다. 뭐 이런 왕재수가 있어. 눈 감으면 코 베어 먹을 세상이라더니 눈 뜨고도 코 베이겠다. 정옥의 선물에 횡재나 한 듯해서 돈 쓸 궁리부터 했더니 별 아귀가 달려드네.

열이 올라 상기된 채 앉아 있지만 화가 삭지 않았다. 입안이 바짝 말랐고 입맛이 완전히 달아났다. 천만 국민이 웃었다는 영화가 있던데 그거라도 보고 머리를 씻을까. 식은 커피 잔을 물리고 정자가 밖으로 나가자 어느새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찾으려고 가방을 뒤지니 우산이 보이지 않았다. 아까 현금인출기에 입금하고 나와서 우산을 썼든가. 그 짧은 몇 분간이 지우개로 지운 듯 하얀 공백으로 떠올랐다. 우산을 잊어버리고 나온 거야. 그제야 정자는 깨닫고 은행을 향해 뛰듯 걸어갔다.

남편이 암 진단을 받은 뒤 정자 생일에 선물한 루이뷔통 우산이었다. 평소 무뚝뚝한 남편이 푸른 바탕에 다이아몬드 무늬가 깔린 날렵한 우산을 고르다니, 아끼고 잘 쓰지 않았다. 누가 우산이 쉽게 고장 나서 매장에 가져갔더니 “루이뷔통 우산을 폭우에 쓰나요. 호텔서 내려 몇 발 걸어갈 때나 잠깐 쓰는 거죠” 했다지.

커피숍에서 오 분 거리라 비도 개의치 않고 뛰어왔건만 인출기 위와 실내 어디에도 루이뷔통 우산은 보이지 않았다. 남편의 마지막 선물인데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지만 정자는 인출기 앞에서 망연히 밖을 바라보았다. 빗줄기가 점점 더 거세지니 나갈 수도 없어 이러다 폭우가 오려나. 어수선한 머리에 폭우라는 단어가 새겨지니 뜬금없이 ‘오늘의 운세’ 같은 문구가 떠올랐다. 폭우에 쓰지 말아야 할 우산은 그대 것이 아니다.

강석경

〃 작가소개 〃

강석경 소설가

소설집 『밤과 요람』 『숲속의 방』 장편소설 『가까운 골짜기』 『내 안의 깊은 계단』 『미불』 『신성한 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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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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