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 후 이야기

휴가 - 조경란

기획특집 운수 좋은 날 그 후 이야기 05 운수 좋은 날, 이어쓰기 기획특집 운수 좋은 날 그 후 이야기 05 운수 좋은 날, 이어쓰기
1924년 『개벽』 48호에 발표된 그의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은 인력거꾼의 비애를 그린 작품으로 도시하층민의 운명을 추적하며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95년이 지난 오늘 김종광 최진영 정찬 윤고은 강석경 조경란 등 여섯 작가가 다양한 상상력으로 운수 좋은 날을 새롭게 그려냅니다. 현진건 소설 「운수 좋은 날」의 마지막 시점과 가까운 순서대로 작품을 배치하였습니다. 현진건 소설의 감동과 여운을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6화 휴가 - 조경란

보름 전부터 이숙은 사월 첫째 주 금요일을 기다려왔다.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내지 못했던 휴가를 그제야 받았다. 폐렴이 그렇게 큰 병인가, 미스 정? 차대리는 그렇게 한 마디하고 이숙의 눈을 똑바로 봤다. 그럴 때의 어투며 표정이 관장과 닮아 보였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사흘 동안, 특별한 계획을 세워둔 것은 아니었다. 아직 폐렴에서 회복하지 못한 어머니와 면역력에 좋다는 버섯을 넣고 솥밥을 지어먹거나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도 좋았다. 벚꽃도 한창인 데다 그런 한가한 시간을 가져본 적도 최근에는 없었으니까. 목요일에는 퇴근이 더 늦었다. 관장의 집에는 늘 치워야 할 것들이 있었다. 텔레비전을 켜둔 채 어머니는 잠들었고 불이 환한데도 빈집 같았다. 어머니는 또 의치를 빼지 않고 잠이 들었다. 이제 칠십일 세밖에 되지 않았는데 깜박 잊는 게 많았다. 의사는 구강 위생에 더 신경을 쓰지 않으면 흡인성 폐렴이 이번보다 심하게 생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숙은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자신과 어머니, 평생 그렇게 둘 뿐이었다. 영화 조연출부로 일하던 윤은 흥미로운 장면이란 한 공간에 세 사람이 모여 있는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사는 것도 그럴지 모른다고

6화 휴가 - 조경란

그게 진짜 윤의 말인지 아니면 어디서 들은 말을 옮기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숙은 종종 그 말을 떠올리게 됐다. 지금처럼 어머니는 무사히 잠들고 오래가지 않을 침묵이 좁은 집에 잠시 고일 때. 어머니는 왜 마흔도 넘은 나이에 자신을 낳겠다는 결심을 했을까. 아버지도 없이 무섭지 않았느냐고 언젠가 이숙은 어머니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게 그때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어머니는 담담하게 말했다. 휴가를 받을 줄 알았다면 삼박사일 동안 다낭 같은 데 단체 여행을 떠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퇴원한 날 어머니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큰 강과 해변을 끼고 있다는 따듯한 관광도시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이숙이 아는 그런 도시는 요즘 사람들이 많이 간다는 다낭밖에 없었다. 둘이 한 번도 그런 시간을 가져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서른한 번째 봄이 지나가고 있었다.

“회장님이 내일 오신대.”

차대리가 재빨리, 사무적으로 말했다. 이숙은 휴대전화를 바꿔 들었다.

“미스 정, 듣고 있어?”

“회장님은 LA에 계시잖아요.”

이숙은 잠결에 전화 받은 걸 후회했다.

“그런데 내일 들어오신다고. 곧장 여주로 가신대. 무슨 말인지 알지?”

차대리가 소곤거렸다. 관장은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듯.

“지금 지사에 임원들 몇 분도 여주 별장으로 출발하셨어.”

별장 관리인이 나무를 손보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깁스를 한 게 열흘 전쯤이었다. 어젯밤에 전화를 꺼두고 잠들었어야 했다고 이숙은 후회했다.

“저 오늘 휴가 냈는데요.”

“왜 이래 미스 정, 어서 여주로 출발해. 여기 도우미들은 오늘 사모님 손님들 초대가 있어서 출장 못 나가. 미스 정밖에 손이 없어.”

관장을 사모님이라고 부르다니. 차대리가 정말 경황이 없는 모양이었다. 관장이 들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알면서.

지난해 늦가을, 입사한 지 네 달쯤 지났을 때 비슷한 일로 이숙은 여주 별장에 내려간 적이 있었다. 계열사 대표인 둘째 딸 생일 파티를 그곳에서 열기로 했는데 별장을 비워둔 지 오래여서 청소도 이틀간이나 한다고 했다. 본사에서 보낸 용역업체 직원들과 그들이 모는 승합차를 타고 여주로 갔고 거기서 하룻밤을 보냈다. 관장의 여자 집사 겸 도우미들을 관리하는 차대리와 한방을 쓴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입사할 때는 미술관 직원으로 들어왔다는 차대리가 어떤 일로 집안 살림을 맡게 된 건지 물어볼까하다 그만둔 날도. 별장의 크기와 상관없이 청소는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별장 앞에는 남한강이, 옆길로 들어서면 거대한 숲이 있었다. 숲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뭇잎들과 마른 먼지들이 날려 들어와 창문을 닫고 청소를 해야 하기도 했고 그건 이숙이 싫어하는 일 중 하나였다.

“어머니가 아프세요. 정말이에요." 이숙은 말했다.

이숙은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다. 지난번처럼 보너스 주신대도 오늘은 출장 나가고 싶지 않아요, 차대리님. 새벽에 저희 어머니가 꿈을 꾸었거든요. 나쁜 꿈을 꿨다고, 그래서 날이 밝으면 아무 데도 나가지 말고 둘이 집에만 있자고 당부하셨어요. 자는 저를 일부러 깨우셔서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어머니 꿈이 대개 맞아요. 특히 나쁜 꿈은요. 그게 아버지가 등장하는 꿈인데요, 빚쟁이들한테 쫓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어요. 어머니한테 직접 들은 말은 아니고요, 그냥 크면서 저절로 알게 됐어요. 아버지가 꿈에 나타났다고 하면 아주 좋은 일이 생기거나 정반대의 일인데, 어머니 표정이 이럴 때는 좋지 않을 때거든요. 제가 오늘 같은 날 밖에 나가면 어머니가 하루 종일 불안해하실 거예요.

이숙은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꿈을 꿀 때마다 말했다. 누가 죽어서도 가족 아니랄까 봐 좋으면 좋은 일로, 그렇지 않으면 그런 얼굴로 꼭 선몽을 한다고. 그러니까 조심해야 할 건 조심하는 게 좋은 거라고.

“퇴원하셨다며. 서둘러 미스 정.”

차대리는 이숙에게 문자메시지로 강남역에서 여주역 가는 방법을 보내주겠다고 하곤 전화를 끊었다. 금요일 아침 아홉 시 반이었다. 새벽에도 어머니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기침소리를 냈다. 이숙은 날씨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낮 기온 십칠 도, 미세먼지 보통. 자외선 높음. 휴가를 맞기에 좋은 날씨였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인지 어머니는 모로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의사는 면역력이 너무 저하된 상태라 다시 혼미나 혼수상태가 올 수도 있으니 잘 먹고 잘 주무시고 잘 쉬게 하라고 당부했다. 무엇보다 나이 든 환자한테는 정신적인 안정을 취하게 해야 한다고.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이숙은 반 조리된 인스턴트 국을 덥히고 밥통에 밥을 안쳤다. 불 조절을 해가며 느긋하게 솥밥을 지어 쫑쫑 썬 달래장을 끼얹어 먹고 꽃이 핀 길로 산책을 나가겠다는 게 터무니없는 욕심처럼 느껴질까 봐. 아니면 어머니 표현대로 오늘같이 삿된 기운이 느껴지는 날은 하루 종일 바깥에 나가지 않는 그 가능하고도 어렵지 않은 일이.

밧줄을 가져가야겠다고 이숙은 생각했다.

어깨까지 닿는 머리를 이숙은 하나로 올려 묶고 앞치마 끈을 조절했다. 청소는 물과 같을 때가 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 청소도 높은 곳에서부터 시작해 낮은 곳으로 이동해서 한다. 천장과 전등의 먼지부터 털어낸 후 바닥을 닦아내는 방식으로. 그리고 밖에서 안쪽으로. 그러고 나면 맨 마지막엔 욕실이 남는다. 이 이층 별장에는 욕실만 해도 네 개다. 오늘은 용역업체 직원들은 안 불렀는지 지사에서 온 직원 네 명과 이숙, 이렇게 다섯 명이 청소를 맡았다. 회장이 별장에 도착하는 시간은 내일 아침. 늦어도 오늘 밤까지는 청소를 마쳐놓고 자리를 비워야 한다. 지사에서 온 부장 두 명은 도착하자마자 거미줄을 치우러 나갔다고 했다. 회장이 가장 싫어하는 게 산책하다가 거미줄에 걸리는 거라고 들은 적이 있다. 특히 얼굴에 거미줄이 걸릴 때. 그럴 때 얼마나 불호령이 떨어지는지 모른다고. 불호령. 그 말을 하면서 지사에서 온 남부장은 목을 움츠렸다. 세상에, 거미줄까지 어떻게 치우라고. 이숙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남부장이 표정을 바꾸더니 이숙에게 딱딱한 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 다신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미스 정.
그 거미줄 이야기를 전하자 윤은 말했다.

그 회장님한테도 무서운 게 있구나.
이숙은 가끔 윤과 왜 헤어지게 된 걸까, 생각해볼 때가 있었다. 그가 몸이 불편한 여동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도, 자신이 어머니와 헤어져 살 수 없다는 것도 문제가 됐을 수 있다. 네 사람이 함께 모여 살 수 없는 형편도. 그러나 이숙은 그게 사랑이 아니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서로 꺼내 본 적도 없는 문제여서 해결해 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거니까. 그랬다. 서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많은 문제들을. 윤과의 결별은 이숙의 마음에 어떤 표식을 남긴 듯했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도 그와 미래를 상상하는 일에도 자신은 부적격이라는. 그 무거운 마음이 더 굳어져 버린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이숙은 머리를 흔들며 낡은 칫솔을 찾아 들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부장들은 이만 평도 넘는 숲의 산책길로 거미줄을 치우러 갔는지 보이지 않고 다른 직원들이 정원의 목련과 철쭉, 피지도 않은 꽃들과 떨어진 꽃잎들을 줍고 잡초를 뽑고 있었다. 이숙은 창틀에 발라두었던 베이킹소다를 칫솔로 문질러 닦은 후 마른 걸레질을 했다. 창틀만 제대로 청소하는 데도 반나절은 걸린다. 다행히 관리인이 얼마 전에 대청소를 해놓아서 그런지 먼지가 별로 없었다. 양 손에 양말을 끼우곤 블라인드를 닦기 전에 일 이층의 카펫에 굵은 소금을 뿌려 두었다. 나중에 청소기로 문지르면 먼지가 소금에 달라붙어서 일이 수월해진다. 청소는 보이지 않는 곳까지. 평창동 관장의 집에 입사한 첫날부터 이숙은 관장과 차대리한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해보지 않으면 먼지는 사라지지 않고 집 안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다닐 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거다. 이숙은 블라인드를 닦으며 밖을 내다보았다. 오래된 소나무 전나무를 심어놓은 정원과 곳곳의 벤치와 조각들. 이 넓은 데서 살려면 세 사람이 아니라 삼십 명은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통유리 창. 지난 늦가을 오후에 이 유리창으로 돌진해 탕, 하고 부딪쳐서 죽은 새를 이숙은 기억했다.

막차는 여주역에서 열 시 오십 분에 떠난다. 이숙은 막차 시간을 어머니에게 알리려고 전화기를 앞치마 주머니에서 꺼냈다가 얼른 액정을 꺼버렸다. 집을 떠난 후부터 지금까지 어머니에게 전화가 열한 통 와 있었다. 어머니한테 자신은 단축키 1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숙은 고개를 저었다. 받을 수도 없고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갈 수도 없다. 어머니에게 좋은 일로 전화가 온 적은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번호만 떠도 불안해지는 발신자가 어머니라니. 이숙은 늦은 점심으로 배달시킨 자장면을 다 비웠다. 어머니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라면 오늘 하루는 썩 괜찮은 데다 어쩌면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먼지도 많지 않고 낙엽을 치울 일도 없고 쓰지 않은 주방에는 기름때도 씻어야 할 것도 별로 없다. 이제 욕실 청소만 남은 셈이었다. 수도꼭지는 치약을 짜서 닦아주면 반짝반짝하게 빛난다. 변기와 욕조, 세면대의 물때는 린스를 발라 문지르면 될 거고. 마지막으로 일이 층 전체를 고압 스팀청소기로 마무리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급해할 일이 없어 보였다. 해도 길어졌다. 이숙은 주방에서 믹스커피 다섯 잔을 타서 직원들 앞으로 내갔다.

“관장님 댁엔 요즘 별일 없나?”

남부장이 이숙에게 물었다.

“주방에 인턴을 한 명 더 뽑으신대요.”

“필리핀 여자로?”

“글쎄요. 차대리님이 알아서 하시겠죠.”

“차대리 일이 곧 우리 일이지.”

남부장은 음식 그릇에 덮여 왔던 신문지를 펼쳐 들었다. 아까 정원을 치우던 직원들한테서 남부장이 퇴사를 생각한다는 말을 들었다. 회식자리에서 술에 취해 회사 때려치우고 전문 주례인이 되겠다고 했다고. 전문 주례인이 뭐냐고 이숙은 그 직원에게 물었다. 그런 게 있나 봐요, 요즘 신랑신부들이 다들 바빠서 개인적으로 주례를 못 모시는 경우가 많대요. 그래서 전문 주례인이 은퇴자들한테 인기라는데요, 자격증도 따로 있고.

이숙은 방금 전까지 긴 막대를 들고 산책로에서 잘 보이지도 않을 거미줄을 치우고 온 남부장을 봤다. 양복을 입은 채 신문을 읽고 있어서 그런가, 단상에서 신랑 신부에게 축하와 당부의 말을 해주는 자리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걸까. 때가 되면 집사 일을 그만둘 거라고 한 차대리의 말이 떠올랐다. 남편과 제주에 작은 집을 하나 봤는데 가격이 맞을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라고. 청소하러 왔던 지난 늦가을이었다. 트윈 침대가 있는 이층 손님방에서 같이 투숙한 날. 그 말은 잊고 있었다. 이숙이 기억하는 건 차대리가 자신의 어머니에 관해 한 말이었다. 결혼해서 분가할 때가 돼서야 어머니한테 이만큼 키워주셔서 고마워요 라는 말을 했다고. 잠이 몰려와서 그랬는지 차대리 목소리가 울먹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숙은 돌아누웠다. 자신한테는 평생 어머니에게 그런 말을 할 기회가 생기지 않을 거였다. 다시 돌아누워서 이숙은 한 팔을 이마에 올려 눈이 보이지 않는 차대리한테 말하고 싶었다. 남으면 버려야 하는 어묵이 다 팔릴 때까지 매일 밤 포장마차를 접지 않고 자신을 키운 사람이 어머니인데 이따금 그 사람을 버리고 혼자 먼 데로 달아나는 꿈을 꾼다고. 윤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들을.

직원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회장이 손끝으로 먼지를 쓸어볼 만한 데는 모두 점검해야 했다. 이숙은 혼자 네 군데의 욕실 청소를 마쳤다. 진행 사항을 궁금해할 차대리에게 메시지 한 통을 보냈다. 세 시 이후로 어머니한테 걸려온 전화는 한 통도 없었다. 별일 없겠지. 이숙은 욱신거리는 허리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남부장 말을 들으니 보너스는 기대 이상인 모양이었다. 오늘 하루 덕분에 어머니와 큰 강과 해변이 있는 도시로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날이 더 따뜻해지고 어머니의 만성 알레르기성 비염이 좀 잦아들면. 그런데 왜 전화를 안 하는 거예요, 엄마?

부장들이 먼저 자동차를 타고 별장을 떠났다. 남은 직원 두 명은 수영장 바닥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처리하고 간다고 했다. 이숙은 둘둘 만 밧줄을 들고 거실 전면 창을 열었다. 의자 하나를 들고 와 데크 식으로 된 베란다 밖에 놓았다. 가장 큰 유리창 앞이었다. 가위로 오십 센티미터쯤 길이로 밧줄을 잘랐다. 이숙은 의자 위로 올라가 몇 가닥으로 자른 밧줄을 간격을 두고 바깥 창틀 위로 묶기 시작했다. 간격을 벌려 묶을 때마다 의자에서 내려와 그 폭만큼 의자도 옮겨가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했다. 바람이 불면 줄이 흔들릴 것이다. 열 개도 안 되는 밧줄을 늘어뜨린 셈이지만 원근감이 약한 새들은 그래도 밧줄들을 장애물로 인식해서 유리창을 통과하지 않을 수 있겠지. 더 효과가 있으려면 줄을 바닥까지 늘어뜨려야 한다. 하지만 오늘은 일단 시험 삼아서. 회장이 그 밧줄을 그대로 놓아둔다면 다음에 출장 와서 별장 전체의 통유리창에 밧줄을 매달 수 있을 거였다. 뼈가 텅 빈 새들이 힘껏 창문으로 날아와 부딪쳐 갑자기 죽는 소리를 한 번만이라도 듣는다면, 밧줄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숙은 창 안쪽에 서서 늘어진 밧줄을 보았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해냈다는 눈으로. 바람은 불지 않았고 밧줄이 흔들리지도, 아직 새들이 날아오지도 않았다. 해가 저물고 휘어진 검은 길처럼 보이는 남한강을 바라보며 때론 어머니의 예감이 틀릴 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막차를 타고 집까지 무사히 가면 된다. 휴가는 이틀이나 남았다. 전화는 잠잠했다. 오늘 아침 경강선을 타고 여주로 내려올 때, 집에서 멀어질수록 불안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지금부터 집으로 가까워질수록 여느 때처럼 희미해지는 그 불안은 분명하게 남아 있었고 이숙은 그것을 손에 움켜잡으려는 듯 두 손을 앞치마 주머니로 푹 찔러 넣고 돌아섰다.

조경란

〃 작가소개 〃

조경란 소설가

소설집 『불란서 안경원』『나의 자줏빛 소파』 『코끼리를 찾아서』 『국자 이야기』 『풍선을 샀어』
장편소설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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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8-21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