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강우석의 이끼

이끼! 만화는 만화, 영화는 영화다
「이끼」는 만화다. 윤태호의 만화는 기괴하다. 압축적이다. 캐릭터는 과장되고, 분위기는 공포스럽고, 마치 카메라가 서서히 클로즈업하듯 섬세한 점강법으로 독자의 심리를 압박한다. 그의 만화는 움직임의 정지화면이라기보다는 단말마적인 장면의 순간 포착에 가깝다. 고립된 산골은 모든 색이 바래버린 세계이고, 도시는 화려한 색깔로 치장했지만 서로 어울리지 못한다. 거친 선이 세상에 대한 분노로 읽힌다.
윤태호의 「이끼」는 대사가 거의 없다. 그림 그 자체는 물론 그림과 그림 사이의 공간과 시간과 변화를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은 그 빈 곳에 독자의 상상력이 들어간다. 그 상상력을 지배하는 것은 마치 희곡에서의 지문처럼 간결하면서도 날카로운 글과 같은 그림의 연속적인 확대를 통한 강조이다. 윤태호 특유의 양식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사건의 중심 인물인 천용덕 이장을 보자. 우선 그의 생김새부터 섬뜩하다. 지나치게 강조된 볼, 독사 같은 눈. 아버지의 죽음으로 마을에 온 류해국이 단순하게 자신의 영역으로 침범해오자 그의 눈은 더욱 가늘어진다. 그리고 속으로 한마디 “이놈 봐라?”
만화-본격한국식 잔혹 스킬러 이끼
「이끼」의 세상은 기본적으로 뒤틀려있다. 그 이유가 탐욕이든, 부패든 류해국은 그 피해자이다. 윤태호는 그런 세상에 대한 조롱도 한마디로 압축한다.
“당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 잘못이 잘못이 아닌 세상에 사는 게 잘못 아니겠느냐, 당신이나 나나.”

천용덕 이장의 “이놈 봐라?” 만큼 마을사람들이 하나같이 경계하는 묘한 분위기의 느낌을 표현하는 류해국의 한마디.
“뭐야, 이 더러운 기분은.”

이런 바늘 같은 독백 혹은 내면 표현의 문장을 윤태호는 묘하게, 이유는 다르지만 등장인물 사이에 공유하도록 만든다. 이는 ‘당신은 잘못이 없다’는 류해국의 결백을 무시하고 오히려 가해자로 만들려다 시골로 좌천된 젊은 검사 박민욱에게도 해당된다. 그런데 왜?

윤태호는 거침없이 세상을 향해 언어의 주먹질을 한다. “혼자 정의로운 척, 잘난 척, 그런 위선자의 잘못이 아니냐”고. 그것도 큰 글씨로. 단호하다. 이렇게 정의를 부르짖으며 개 같은 세상에 대고 욕질을 해대고 위선자의 덫에 걸려든 인간들은 이로울 수밖에 없다.
류해국은 아내와 이혼했고, 직업까지 잃었다. 박민욱은 아내를 떠나 객지에서 혼자 생활한다. 윤태호는 그들의 분노와 외로움을 하나의 시청각적 장면으로 이미지화 한다. 검사는 술자리에서 아내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말없이 받아 듣기만 하고, 류해국은 방에서 혼자 부스럭거리며 잔다. ‘쏴아’하고 강조하고 반복하는 빗소리만이 그들의 내면을 은유할 뿐이다. 그것이 오히려 가슴을 파고든다.
류해국은 천 이장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정의한다. ‘불쾌하고, 음모적인 눈빛, 칼끝 같은 신경줄, 반 박자 빠른 상황인식, 무섭도록 원초적인 인간’이라고. 어쩌면 윤태호는 만화 「이끼」 전체, 그것의 주무대인 산골마을의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한 인물을 통해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류해국이 “난 당신이 싫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애초 그런 세상에, 그런 인간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스며들듯, 천천히 이끼처럼 들러붙어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인간은 절대 자신의 비밀과 약점을 파고드는 인간을 곁에 두지 않으니까. 류해국의 천성 탓도 있다. 상대가 숨기려 하면 들춰내고, 피하려 하면 마주하고, 넘어가려 하면 붙잡아 따지는 것을 정의감이라고 여기는 인간은 모두 멀리한다. 「이끼」는 산골마을의 천 이장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은 돈 앞에 굴복하고, 자기의 목줄을 쥔 사람 앞에서 개처럼 순응한다. 순응하지 않고 배신하면 천용덕의 뇌물을 먹은 교도소장처럼 파멸하고 만다.
「이끼」는 선과 악, 해탈과 탐욕의 극단적 대비이다. 류해국의 아버지인 류목형은 현실의 집착을 버리고 죄의식을 씻어내 구원을 얻으려는 신의 아들이고, 전직 형사출신인 천용덕은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부하는 철저한 속물주의자이다. 둘의 승부는 뻔하다. 그 사이에 끼어든 류해국과 박민욱 검사의 천용덕의 실체 밝히기를 통해 만화 「이끼」는 정의의 승리를 말하지 않는다. 다분히 허무적인 색깔의 삶의 철학 몇 가지를 남길 뿐이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겸손이다, 삶의 밀도는 매 순간 같지 않다, 진정한 네 편은 너 밖에 없다, 싸우지 않고는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다, 지키고 싶으면 흔하게 만들어라.
만화로서는 주제넘은 짓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윤태호의 「이끼」는 만화가 가진 단순함을 단순함으로 뛰어넘었다. 느와르적인 분위기가 갖는 우울함 덕분도 아니다. 말 없고, 움직임이 없는 인물들 사이에 놓인 빈 공간을 건널 때마다 점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으로 보이지 않게 채워 넣은 작가의 타고난 재능 덕분이다.
영화 이끼 포스터
《이끼》는 영화다. 윤태호의 만화가 원작이고, 등장인물과 사건과 스토리를 그대로 차용했지만 강우석 감독의 영화다. 강우석의 영화는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강우석의 영화는 사회에 민감하다. 사람들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원하는지 안다. 그래서 과감하게 《실미도》를 만들었다. 현실성이 있건 말건 관객들이 영화에서 불의를 응징하고, 사회 정의가 승리하는 것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공공의 적》을 만든 이유다. 강우석은 그것이야말로 중요한 흥행코드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대부분 들어맞았다.

그런 그가 2010년 여름, 《이끼》를 선택했다. 그의 목표는 분명했다. 그는 원작을 영화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때문에 단순히 원작의 유명세를 타자는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끼」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선과 악의 대결과 사회정의를 보았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영화 《이끼》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만화가 가진 은유와 상징과 형식미를 버렸다. 철학적 분위기도 걷어냈다. 대신 직접적이고 직선적인 표현, 웃음을 섞은 영화적 리듬, 선악의 강한 대립과 궁극적인 선의 승리로 관객에게 통쾌함을 선물하려 했다. 《공공의 적》의 냄새를 억지로 없애려 하지 않았다. 강우석으로서는 자연스럽고,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다.

강우석은 마니아를 위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누적관객 3,000만 명을 기록한 흥행감독의 머릿속에는 대중적인 영화 《이끼》가 필요했다.
영화가 이끄는 힘에 자신도 모르게 관객들이 끌려가는 그런 영화. 그래서 그는 원작과 달리 천용덕과 유덕형의 과거 기도원에서의 비밀을 일찌감치 공개해버리고는 두 사람의 과거보다는 현재 류해국(박해일)과 천용덕(정재영)의 대결을 영화의 축으로 삼았다. 이 또한 과거형 영화 만들기를 좋아하지 않는 강우석의 선택이다. 긴장감의 연속 속에서 이따금 분위기를 풀어주는 코믹의 삽입으로 영화의 리듬을 살리려 한 것, 박민욱 검사(유준상)의 캐릭터를 《공공의 적》의 검사와 어딘지 모르게 닮게 만든 것, 박민욱과 류해국의 갈등과 화해의 방식 역시 강우석 영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끼》는 철저히 강우석의 영화인 셈이다.
이를 두고 만화에 깊은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원작을 모욕했다”, “원작을 그대로 찍었어도 이보다는 나았다”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감독 강우석을 모른다는 말밖에 안 된다. 강우석이 아닌 다른 감독이라면 또 다른 분위기의 영화 《이끼》가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끼》는 강우석의 영화이다. 요령부득이면서도 고집스럽고, 그러면서 다소 가벼운 류해국, 그야말로 웃음을 위해 원작과는 180도 다른 인물로 바뀐 김덕천(유해진)은 당연하다. 어차피 한 인간의 죽음에 얽힌 비밀과 사회악에 대한 고발과 응징에는 굳이 류해국이 애써 시간을 낭비하며 농사를 지을 필요도 없다. “농촌에서 논리와 합리성은 경험 앞에서 용도 폐기 된다. 당신이 생각하는 농촌은 드라마 밖에서는 없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바라던 대로만 믿으며, 남들도 나와 같을 것”이란 따위의 철학적 사고나 회의, 지나친 자각의식 따위는 필요 없다. 우울한 분위기만을 고집할 이유도 없다.
아마 영화란 것이 탄생하지 않았으면, 수많은 이야기들과 소설이 만화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만화 역시 지금처럼 과장과 은유와 상징과 생략이 아닌 사실적이고 연속적인 그림의 예술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영화가 있으니, 만화는 만화로서 길을 가야만 했다. 만화가 영화를 따라갈 수 없듯, 영화도 만화를 그대로 모방할 수는 없다. 만화는 만화고, 영화는 영화다. 어차피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비교하지 말라. ‘원작보다 나은 영화 없다’는 영화가 원작을 맹목적으로 따라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대현(영화평론가)『우리에게 시네마천국은 없다』 『14세 소년, 극장에 가다』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등
  • 본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 본 콘텐츠는 사전 동의 없이 상업적 무단복제와 수정, 캡처 후 배포 도용을 절대 금합니다.
작성일
2013-12-20

소셜 댓글

SNS 로그인후 댓글을 작성하시면 해당 SNS와 동시에 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