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주년을 맞이하여 2019년 2월에 개봉한 영화 <항거>는 유관순 열사의 투옥부터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시간을 담담하게 담아낸다. 영화의 배경이 된 천안의 유관순 열사의 생가, 3.1 운동이 시작된 탑골공원, 그리고 유관순 열사가 생을 마감한 서대문형무소까지 가슴 아픈 소녀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당시의 상황을 느껴보자.
<영화 항거 포스터>
작은 초가집, 소녀 유관순 꿈을 키우다.
<유관순 열사 생가의 입구와 정면 모습>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으로 향했다. 구불구불 굽이진 길을 따라 도착한 마을. 커다란 소나무가 반기듯 맞아주고 그 뒤로 작은 초가집이 자리하고있다. 이곳은 1919년 4월 1일 만세운동 당시 일본 경찰들에 의해 전소되었다가 1991년 정부에 의해 복원 정비된 유관순 열사의 생가이다.
<유관순 열사 생가와 마당에 꽂힌 태극기>
유관순 열사는 미국에서 온 샤프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학하게 된다. 그러던 중 일본은 만세운동의 여파로 휴교령을 내리게 되고, 열사는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경성복심법원 재판 기록문에 의하면, 이때 열사는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어린 소녀는 고향에서 독립운동 계획을 세우며 원대한 꿈을 키웠다. 마당에 꽂힌 작은 태극기는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유관순 열사 생가 관리사와 매봉교회 그리고 유관순 열사 생가 비문>
유관순 열사 생가 옆으로는 생가 관리사와 매봉교회 그리고 유관순 열사 생가 비문이 자리한다. 한옥의 구조를 갖춘 생가 관리사는 1977년 정부가 열사의 가족에게 생가지를 관리하도록 거처지를 마련해준 곳이다. 열사의 남동생인 유인석 씨의 가족이 거주하였으나 현재는 비어 있는 상태. 생가 관리사 뒤로는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생가 오른편에는 생가 비문이 자리하고 있는데 비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열사의 일대기가 간략하게 요약돼 있다.
3.1운동의 중심지 탑골공원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탑골공원으로 들어가는 삼일문과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고종의 서거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일제에 대한 우리 국민의 분노는 커졌다. 결국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고, 이때 유관순 열사도 학우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 탑골공원의 정문인 삼일문을 통과하면 3.1운동을 주도한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주민들의 휴식처가 된 탑골공원의 모습. 중앙에는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팔각정>
전국적으로 만세 운동 확대의 시발점 역할을 한 이곳 팔각정에서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이 작성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다. 당시 서울에는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없었는데, 서울 시내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었던 탑골공원은 최적의 장소였다. 오늘날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이 공원은 평화롭기만 하다.
<영화 항거- 아우내장터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일제의 휴교령으로 고향인 병천으로 내려간 유관순 열사는 4월 1일 장날을 기회 삼아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한다. 이는 3,000여 명이 참여한 호서지방 최대 독립만세운동으로 비폭력 평화주의를 원칙으로 했지만,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이 이어졌다. 이 만세운동으로 열사의 부모를 비롯해 19명이 순국하고 수십 명이 중상을 입는 결과를 야기한다. 열사는 이 사건으로 인해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 받는다.
끔찍한 고문의 현장, 유관순 열사의 투옥
<과거의 서대문 감옥, 그리고 현재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영화 <항거>로 돌아가 보자. 영화의 시작과 함께 맨발의 한 소녀는 트럭에서 내린다. 수감자 이송 시 일반인에게 독립운동가의 얼굴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얼굴에 씌웠던 도구인 용수를 쓰고 두 발은 족쇄에 묶인 채로. 수형기록표를 찍기 위해 용수를 벗자 고문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소녀의 얼굴이 드러난다. 소녀가 이송된 이곳이 바로 서대문감옥. 1998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개관되어 독립과 민주를 향한 투쟁의 역사를 후대에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유관순 열사의 수형 기록표-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갖가지 방법으로 고문이 자행되었던 지하고문실 >
전시관 1층과 2층의 민족저항실을 지나 지하로 내려가면 어두컴컴한 지하고문실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독립운동가를 취조하며 각종 고문이 자행됐다고 한다. 유관순 열사 또한 이곳에서 손톱, 발톱, 물고문과 같은 끔찍한 고문을 겪어야 했다. 역사관으로 변신한 지금은 스피커를 통해 생존 독립운동가의 육성 증언을 들으며 당시의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더욱 실감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들과 민주화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1920년대 옥사>
전시관을 나와 옥사를 향해 걸어가면 숨 막히는 구조의 건물을 마주하게 된다.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된 이 건물은 간수가 한 곳에서 모든 곳을 감시, 통제하도록 설계된 '파놉티콘(Panopticon)'의 형태를 띠고 있다. 평당 7.9명을 수용했다고 하니 짐승 우리와 다름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여옥사의 감방은 사방 1m도 채 안 되는 크기인데, 그곳에서 수용자들은 다리가 붓지 않기 위해 큰 원으로 천천히 걷고, 돌아가며 누워 잠을 청했다고 한다.
<전시관 2층 민족저항실에서 볼 수 있는 수형기록표와 야외 추모비>
고문실과 옥사 외에도 서대문형무소에는 마음이 숙연해지고 발걸음이 멈춰지는 곳이 여러 군데 있다. 그중에서 특히 전시관 2층 민족저항실에 들어서면 5천여 독립운동가의 수형기록표가 사방에 전시되어 있다. 기억되지 못한 이름 모를 애국지사들, 어린 학생들을 기억하고 되새겨보자. 건물을 나와 드넓은 공간을 걸어가다 보면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를 마주하게 된다. '민족의 혼 그릇'이라는 작품명을 한 이 추모비는 2010년에 조성되었다.
<중앙사 외벽 모습>
중앙사 건물 외벽에 붙은 독립 투사들의 얼굴들을 보며 가슴이 먹먹해진다
“자유란, 하나뿐인 목숨을 내가 바라는 것에 마음껏 쓰다 죽는 일..”
<영화 항거- 옥중만세운동을 펼치는 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 감옥에 투옥된 이후에도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는다. 수감 중인 1920년 3월 1일 3.1 만세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옥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으며, 이로 인해 모진 고문을 받게 된다. 그녀는 자신을 말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유란, 하나뿐인 목숨을 내가 바라는 것에 마음껏 쓰다 죽는 일..”
<영화 항거>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열사는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순국했다. 이는 출소를 이틀 앞둔 날이었다. 사인은 정확하지 않으나 잔인한 구타 행위로 인한 방광과 자궁 파열이라고 알려져 있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와 기념관
<천안시 병천면에 조성된 유관순 열사 사적지>
유관순 열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열사의 고향인 천안시 병천면에 마련된 사적지에는 유관순 열사 기념관과 봉화대, 추모각, 초혼묘 등을 비롯하여 아우내만세운동 기념공원이 있다.
<유관순 열사 기념관>
유관순 열사 기념관은 열사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2002년 착공, 2003년 개관되었다. 이곳에서는 열사의 수형 기록표, 호적등본, 재판기록문 등 관련 전시물과 함께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한 디오라마, 서대문형무소 벽관체험 코너 등을 볼 수 있다.
<유관순 열사 동상>
유관순 열사 기념관의 정면에는 열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태극기를 든 소녀의 모습. 고개를 높게 들어 봐야 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유관순 열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내가 그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되뇌게 된다.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독립투사들의 희생과 용기, 그리고 결단을 가슴 깊이 새겨두자.
함께 보기
유관순 열사와 같은 독립투사 외에도 일제강점기 시대 각자의 위치에서 조국의 독립을 꿋꿋이 외친 이들이 많다. 어떤 이는 시를 쓰고, 어떤 이는 평범한 청년으로서 재판에 서며, 또 어떤 이들은 우리말 사전을 만들기 위해 피 끓는 노력을 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영화 동주, 2016>
일제강점기 시대 시인 윤동주와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를 그린 흑백영화. 일본 유학길에 올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시인의 일대기를 시와 함께 녹여 냈다.
<영화 박열, 2017>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6천여명의 무고한 조선인이 학살되고 평범한 청년이었던 박열은 이에 맞선다. 일본 역사상 첫 조선인 대역죄인이 되어 재판정에 선 청춘의 모습을 다룬 통쾌한 영화.
<영화 말모이, 2019>
1940년대 우리말이 점점 사라져가는 경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하에 우리말 사전을 만들기 위한 인물들의 고군분투를 다룬다.
다음 스팟을 보시려면 위의 이미지 숫자를 순서대로 눌러주세요.
소셜 댓글
SNS 로그인후 댓글을 작성하시면 해당 SNS와 동시에 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