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사건이 일어난 지 어느덧 71년이 흘렀다. 최근에서야 주목받고 있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의 배경지를 살펴보기 위해 제주도로 떠났다. 실제로 주민들이 경찰의 초토화 작전을 피해 전전했던 안덕면 동광리 마을을 함께 걸어보자.
혼돈과 한의 제주 중산간 지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
위와 같은 내용의 소개령이 내려지고, 외부 소식을 제대로 전달받기 힘든 중산간 마을에 살던 주민들은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에 무고하게 희생된다. 지슬의 잔인한 줄거리이다. 이 사건의 발단은 3.1절 발포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의 제주는 8.15 광복 이후 실업난과 식량부족으로 극도로 피폐해진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마경찰의 말에 어린아이가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주민들은 총파업에 돌입한다. 특히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으로 참가해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폭력과 고문에 대항하고, 남한에서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을 저지하기 위해 봉기를 준비한다. 4월 3일 새벽 350여 명의 무장대는 경찰지서와 서북청년단의 집을 습격한다. 이후 5.10 총선을 거부하며 과반수 미달로 제주의 투표가 무효 처리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이승만과 미 군정은 진압작전을 펼쳤다. 이러한 정부의 움직임에 제주도민들은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동시에 정부의 강한 진압에 공포심까지 느끼게 된다. 정부와 도민 양 측의 대립은 급속도로 제주도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1948년 11월부터 4개월간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은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을 전소시켰다. 생활의 터전을 잃은 마을 주민 2만여 명은 산과 들을 전전하며 숨어 살게 된다.
정부의 공식 사과, 그리고 영화 <지슬>
제주 4·3 사건은 30여만 명의 도민이 연루된 가운데 3만 명 정도의 학살 피해자를 냈다. 이는 제주 인구의 10%를 차지한다. 제주도는 민간인 학살과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2008년 제주 4.3 평화공원과 4.3길을 조성하였지만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정부를 대신해 4.3 유족에게 사과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2018년 4.3 사건 추념식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 그리고 이 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이 흥행하며 제주도민의 가슴 아픈 역사는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가슴 아픈 사연의 마을, 제주 4.3길의 시작
4.3사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마을이자 영화 <지슬>의 촬영지인 동광리는 관광객들이 흔히 찾는 곳인 오설록, 산방산, 용머리 해안, 안덕 계곡, 카멜리아힐이 있는 안덕면에 위치해 있다. 이곳을 시작으로 제주 4.3길이 이어진다.
제주 4.3 길은 제주 4.3 사건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발생한 마을을 기념하고자 제주특별자치도가 지정한 길이다. 2015년 안덕면 동광마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6곳의 4.3 길이 조성되었다. 4.3 길은 제주 4.3 사건에 대한 중요한 역사 공간으로 많은 방문객을 모으고 있다.
180m 길이의 용암동굴, 주민들의 은신처
4.3길을 따라 10여 분 정도 걷다 보면 동광 큰넓궤와 도엣궤를 마주하게 된다. 1948년 11월 초토화 작전이 엄포 되자 100여 명의 주민들은 2개월 동안 이 좁은 동굴에서 은신생활을 한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동굴 입구가 얼마나 좁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성인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입구를 통과한 뒤 3m 정도의 절벽을 따라 내려가면 동굴 안에 넓은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100여 명의 주민들이 생활을 하였는데 실제 방문해 그 입구를 보니 당시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을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약 50일 동안 생활하던 동굴의 위치가 토벌대에게 노출된다. 주민들은 이불솜을 고춧가루와 함께 쌓아놓고 불을 붙여 입구 쪽으로 매운 연기를 내보내 토벌대를 내쫓고자 한다. 밤사이 주민들은 눈 속을 뚫고 한라산 영실 인근 볼레오름으로 피신하지만, 눈 위에 남은 발자국으로 토벌대에 추적당했고 총살되거나 생포 후 정방폭포로 끌려가 사살을 당한다. 큰넓궤에서 동쪽 50m 지점에 자리한 도엣궤(도너리굴)에서는 당시 생활유적을 구경할 수 있다. 30여 미터 굴 바닥에는 주민들이 가져갔던 항아리 파편 등 생활용구 파편들이 널려 있다. 주변으로는 크고 작은 돌담과 취사를 하기 위해 만들었을 작은 굴이 드문드문 보인다.
잔인한 학살터와 주민들의 흔적
무등이왓마을은 동광리 5개 부락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마을로서 130여 호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국영목장인 7소장이 있어 말총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대나무가 많아 탕건, 망건 등을 만들었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무등이왓마을 최초 학살터를 마주하게 된다. 1948년 11월 15일 광평리에서 무장대 토벌 작전을 수행하고 온 토벌대들은 무등이왓에 주민들을 집결시켰다. 그들은 주민 10여명을 호명하여 팔,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구타하고 일부를 총살했다.
잠복학살터로 걸어가는 길은 한없이 평온하기만 하다. 집 자리의 흔적은 없어지고 넓은 들판만 남은 이곳에서 토벌대는 전날 학살한 시신 주변에 잠복했다가 시신을 수습하러 온 일가족을 덮치고 산 채로 불을 지른다.
시신을 찾지 못한 일부 유족들은 이곳 동광리에 ‘헛묘’를 만들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였다. 특히 나 정방폭포에서 희생된 9명의 임문숙 씨 가족의 시신은 모두 바다에 떠내려갔고, 유족들은 죽은 자의 혼을 불러다 헛 봉문을 쌓고 묘지를 만들었다.
지슬, 감자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
영화 <지슬>을 감상하며 초반 내내 '지슬'이 무슨 의미일지 궁금해졌다. 영화 속 등장인물 무동은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를 두고 동굴로 대피하게 된다. 이때 어머니는 동굴에서 먹을 지슬을 챙겨가라고 말한다. 지슬은 제주 방언으로 감자를 뜻한다는 것을 이 장면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학살이 진행된 후 어머니를 데리러 집으로 돌아온 무동은 불타버린 집과 차가운 시신이 되어버린 어머니를 발견한다. 그리고 무동은 어머니의 품속에서 그을린 지슬을 발견한다. 4.3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무고한 주민들의 일상적인 삶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엿볼 수 있는 가슴 먹먹한 장면이다. 여기서 감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식의 끼니를 걱정했던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남고자 했던 제주 도민들의 간절한 상황을 상징하는 요소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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