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판 모양으로 나 있는 길, 구획화돼 있는 집들은 이 일대가 계획도시라는 것을 증명한다.
일제가 지은 단지형 주택들이 대형 공장이 되고, 예술가들의 공방으로 거듭나기까지
문래동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별명은 서너 개
문래동은 과거부터 여러 개의 이름으로 불렸다. 시간 순서대로 하나씩 살펴보자.
모랫말:
아주 오래전 이 일대는 모랫말이라 불렸다. 안양천과 도림천의 영향으로 모래가 많은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불리게 된 이름 ‘문래’는 과거 별명처럼 불리던 ‘모랫말’에서 음차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 외에도 문익점이 목화를 전래한 곳이라는 뜻이라는 설, 학교와 관공서가 많아지자 글이 온다는 뜻에서 문래(文來)라 불렀다는 설, 방적기계인 물레의 발음을 살렸다는 설 등이 있다.
인천부 금천군 상북면, 경기도 시흥군 상북면 사촌리:
서울 한복판인 문래동이 왜 인천이고 경기도냐고? 현재 문래동 일대는 구한말엔 인천이기도, 경기도이기도 했다. 1895년엔 인천부 금천군 상북면, 1896년엔 경기도 시흥군 상북면, 1914년엔 경기도 시흥군 북면 도림리로 계속 명칭이 바뀌다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되며 경기도가 아닌 서울로 편제되었고 영등포출장소 관할의 도림정이 되었다.
사옥정, 사옥동:
1930년대 이 근방에는 종연(鐘淵), 동양(東洋) 등 군소 방직공장을 중심으로 경성방직공장을 비롯한 면직물 공장들이 많이 들어섰고 성업을 이뤘다. 때문에 실 사(絲) 집 옥(屋)자를 써 일본인들에 의해 사옥정이라 불렸고, 1946년 사옥동이 되었다가 1952년 문래동으로 개칭되었다.
오백채:
1940년대 방직공장의 노동자들을 위해 지었던 영단주택이 대략 500채 가량 된다는 것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문래동 4가 일대를 오백채라 불렀으며, 동명의 식당이 지금까지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공장 노동자와 일본인 간부들을 위해 지었던 영단주택들은 이후 서민들의 소중한 집터가 되어주었다.
신토불이의 시초, 경성방직공장
물산장려운동이란 일본 기업들이 조선에 진출하려는 것에 위기를 느낀 조선 기업가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운동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쓰자는 ‘신토불이'와 비슷한 개념이다. 위 광고는 경성방직주식회사의 신문광고로 물산장려운동을 대표하는 광고로 널리 알려졌다.
영등포에 공장부지 5000평을 구입하고 본사, 사옥 및 건물을 지어 올린 경성방직은 고무, 광목, 직포 등을 생산하며 성업을 이어갔다. 이후 경성방직은 다양한 사업에 진출했다. '크로바'라는 이름으로 타자기를 생산하기도 했고 현재의 타임스퀘어 위치에서 경방필백화점을 개장해 백화점 사업을 하기도 했다.
타임스퀘어 부지 안쪽엔 경성방직의 사무동이 자리하고 있다. 1936년 세워진 건물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 역사적, 건축사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국전쟁 폭격에도 살아남았지만 단지 내 재개발 공사를 진행하며 2009년 이전, 복원공사를 거쳤고 지금은 카페로 이용되고 있다.
방직공장이 철공소가 되기까지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정부는 전력, 석탄 등의 에너지원을 확보하고 사회 간접 자본을 충실히 하고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한다. 이로 인해 철공소, 자재 유통업체, 상가와 공장이 자리한 산업단지가 개발된다. 그런데 왜 하필 문래동일까? 문래동은 노량진과 인천의 한가운데 있는데, 이는 일본이 군수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철길을 만들었던 인천 제물포역부터 서울 노량진역까지 이어지는 경로와 일치한다. 문래동은 일본이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킨 시점에 군수물자를 보급하기에 적당한 위치였고, 이런 이유로 철공단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청계천 상권의 쇠락이다. 당시 청계천 일대는 철공소와 공구 상점이 많이 있었다. 서울에 급격히 인구가 증가한 50년대 후반 잦은 범람과 악취로 청계천이 대대적인 복개공사에 들어가자 갈 곳을 잃은 상인들이 거대 방직공장이 위치한 문래동으로 터를 옮긴 것이다. 방직공장은 물론 주택가까지 하나둘 철공소와 관련 상가들로 모습을 바꾸었다. 문래동은 ‘철강산업단지'로 거듭나며 서울의 대표적인 기계금속 가공단지로 성장해 국가 경제 발전의 심장부 역할을 했다. 문래동의 역사는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먼저 문을 연 곳은 1955년 설립된 삼창철강이며, 뒤이어 영흥철강과 영등포철강이 설립됨으로써 철강 3인방 시대를 이어갔다.
예술가들의 등장이 가져온 변화
대기업 대리점부터 표면처리업체, 제조업체, 시어링, 절단 등 가공 업체에 이르기까지 약 800여 개의 업체가 여전히 철강업을 이어가고 있지만 중국산 제품의 대량 유입과 제품 가격 하락 등으로 과거의 영광엔 미치지 못한다. 문래동 상권이 조금씩 힘이 빠지자 홍대, 대학로 등의 비싼 임대료를 견디지 못한 예술가들이 그 틈을 타 하나 둘 모여들어 예술촌을 형성했다. 덕분에 문래동은 ‘문래 창작 예술촌’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얻었다. 2010년 서울문화재단은 이곳에 문래예술공장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예술가 유치에 나섰다.
현재 예술인 300여 명이 작업실 100여 곳에 흩어져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의 공방은 오래도록 문래동을 빛낸 낡은 철공소와 비슷한 듯 대조적인 케미스트리를 선사한다.
예술가들의 등장으로 거리에 활기가 띠자 상권도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기존 공장의 외관을 그대로 유지한 채 내부만 살짝 손을 봐 각종 식당, 카페, 펍이 생겨난 것이다. 공장 밀집 지역이었던 문래동 특유의 투박한 이미지를 잘 살린 인더스트리얼 무드의 인테리어는 젊은 층의 발길을 확실히 사로잡았다.
문래동 젊은 아티스트들의 전시, 조각, 벽화를 구경하려면 하루 종일 걷고 또 걸어야 하니 미리 단단히 배를 채워두는 것이 좋다. 훌륭한 맛은 물론 문래동 공업촌 분위기를 십분 활용한 인더스트리얼 무드의 힙 플레이스를 소개한다.
이름 그대로 농작물을 키우는 비닐하우스처럼 공간을 구성한 이곳은 독특한 인테리어로 사랑받고 있다. 낮에는 카페, 밤에는 펍으로 변신하고 반려동물까지 동행할 수 있어 하루 종일 즐길 수 있다. 예술촌답게 내부에서 팝업스토어와 공연을 비정기적으로 운영하고 있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위 치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도림로128가길 13-8혹시 일요일에 문래동을 찾을 예정이라면 이곳은 어떨까? 카페 동향은 소박한 집밥을 서브하는 가정 식당(쉼표말랑)에서 운영하는 팝업 디저트 카페다. 식당이 문을 닫는 일요일에만 문을 열고 있다. 홍콩과 마카오의 영향을 받아 망고 스프, 계란 샌드위치, 홍차, 케이크 등 달콤한 디저트를 맛볼 수 있다.
위 치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도림로 438-7오래도록 비워져 있던 철공소를 개조한 수제 맥줏집이다. 저녁 6시 이후로는 조명과 음악이 180도 변해 펍으로 변신한다. 널찍한 공간과 새벽까지 이어지는 영업시간 덕에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는 물론 퇴근길 직장인들의 회식장소로도 입소문을 탔다.
위 치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도림로 433-6다음 스팟을 보시려면 위의 이미지 숫자를 순서대로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