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종로구 익선동 자리에 있던 마을 ‘익동’의 앞글자 ‘익'과 한성부 중부 ‘정선방’의 ‘선’자를 따 이름을 지은 익선동. 1914년 동명을 만들 때 ‘예전보다 더 좋은'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 1920년대엔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조성된 한옥단지로 국민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주었고, 7~80년대엔 고위 관리직들을 접대하는 ‘요정 정치’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요즘은 100년 된 기와집마다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핫 플레이스로 떠올라 젊은이들까지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마을
지금까지 서울에 남아 있는 한옥마을은 익선동, 서촌, 북촌, 남산골 등이다. 1920년대 독립운동가 정세권 선생이 개발한 도시형 한옥 단지인 익선동은 그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지하철 종로 3가역 4번 출구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엔 현재 약 110여 채 정도의 한옥이 남아있으며, 일부 한옥에는 여전히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고 일부는 식당, 카페, 상점 등으로 개조됐다.
독립운동가 정세권은 건물을 짓는 건축가이자 도시를 새롭게 기획했던 개발자다. 그는 조선시대에 옥상에 정원을 만들 만큼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선구자였다. 옥상에 정원을 만드는 것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건축과 인테리어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혁신적인 양식이다.
그는 왜 익선동을 한옥 주택 단지로 개발하게 된 것일까?
정세권은 누구인가?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정세권은 어려서부터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고 사범학교 3년 과정을 1년 만에 수료하는 등 수재로 불렸다. 이십 대 초반엔 서울로 상경해 건설회사 ‘건양사’를 설립하고 건축 및 부동산 개발업으로 크게 성공한다.
그는 자신의 사업만 성공시킨 것이 아니다. 중하층 계층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지금의 주택 담보 대출과 비슷한 형태를 강구해 문인과 지식인층뿐 아니라 서민들이 집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을 방법에 대해 끝없이 고민했고, 사업으로 성공하자 그 자금을 활용해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한다.
일본의 지배를 받던 1910년 경성부의 인구는 30만 명에 미쳤다. 하지만 약 20년 만인 1939년엔 80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이는 남쪽 지역에서 주로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총독부가 청계천 북쪽으로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북쪽 지역의 엄청난 주택난으로 이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의 주거지역이 일본인들에게 밀려날 위기에 몰리게 된 것이다. 이때 발 벗고 나선 인물이 바로 정세권, 김종량, 이민구 등 조선계 건설업자들이다. 이들은 민간 주택 건설 사업에 진출해 일본인들이 북촌 지역으로 주거지역을 확장하는 것을 막았다. 정세권과 건설업자들의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청계천 북쪽엔 한옥보다 적산 가옥이 더 많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익선동은 누동궁(철종이 태어난 곳)의 터였던 166번지, 완화군의 사저였던 33번지를 매입해 개발을 시작했다. 익선동 뿐 아니라 삼청동, 가회동, 창신동, 휘경동 등 민간 주택 건설 사업을 통해 도성 안팎으로 한옥 2천 채를 보급했다. 1929년 <경성편람>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매년 300여 가구의 주택을 신축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가늠할 수 있다.
서울 3대 요정 '오진암'
1900년대 말, 국가 소속의 공인 예술가였던 관기 제도가 폐지되자 궁중의 기녀들이 가무 영업 허가를 받고 유흥 음식점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의 영향을 받아 술과 요리를 먹으며 기생들의 가무를 즐길 수 있는 ‘요정'들이 하나둘 탄생한다. 1920년대 한옥 단지가 들어서고 서민들의 주거공간으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했던 익선동 한옥마을에도 1950년대 요정이 들어선다. 서울 3대 요정이라 불리며 익선동을 대표했던 요정 ‘오진암'의 이야기이다. 마당에 큰 오동나무가 있다 하여 오진암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1900년대 초반에 지어졌지만 서울시 1호 등록 식당으로 1953년 문을 열었다.
요정은 주로 칸막이 방으로 이뤄져 있어 밀실 접대의 온상이 되었는데, 인사 청탁과 돈 거래뿐 아니라 성 접대까지 성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7~80년대엔 정 관계의 최고 실력자들이 자주 모습을 비추며 ‘요정 정치'라는 단어가 생겨났을 정도다. 오진암 역시 마찬가지.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 단골집으로 유명세를 치렀고, 1972년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박성철 부수상이 만나 7.4 남북공동성명을 사전 논의하는 등 한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곳이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송두리째 흔들린 외환 위기 무렵부터 요정을 찾는 발길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제 목숨 건사하기에도 바쁠 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이기도 하고, 청렴 사회로 가고자 하는 분위기가 정계에 퍼져나가며 비일비재했던 접대 문화가 서서히 그림자 속으로 그 모습을 감췄기 때문이다. 경제가 회복된 이후엔 강남 일대의 룸살롱 문화까지 등장하며 요정들은 서서히 밀려나게 되었다.
뉴트로의 성지, 종로의 작은 섬
시간은 흘러 2004년, 익선동 한옥마을을 주상 복합단지로 재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과거 도시환경정비사업구역으로 지정돼 새로운 건축이 금지됐기 때문에 최소한의 보수를 통해 처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익선동 한옥마을이 신식 건축물로 뒤바뀔 위기에 처한 것이다. 다행히 주민들의 동의를 얻지 못해 재개발은 무산되었고, 덕분에 2016년 말 기준 153채의 한옥 중 119채가 1930년 이전에 지어진 보급형 한옥일 정도로 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옛 모습을 간직한 고즈넉한 한옥마을은 매체를 통해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2014년 무렵부터 카페, 식당, 공방 등의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하나 둘 들어서며 주거지역이었던 익선동이 조금씩 상업지역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현재는 전체 한옥의 약 30% 정도만이 주거공간이고 나머지는 모두 상점일 정도. 상점들은 익선동의 분위기를 잘 살릴 방법을 강구하던 끝에 사람들이 살던 한옥의 외관은 그대로 유지한 채 내부 인테리어만 살짝 바꾸는 방식으로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서울의 다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구축했다.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인 뉴트로는 복고(Retro)를 새롭게(New) 즐기는 경향을 말한다. 주된 소비층은 복고를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10대와 20대. 한옥이 낯선 젊은층에게 익스테리어는 고즈넉한 한옥이지만 인테리어는 힙한 익선동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취향 저격이다.
뉴트로 트렌드가 인기를 더해갈수록 익선동은 외국인들과 함께 가기 좋은 서울의 핫 플레이스, 데이트 명소 등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주변의 높은 빌딩들 사이 낮은 한옥단지가 남아 있는 모습이 마치 섬 같다고 하여 ‘종로의 작은 섬', ‘과거의 섬', ‘한옥 섬' 등으로 불리며 그 인기를 더해가는 중이다.
막상 익선동에 도착하면 어디부터 가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한 시간 웨이팅은 기본인 한옥형 태국 음식점부터 전통주를 퓨전 한식과 곁들이는 주점까지 한옥의 매력을 잘 살린 익선동 맛집 - 카페 - 술집 데이트 코스를 추천한다.
한옥 4채를 이어 만든 150평 규모의 태국 음식점이 있다. 수영장, 폭포 등 고급 동남아 리조트를 방불케 하는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곳이다. 모던 타이 레스토랑인 더 다이닝, 캐주얼 타이 레스토랑인 살라댕 방콕, 카페와 라운지 바 역할을 하는 더 썸머까지 세 곳이 공간을 셰어하고 있다. 더 다이닝은 100%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고 살라댕 방콕은 한 시간 가까이 웨이팅을 할 정도라고 한다.
위 치서울특별시 종로구 돈화문로11나길 31-7골목길과 골목길을 이어주는 갈림길에 니은자 구조의 한옥을 활용한 카페 루스카. 매장 입구의 우물마루 위에 소반을 올려놓아 전통적인 느낌을 더했다. 현대적으로 개조한 카페 내부에선 서까래와 대들보를 올려다보며 고즈넉한 정취를 따뜻한 커피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매장 한쪽은 작가들의 도예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편집숍으로 운영하고 있다.
위 치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35막걸리부터 다양한 종류의 청주, 소주까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프리미엄 전통주를 정갈한 퓨전 한식과 함께 즐길 수 있다. 디귿자 모양의 한옥 마당 자리에 다이닝 테이블 형태로 긴 테이블을 놓아 매력적인 인테리어를 자랑한다. MBC에브리원의 예능 프로그램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 폴란드 친구들 편에 등장하며 그 인기를 더했다.
위 치서울특별시 종로구 돈화문로11다길 31다음 스팟을 보시려면 위의 이미지 숫자를 순서대로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