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용산구에 위치한 검붉은 벽돌 건물. 구조적으로 바람이 잘 통하고 휴게공간과 테니스코트까지 잘 갖춰져 있어 건물의 용도가 무엇이든 간에 참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토록 건축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곳을 70~80년대를 살아온 이들은 지옥으로 기억한다. ‘국제해양연구소’라는 현판을 걸고 있었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젊은이들의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는 이곳. 영화 <남영동 1985> 그리고 <1987 >을 통해 이 건물의 숨은 사연을 하나씩 살피고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두 인물 김근태와 박종철에 대해 알아보자.
고문감옥 남영동 대공분실의 문을 열며
쿵. 드르륵. 끼익. 쾅. 혹은 철컥. 우리는 흔히 이런 의성어들로 문소리를 대신한다. 하지만 70~80년대 용산구에 위치한 ‘국제해양연구소’에 다녀온, 아니 타의에 의해 끌려갔던 이들이 기억하는 이곳의 철문은 마치 탱크와 같은 굉음을 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이곳에 끌려온 이들은 두 눈을 가리고 양손을 결박당한 채였기 때문에 청각에 극도로 민감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 건물은 1976년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이들을 조사하기 위한 기관으로 설립됐지만 사실상 군사독재시절 유신정권, 전두환 정권에 반대한 이들을 연행해 죄를 고백할 때까지 고문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국제해양연구소’라는 현판을 달고 있었지만 ‘남영동 대공분실’이라 불리었던 곳이다.
외적으로 무척이나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지만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눈에 들어온다. 유독 작게 나 있는 5층 창문들, 진입하는 방향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설계된 후문, 그리고 공간적 제약 때문에 대저택이 아니라면 도통 쓰지 않는 원형계단방식까지. 설계를 맡았던 건축가는 당대 최고라 불리던 김수근. 그가 이런 방식을 선택한 데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흡음판, CCTV, 욕조, 그리고 작은 창
눈을 가리고 양손을 포박당한 용의자들은 일단 후문으로 끌려간다.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구타당한 뒤 앞서 언급한 계단을 통해 위로 또 위로 5층까지 밀려 올라간다. 이때 회오리 형태의 원형계단이 빛을 발한다. 당최 몇 층쯤 올라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엄청난 공포감을 느꼈고 추후 증언 시 층수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겠다고 증언한다. 5층엔 복도 양쪽으로 작은 취조실 17개가 자리하고 있다. 문을 열었을 때 건너편 방이 보이지 않도록 서로 엇갈리게 배치한 것은 물론 501호, 502호 대신 층수를 빼고 01, 02호 등으로 방 번호를 표기했다. 이것 역시 조사실이 몇 층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게 하고자 함이다.
조사실 내부는 방음에 굉장히 신경을 쓴 모습이다. 자해나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더 단단한 소재 대신 목재 흡음판을 사용했다. 머리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좁은 창문은 2중으로 돼 있어 아무리 코를 박고 밖을 내다봐도 하늘이 겨우 보일 정도로 설계됐다. 이는 피해자들의 투신을 막고 고문소리를 차단하기 위함이다. 당시 최첨단기술이었던 CCTV도 설치돼 있다. 무기로 사용해 조사관들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바닥에 단단히 고정된 의자와 책상, 작은 욕조와 변기 그리고 침대가 자리하고 있는 취조실 구석구석을 이 폐쇄회로 카메라를 통해 매분 매초 감시하며 인권을 유린했다.
1985년 김근태 의장이 약 보름간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겪었던 515호, 1987년 박종철 군이 고문치사 끝에 사망했던 509호 모두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 흡음판, CCTV, 욕조 그리고 작은 창만 보아도 이곳은 누군가를 가두고 고문하기 위해 철저히 계획된 ‘고문에 최적화된’ 건축물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2012년 대공분실의 설계도가 대중에 공개되기 전까지 정부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가 남영동입니까?”
영화 <남영동 1985>으로 돌아가 보자. 배우 박원상이 연기한 김종태는 민주주의의 상징이라 불리는 실존 인물 김근태 의장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 김근태 의장은 1960년대 중반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여러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손학규, 조영래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총사’로 불렸다. 이후 80년대에 들어서기까지 각종 단체에서 활동하며 수배와 투옥을 반복하던 그는 1985년 9월 민청학련을 설립했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려 이곳 대공분실에 수감된다. "사방을 둘러보니 짐작할 만했습니다. 이렇게 낯설고 어색할 수가 없었습니다.
뿌옇던 사방이 점차 빛바랜 황갈색으로 변해가더군요." - 김근태 극 중 김종태는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가 벗겨지자 짐작했다는 듯 이렇게 물었다. “여기가 남영동입니까?” 이미 대공분실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던 터다. 김근태는 '저승사자', '인간백정', ‘장의사’ 등 흉악한 별명을 가지고 있던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주도하에 온갖 고문을 당한다.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번갈아 가며 자행됐으며 잠을 재우지 않을 뿐 아니라 밥도 주지 않았다고 전한다.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17일 동안의 불법구금 후 풀려난 김근태는 당시 겪었던 일을 최대한 상세히 기록해 여러 차례 고발했다. 아내 인재근 여사는 가수 이미자의 테이프 중간에 남편의 증언을 녹음해 해외 언론에 전하기도 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당시 다른 기관으로 출장을 다니기까지 했던 촉망 받는 공안경찰이었다. 그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거짓 자백을 해 간첩누명을 쓴 자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후유증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사람도 있다고.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 이후 그는 고문혐의로 수사를 받게 됐고 10년 10개월간 잠적해 도피생활을 했다. 1999년 이근안은 십여 년간의 도피 끝에 자수했지만 죄질에 비해 한참 부족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습니다”
전두환 정권 말기였던 1987년 1월 14일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1987 >.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경찰은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습니다.”라는 다소 황당한 증언과 함께 박군이 쇼크사했다고 밝혔고 부모의 동의도 없이 화장을 감행하려 했다. 이점이 의심스러웠던 부장검사 최환이 사체보존 명령을 내렸다. 최초로 박종철을 검진한 오연상 내과의사의 양심고백, 윤상삼 기자의 보도정신으로 사건의 내막은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났고 옥살이 중 고문치사 사건의 뒷이야기를 접하게 된 이부영 운동가가 교도관 한재동, 전병용을 통해 전 수석비서관 김정남에게 편지를 써 진상을 세상에 알렸다.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는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를 통해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경찰의 은폐조작사건에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비서실과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김신부의 폭로 이후 박종철과 또래였던 청년들을 필두로 시위가 시작됐다. 이 시점에서 영화 <1987 >의 또 다른 주요 인물인 연세대 경영학도 이한열이 등장한다.
이한열은 학생운동가로서 자신이 속해 있는 동아리 ‘만화사랑’을 통해 5.18 항쟁의 실태를 알리고 있었다. 국민평화대행진(6.10대회)에 출정하기 하루 전인 1987년 6월 9일 1천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연세인 결의대회를 마친 뒤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박종철에 이어 이한열까지 무고한 젊은이들이 희생당하자 독재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은 산불처럼 번져나갔다.
이는 곧이어 6월항쟁으로 이어져 범국민적 민주화운동에 불을 지폈다. 6월항쟁의 결과 5.16군사정변 이후 27년간 지속된 군부독재가 끝을 맺었고 제도적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6월항쟁은 평화시위로 독재정권을 몰아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매우 높이 평가받는 시민항쟁이다.
고문감옥에서 인권기념관으로
김근태, 박종철 등을 거치며 반독재, 반인권운동의 상징적 현장으로 낙인찍힌 남영동 대공분실은 2005년 경찰청인권센터로, 2018년엔 민주인권기념관(2022년 정식 개관 예정)으로 두 번의 화려한 변신을 거듭했다.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당했던 509호를 제외한 15개의 취조실은 평화적인 느낌을 더하기 위해 화사하게 리모델링을 거쳤다. 뿐만 아니다. 4층엔 ‘박종철기념전시실’을 마련해 80년대 사회상부터 박종철 열사의 일대기, 고문치사 사건의 전말과 6월항쟁의 결과까지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김근태 의장이 수감됐던 515호에선 아카이브전시 ‘근태서재 시 소리 숲’이 진행 중이다. 김의장의 딸인 김병민이 전시의 큐레이팅을 맡아 추모공간을 조성했다.
민주인권기념관은 주중 주말 없이 매일 하루 2회 정기해설을 운영 중이다. 해설사와 함께 1시간~1시간 반 정도 민주인권기념관의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이곳의 역사, 건축적 특징, 이곳이 대한민국의 민주화 역사에 가지는 의미 등을 살핀다.
80년대 군사정권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4편을 추천한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큰 획을 그은 사건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영화 <남영동 1985>, <1987 >과 함께 감상하면 각각의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친구, 가족, 애인 등 무고한 시민들이 폭행을, 심지어 죽임까지 당하는 상황에 맞서 싸우는 시민군의 열흘간의 사투를 다뤘다.
감 독김지훈<화려한 휴가>와 마찬가지로 광주민주화운동이 시대적 배경인 영화다. 주인공인 택시운전사 만섭은 밀린 월세를 해결하기 위해 우연히 독일기자 피터를 태우고 광주로 향한다.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이들은 물론 운동권도 아닌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퍼부어지는 무차별 폭행 앞에 만섭은 갈등한다. 이대로 서울로 돌아갈 것이냐, 피터를 도와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릴 것이냐.
감 독장훈<택시운전사>에 등장하는 독일 기자 피터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한국 영화사 최초로 힌츠페터가 직접 등장해 당시 상황에 대해 전했고, 지금껏 영화나 방송으로만 접했던 5.18 당시 광주의 상황을 생생하게 담아낸 실제 영상을 삽입해 관객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감 독장영주1980년대 초 대학생, 교사, 직장인 등 독서모임을 하던 부산지역시민들을 무작위로 체포해 짧게는 20일, 길게는 63일 동안 불법 감금해 구타와 고문을 가한 일이 있었다. 부산의 학림사건이라 하여 부림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인 고호석(극중 임시완)과 그를 변호하며 인권변호사로 거듭난 잘나가던 세무변호인 노무현 전대통령(극중 송우석)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 화제가 됐다.
감 독양우석다음 스팟을 보시려면 위의 이미지 숫자를 순서대로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