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를 걷다 보면 골목마다 끝없이 펼쳐진 상가 행렬을 볼 수 있다. 없는 게 없어 보일 정도로 가게 입구부터 빼곡히 차 있는 상품들을 보면 감이 오겠지만 이곳은 한 가지 분야를 아주 오래도록 탐구한 장인들이 이끄는 만물상점들이 밀집한 곳이다. 가족과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들이 떠오르는 빈티지 카메라, 때로는 생계수단으로 때로는 취미용으로 집마다 한 자리씩 차지했던 재봉틀, 형제들과 다툼의 원인을 제공했던 레트로 게임기 등 을지로가 아니면 더는 구경하기조차 힘든 추억의 물건들을 살피다 보면 하루가 부족할 정도.
상인들은 어째서 을지로로 모여들었을까?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이 다시 이곳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구리개에서 을지로가 되기까지
서울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도로 을지로. 전 구간에 지하철 2호선이 통과하고 1, 3, 5호선이 교차해 교통 요충지이며 그에 따라 예부터 다양한 산업이 발달했다. 조선시대엔 이곳의 진흙으로 된 낮은 언덕이 누런색을 띤다 하여 ‘구리개’라 불렸고 이후엔 같은 의미의 다른 이름인 ‘동현동’, ‘황금정’, 등으로 불렸다. 구리개라 불리던 시절 이곳은 약업의 중심지로 통했다. 백성의 병을 치료하는 국립병원이자 의녀의 교육기관이기도 했던 관청 ‘혜민서’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의학 의료기관 ‘제중원’도 이곳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광복 직후인 1946년 일본의 흔적을 한시라도 빨리 덜어내기 위해 ‘일본식 동명 정리 사업’을 진행하는데 이때 황금정 1목부터 황금정 7목은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따 ‘을지로’라 명명됐다. 약업의 쇠퇴 이후 을지로엔 인쇄, 공구, 조명, 미싱, 타일 등 다양한 상권이 새롭게 등장하며 대한민국 산업화에 큰 공을 세웠다.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 ‘박문국’과 계몽잡지 《소년(少年)》의 발행지 신문관의 터
서울의 인쇄산업을 이끈 을지로. 그 역사의 시작은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신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다녀온 한성부 판윤 박영효의 제안으로 1883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 ‘박문국’이 설립된다. 신문을 통해 백성들과 소통하고자 최초의 근대 신문 《한성순보》를 발간했지만, 그 내용이 신문이라기보단 관보에 가까웠고 한문으로 쓰여 백성들에게 널리 사랑받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듬해 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불에 타고 말았다. 교동의 왕실 건물로 이전하면서까지 《한성순보》는 《한성주보》로 복간돼 이어졌지만, 그마저도 신문 발행 경비가 충당되지 않아 1888년 7월 박문국은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그로부터 정확히 20년 뒤인 1908년, 당시 18세였던 소년 최남선에 의해 출판사 ‘신문관’이 문을 연다. 신문관은 작은 단행본을 시작으로 어학, 법정, 수학, 측량, 교육, 가정 서적은 물론 잡지까지 광범위한 출판 활동을 이어갔다. 이들의 가장 큰 업적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종합잡지이자 계몽잡지인 《소년(少年)》. 서양과 일본의 문명 상태를 알리는 방식으로 소년들의 모험심과 상상력을 자극해 새로운 지식 습득을 장려하며 큰 인기를 얻었으나, 1910년 한일 강제 병합과 함께 폐간됐다. 우리나라 출판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두 기관이 연달아 을지로에 자리하면서 이후 을지로가 종로와 더불어 인쇄산업의 메카로 자리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도면만 있으면 탱크도 만들 수 있는 을지로
한국전쟁 이후 을지로엔 인쇄업 외에도 금속조각, 공구, 재봉 등 다양한 산업이 발달했다. 한옥이 없어진 자리에 소형 공장, 철공소, 자재상 수천 곳이 모여들며 서울의 대표적인 산업 지역으로서 근대화에 앞장선 것. 90년대 이후 값싼 중국산 제품들이 유입되었고 2000년대 이후엔 전자상거래가 증가하며 을지로 일대에 고객들의 발길이 끊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과거의 흔적은 골목골목 지금까지 남아 있다.
50년대 섬유산업의 발달과 함께 하나둘 을지로 주변으로 몰려든 봉제 업체들. 재봉틀 상들이 한자리로 모인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이치다. 초반엔 공업용 재봉틀을 주로 취급했지만 홈 패션이 취미로 각광받던 90년대 후반부터 가정용 재봉틀을 취급하는 상점이 부쩍 늘었다. 최근엔 실제 재봉틀을 사용하고자 하는 고객층보단 인테리어용 빈티지 재봉틀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더 잦다고.
재봉틀 골목과 마주 보는 쪽엔 금속조각상점이 모여 있다. 컴퓨터 발달 이전엔 금속 장식 가공이 수작업으로만 가능했다. 전성기에 비하면 많이 남아 있진 않지만 핸드메이드의 매력을 찾는 고객층을 위해 일부 상점은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으로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공구 골목은 60년대 청계천 복원 이후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월남전 때 특수를 이뤘고 대한민국을 넘어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권 일대를 상대로 하는 공구상점이 지금까지도 건재하다. “도면만 있으면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소문까지 생겨난 근원지가 바로 이곳. 을지로 일대에서 옛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도 꼽힌다. 손으로 쓴 간판은 물론 벽에 붙은 전단까지 과거의 흔적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
70년대 한 주점에서 우연히 깡통 골뱅이를 안주로 팔아 유명세를 얻었다. 근처 주점들이 너도나도 이 메뉴를 팔기 시작했고, 이 근방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골뱅이와 더불어 노가리도 을지로를 대표하는 안주 메뉴. 노가리 골목의 시초는 을지 OB베어로 오픈 당시 한 마리 100원이라는 싼값으로 주객들은 유혹했다. 2015년엔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산업이 지고, 문화가 떠오르다
을지로 일대 산업단지를 찾는 고객의 방문이 뜸해지자 어둠을 타파하기 위한 묘안으로 ‘문화’가 떠올랐다. ‘을지로 디자인/예술 프로젝트’와 ‘을지유람’이 등장했고 2017년엔 ‘기초 자치단체장 매니페스토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도시재생 분야 최우수상을 받았다. 을지로의 가장 큰 장점은 노포 옛 모습을 잘 보존한 것. 이 때문에 영화 로케이션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특히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피에타>는 청계천 일대의 공구골목을 배경으로 멋진 미장센을 선보였다.
을지로 주변 오래된 상가 지역을 신선한 아이디어로 변화시키는 프로젝트. 공고를 통해 신진 작가들을 모집해 작업실, 전시장 등의 공간을 제공하고 이들의 시각으로 을지로의 지역적 특색을 잘 살린 지역 재생 아트웍을 진행한다. 셔터 아트, 벽화, 조형물, 전시, 아트마켓 등 결과물은 다양한 형태로 구현할 수 있다.
해설사와 함께 을지로 일대를 도는 을지유람은 을지로를 대표하는 도보 관광 프로그램이다. 약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 동안 을지로3가역, 타일 도기 거리, 노가리 골목, 세운 청계 대림상가, 청년 예술창작공간 등 1.7km 코스를 투어 한다. 대한민국 시민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이용 가능하고 4인 이상 예약 시 출발한다. 신진 작가들이 모여들고 도시의 환경이 개선되자 젊은층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을지로3가는 유행에 민감하면서도 대중의 흐름과는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를 추구하는 요즘 세대 힙스터들에게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익스테리어, 오래된 것을 보존한 채 감각적으로 꾸며진 힙한 인테리어는 을지로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 대부분의 식당과 카페는 옥외 간판이 없고 작은 표지판을 보고 찾아가야 하는데 ‘나만 알고 싶은 장소’ 등으로 불리며 오히려 매력 포인트로 작용하고 있다.
혹시 옥동자라고 들어봤나? 잘생긴 남자아이를 뜻하는 옥동자(玉童子)가 아니다. 집 옥(屋)자를 쓰는 ‘옥동자(屋童子)’는 옥자로 끝나는 노포들을 찾아다니며 미식 여행을 즐기는 요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에 빠질 수 없는 명소가 바로 우래옥. 1946년 이 지역이 을지로라고 이름 지어지던 해 생긴 그야말로 유서 깊은 식당으로 평양식 냉면과 불고기가 대표 메뉴다.
위 치서울특별시 중구 창경궁로 62-29어째 식당 겉모습이 정육점 같아 보인다 했더니, 정육점을 운영하던 부부는 ‘보건 불고기 센터’라는 이름으로 식당을 열었고 이후 상호를 ‘보건옥’으로 변경했다. 질 좋은 고기를 저렴한 가격에 푸짐한 반찬과 함께 제공하는 곳으로 40년 전통을 자랑한다.
위 치서울특별시 중구 창경궁로8길 121980년 오픈한 OB베어 생맥주 판매점 2호점인 이곳은 단돈 100원에 노가리를 안주를 팔기 시작한 노가리 원조집이다. OB 생맥주는 더 이상 유통되지 않고 있지만 그 이름을 여전히 사용 중. 보물처럼 간직한 오래된 간판은 장사가 끝나면 다시 가게로 들여놓을 정도로 이 점포엔 없어선 안 될 마스코트이자 귀한 존재.
위 치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9길 12건물주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설렁탕집에서 차용해 다소 토속적인 이름을 가졌지만 이탈리안 피자를 서브하는 이탈리안 피자 전문 레스토랑이다. 포토그래퍼 일을 겸하고 있는 주인장은 피자 공부를 위해 세계를 여행하며 찍은 사진을 가게 벽면에 빼곡하게 전시했다. 여유가 있을 땐 손님들에게 흑백 사진을 찍어주기도 한다고.
위 치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16길 2-1인쇄소가 즐비한 골목 2층에 위치한 미팅룸은 간판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아 찾는 데 애를 먹기 십상이다. 앤티크 한 인테리어는 마치 정통 프렌치 혹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처럼 보이지만 떡볶이부터 파스타까지 가성비 좋은 메뉴들을 와인과 함께 즐길 수 있는 퓨전 양식 분식 레스토랑이다. 계란 흰자 머랭을 구름처럼 구워낸 클라우드 에그가 올라간 ‘구름 파스타’가 대표 메뉴.
위 치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12길 19방산시장 포장 부자재 골목 사이에 위치한 4층카페. 카페로 변신하기 전 이곳은 인쇄소였는데 그때 사용하던 대형 인쇄기와 목형들을 인테리어에 적극 활용했다. 이름처럼 총 4개의 층으로 구성돼 있고 2층은 카운터로 쓰인다. 또한 1, 3, 4층은 모두 서로 다른 테마로 꾸며져 있어 자리를 고르는 재미가 쏠쏠하다.
위 치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35길 26-1서울시의 대대적인 ‘을지로 청계천 재개발’ 이슈가 다시 불거졌다. 2006년부터 추진된 세운 재정비촉진지구 정비 사업은 최근 ‘을지면옥’ 사태라 불리며 모두의 관심을 받고 있다. 10~20대들이 찾아 들며 한창 도심 활성화를 이루고 있는 지금. 이대로 얼마간 도시를 더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과 오랜 시간 기다려온 토지주들의 입장도 생각해야 한다는 두 가지 의견이 팽팽히 대립하는 상황이다. 박원순 시장은 “임기 동안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는 도시개발을 할 것”이라며 을지로 청계천 재개발 인가 자체를 재검토하겠다고 밝히며 잠시 재개발이 멈추는 듯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철거 공사가 이어지고 있다고. 서울시의 계획 수정에 재개발 사업은 갈등만 불어나고 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양측이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 지금처럼 언제든 찾을 수 있는 을지로로 남길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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