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숭인동 일대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단종과 그의 부인 정순왕후에 대한 애절한 사연이 깃든 장소가 유난히 많다. 왕비에서 관비로 전락한 것도 모자라 너무 어린 나이에 남편까지 잃고, 남은 60여 년의 생을 홀로 조용히 살다간 정순왕후의 단종애사가 스민 곳들을 찾아 나섰다. 뿌연 미세먼지가 서울 하늘을 덮쳐 사방이 흐리고 뿌연 날, 숭인동 일대는 겨울이 더욱 성큼 더 다가와 있었다.
정순왕후가 단종을 그리워하며 평생을 살았던 곳을 가다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의 이별길을 걷기에 앞서 정순왕후의 굴곡진 삶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해야겠다. 정순왕후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단종의 정비가 되었다가 18세에 단종과 이별하고, 부인으로 강등되어 평생을 혼자 살아가야 했던 불운한 인물이다. 단종은 세조 3년(1457)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도 복위사건으로 인해 영월로 유배되어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조선의 한 임금이 비운의 생을 마감하고, 그의 부인이 한 많은 세월을 살다 간 이야기는 우리 역사 속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정순왕후 유적지는 지하철 6호선 창신역 4번 출구에서 시작한다.
빽빽이 들어선 오래된 가옥들 사이를 걸어 큰길로 접어드니 정업원 터가 나타났다. 이곳은 정순왕후가 궁에서 나와 단종의 명복을 빌며 평생을 살았던 곳이다. 입구가 굳게 잠겨 있는데, 안쪽으로 들어가려면 청룡사를 통해야만 가능하다.
왕권을 빼앗은 세조는 정순왕후에게 거처를 제공해 주겠다고 했으나 왕후는 이를 거절하고 시녀 세 명과 함께 이곳에서 살았다. 훗날 조선 21대 임금 영조가 정순왕후가 살았던 곳임을 알게 되어 영조 47년(1771)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을 세워 표지로 삼도록 했다. 비석에는 정업원 옛 터 신묘년(영조 47) 9월 6일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淨業院舊基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라고 적혀 있으며, 비각 현판에는 ‘앞산의 봉우리 뒤 언덕 바위여, 천만 년이나 영원하리라(前峯後巖於千萬年)’라고 쓴 영조의 친필이 있다. 팔작지붕을 한 비각을 바라보며 열 일곱 시절부터 이곳에서 쓸쓸하게 살았을 정순왕후를 떠올려본다.
단종이 유베를 떠나기 전 정순왕후와 마지막 밤을 보낸 곳
정업원터 바로 우측에는 청룡사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양반가 여인들이 비구니로 출가하면 거처하던 곳이었다. 단종은 영월로 유배를 떠나기 전, 청룡사 우화루(雨花樓)에서 정순왕후와 마지막 밤을 보냈다고 한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조차 없었으니, 아마도 정순왕후는 이곳에서 밤새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으리라.
청룡사는 922년 고려 태조 시절 도선국사의 유언에 따라 태조 왕건이 어명을 내려 창건한 절이다. 고요하고 아담한 공간에는 대웅전, 우화루, 심검당, 명부전, 산령각 등이 들어서 있다. 도심 속에 이렇게 고즈넉한 절이 있다는 점이 놀랍다. 훗날 정순왕후가 이곳에서 출가해 비구니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지만 정확히 검증된 사실은 아니다. 청룡사 정면에서 동쪽으로는 정순왕후가 단종의 안녕을 빌기 위해 매일같이 올랐다고 전해지는 옛 동망봉의 봉우리가 보인다.
주 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망산길 65무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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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장 료 | 무료 |
문 의 | 02-763-2145 |
이용시간 | 일출 시~일몰 시 |
매일같이 언덕에 올라 동쪽을 향해 기도를 올린 정순왕후
청룡사에서 언덕길을 조금 더 오르자 곧 이색적인 풍경이 나타난다. 동망봉으로 오르는 언덕길 왼편으로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오른편으로는 오래된 단층 건물들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2018년과 1970~80년대의 모습이 한자리에 섞여있는 듯한 느낌이 다소 낯설게 다가왔다.
조금 더 걸으니 정순왕후가 매일 올라 단종이 있는 강원도 영월 방향을 바라보며 단종의 안녕과 명복을 빌었다는 동망봉이 나온다. 현재 동망봉은 인근 주민들이 산책하고 운동도 할 수 있는 숭인근린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1771년 영조는 ‘동망봉(東望峰)’이란 글을 이곳 바위에 새기도록 했지만, 일제강점기에 채석장으로 쓰이면서 그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공원 초입에는 정순왕후의 제례를 지내기 위해 최근에 세운 동망각이 있다. 그리고 공원 입구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동망봉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보인다. 공원에서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드디어 ‘동망정’이라는 이름의 정자를 만나게 된다. 이곳 동망정은 정순왕후를 기리기 위해 훗날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동망정에 서면 이제는 동대문 일대의 빽빽한 풍경만이 시야에 들어올 뿐이다.
숭인근린공원 안에는 정순왕후의 지난했던 삶을 기리는 ‘숭인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인근 지역주민들을 위한 쉼터로도 사용되고 있다. 숭인재란, 숭인공원의 ‘숭인(崇仁)’에 왕실가족이나 유서 깊은 양반가문이 사용하는 건물에 붙이는 ‘재(齋)’를 더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다. 지상 1층에는 주민 커뮤니티 공간인 ‘어울림쉼터’와 정순왕후 기념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정순왕후 기념공간은 정순왕후의 일생과 삶의 흔적들을 다양하게 전하고 있다.
비단에 염색을 하며 고된 삶을 이어간 샘터
낙산 정상 아래에는 정순왕후의 또 다른 유적지인 자주동샘이 있다. 정순왕후가 비단을 빨면 자주색 물이 들었다는 전설이 어려있는 샘이다. 정순왕후는 생계를 위해 제용감에서 심부름하던 시녀의 염색기술을 도와 댕기, 저고리, 깃, 고름 등에 물을 들이는 염색작업을 하면서 여생을 살았다. 제용감은 각종 옷감의 채색, 염색, 직조 등을 관리하던 곳이었다. 그녀가 우물을 자주 찾은 건 그 때문이었다. 지금은 자주동샘에서 물줄기는 찾아볼 수 없다.
자주동샘 앞에는 ‘비우당(庇雨堂)’이라는 초가집이 있다.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의 이 집은 조선시대 실학자인 지봉 이수광(1563~1628)이 살던 곳이다. 원래 비우당은 창신동 쌍용2차 아파트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서울시에서 낙산공원을 조성하면서 이곳에 옮겨 복원했다고 한다. 관련이 없는 서로 다른 유적지가 한 공간에서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낯설고 이질적이다. 정순왕후의 슬픔이 서려있는 자주동샘이 초가집에 가려져 있는 듯해 안타까운 마음이 더해지는 곳이다.
단종과 마지막으로 영영 이별한 슬픔의 다리
숭인동과 보문동, 창신동을 돌고 돌아 드디어 단종과 정순왕후의 마지막 이별 장소인 영도교에 이르렀다. 이 다리는 단종이 영월로 귀양을 떠날 때 정순왕후가 이 다리까지 배웅을 나와 이별을 한 곳이다. 이후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영영 이별했다고 하여 영이별다리, 영영건넌다리 등으로 불렸다. 2005년 청계천을 복원할 때 지금의 새로운 다리가 개설되면서 ‘영도교(永渡橋)’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500년도 훨씬 지난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이야기가 있는 곳. 이곳을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 사연을 알고 있을까. 영도교 위에서는 많은 이들이 장사를 하고 있어 훨씬 더 복잡해 보였다.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사연을 떠올리기가 무색할 정도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간은 너무 빠르고 분주하게만 느껴졌다.
왕권을 빼앗은 세조는 정순왕후에게 거처를 제공해 주겠다고 했으나 왕후는 이를 거절하고 시녀 세 명과 함께 이곳에서 살았다. 훗날 조선 21대 임금 영조가 정순왕후가 살았던 곳임을 알게 되어 영조 47년(1771)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을 세워 표지로 삼도록 했다. 비석에는 정업원 옛 터 신묘년(영조 47) 9월 6일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淨業院舊基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라고 적혀 있으며, 비각 현판에는 ‘앞산의 봉우리 뒤 언덕 바위여, 천만 년이나 영원하리라(前峯後巖於千萬年)’라고 쓴 영조의 친필이 있다. 팔작지붕을 한 비각을 바라보며 열 일곱 시절부터 이곳에서 쓸쓸하게 살았을 정순왕후를 떠올려본다.
종로 일대는 풍물거리시장이 유명하다. 옷, 신발, 가방, 골동품, 가전제품 등 없는 것이 없는 서울의 대표적인 벼룩시장이다.
주말에는 물건을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뤄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조선시대에는 이 벼룩시장에서 청계천으로 가는 길목에 여인시장이 있었다. 부녀자들이 주로 채소를 사고 팔던 시장으로, 남자들은 출입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곳 시장의 여인들이 관비로 전락해 어렵게 살고 있던 정순왕후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는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사진 출처: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
동대문에서 대학로까지, 성곽길을 따라 걷다
정업원터에서 영도교까지 둘러본 후 동대문 성곽공원을 오르기 시작했다. 조금 걸었을 뿐인데도 뒤를 돌아보니 동대문(흥인지문)과 도시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호젓하고 운치 있는 성곽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어 걷기에도 편하다. 한참을 걷다가 성곽 바깥을 바라보니 산자락에 비슷한 모양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아름다워 잠시 시선을 빼앗긴다. 성곽을 오르는 중에 만날 수 있는 이화동 벽화마을이다.
드디어 성곽길 정상에 자리한 낙산공원에 오르면 풍경은 더욱 근사해진다. 서울 성곽의 고풍스러운 모습을 담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시야에 막히는 건물이 없어 서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미세먼지 때문에 맑고 깨끗한 밤하늘을 볼 수는 없었지만, 오래된 성곽이 선사하는 멋스러움에 위안을 삼는다. 정상에서 숭인동 일대를 걸으며 내내 마주했던, 고고하게 살았으나 한평생 쓸쓸했을 한 여인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그녀가 가슴에 품었을 그리움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며 낙산 언덕을 내려왔다.
매번 먹는 음식들이 질릴 때면 누구나 색다른 메뉴를 고민한다. 에베레스트는 그럴 때 들러보면 좋을 곳이다. 다소 어두운 듯한 실내로 들어서면 힌두교 신상, 불상, 민속인형 등의 장식물들이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을 전한다. 가격도 저렴하면서 맛도 좋은 다양한 커리를 판매하고 있으며, 커리와 함께 먹으면 좋은 난(빵)은 일반, 갈릭, 버터 등 네 종류나 된다. 거기다 난의 크기가 엄청나게 커서 놀랄 정도다. 여러 종류의 난에 여러 종류의 커리를 찍어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주 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1가길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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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시간 | 11:00 ~ 23:30 (연중무휴) |
문 의 | 02-766-8850 |
추천메뉴 | 치킨 커리, 양고기 커리, 탄두리 치킨, 갈릭 난 등 |
< 사진 출처: 사진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
사릉은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공경함이 바르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비공개 왕릉에 속했으나 2013년부터 개방되어 아름다운 소나무숲을 비롯해 계절별로 피어나는 야생화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사릉 옆에는 석화촌이라는 철쭉 단지가 있어 봄에 더 아름답다. 무덤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하지 않았고, 무덤 앞에 상석과 양석, 둘레돌이 있으며 그 밖으로 3면을 낮은 담으로 쌓았다. 단종의 무덤이 장릉으로 봉해졌을 때에도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고 동물 모양의 돌만 세웠는데, 이는 왕릉으로 봉해진 것에 대한 예에 따른 것이다. 사각지붕 모양의 장명등은 장릉과 같은 것으로 숙종대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사릉은 사적 제209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 치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산 65-1< 사진 출처: 사진 출처: 영월군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
단종의 무덤인 장릉이 알려지기 시작한 건 1516년 중종이 단종의 묘를 찾으라고 지시하고 난 후부터이다. 이후 1580년 선조는 무덤 앞에 상석, 표적, 장명석 등의 망주석을 세웠고 1689년 숙종에 이르러 단종이라는 묘표를 올리며 신위가 종묘에 모셔졌으며, ‘장릉’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단종으로 복권되며 왕릉을 이장하기 위해 자리를 살폈으나 지금의 자리가 천하의 명당이었기에 이장하지 않고 묘제만 고쳤다고 전해진다. 장릉 앞에는 정령송(精靈松)이라는 소나무가 있다. 1999년 남양주의 사릉(思陵)에서 옮겨온 소나무로, 사후에도 정순왕후와 단종을 이어주는 나무라 하겠다.
위 치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다음 스팟을 보시려면 위의 이미지 숫자를 순서대로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