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작은 동네> 제 24화

작은 동네 독자의 곁에 머물고 싶은 손보미 작가의 소설 제 24화 작은 동네 독자의 곁에 머물고 싶은 손보미 작가의 소설 제 24화

“네 엄마가 네 이모의 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안 했겠구나.”

나는 아버지의 말투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때, 한 가지 질문이 더 떠올랐다.

“아버지는 죽은 오빠에 대해 뭘 기억하고 있죠?”

그리고 또 다른 질문. 어떻게 이런 걸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었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을 만한 그런 질문들.

“그 동네에 불이 난 적이 없다고 하셨죠. 그게 어머니의 거짓말이라고요. 그럼 오빠는 왜 죽었어요?”

나는 그제야 아버지가 비참해 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체념하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엄마와는 세 번을 만났다. 네 이모의 아들이 자살했을 때, 네 엄마가 병에 걸렸다는 걸 알았을 때, 그리고 거의 죽을 때가 가까워져 왔다고 네 엄마가 느끼고 있었을 무렵, 이렇게 세 번이었다.”

아버지는 잠시 입을 다물었지만 다시 말을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네 엄마가 내게 신신당부를 했다. 너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나는 네 엄마와 약속을 한 거였다. 그렇지만 네 엄마가 죽은 후에 그런 식으로 모든 사실을 흘려보낼 수 없다고 느꼈지. 그래서 네게 연락을 한 거였다.”
“무슨 사실이요? 뭘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요?”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마치 무슨 창피라도 당한 사람처럼. 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 엄마는 열아홉 살 때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도망쳐 온 여자였어.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스물여섯 살 때 난 서울에 있는 공대를 졸업하고 잠깐 목포로 내려와서 친척의 회사 일을 돕고 있었어. 그러다 친구가 선생으로 근무하는 학교에 들렀다가 우연히 네 엄마를 봤고, 첫눈에 반해버렸지. 네 엄마는 대범하고 놀라운 여자였지. 우리는 빠른 속도로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아직도 기억이 나, 네 엄마는 데이트를 하는 날이면 허리가 잘록한 원피스를 입고 굽이 높은 신발을 신고 나왔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네 엄마는 방통대에서 교육학 관련 공부를 하고 있었고, 난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어. 나는 그때 내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네 엄마를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었어. 그래서 청혼을 했지. 함께 서울로 올라가서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살자고 말이다. 네 엄마도 단번에 받아들였어. 서울로 가면 난 취업을 하고 네 엄마는 공부를 계속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던 차에 네 엄마의 동생에게 연락이 온 거였다. 사실 난 그때까진 네 엄마가 고아인 줄 알았어. 여동생이 있다는 건 알지도 못했어.”

여기까지 말을 한 후 아버지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입 밖에 내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마 넌 상상도 못 할 거다. 그때가 어떤 시절이었는지. 하긴 나도 그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몰랐다. 하루하루 사는 게 중요했어. 우리 집은 그리 넉넉한 편도 아니었고, 내가 출세를 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남들이 말하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했지. 군대에 다녀왔고, 대학을 졸업하고, 그런 식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거다. 그게 중요했어, 그래, 내겐 그게 중요했다. 그게 내 삶이었어. 그런데 네 엄마의 여동생이 연락을 해서는…… 임신을 했는데 아이 낳는 걸 도와달라고 했다는 거다. 네 엄마는 그때 동생이랑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었는데, 임신 중이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는 거야. 산달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건…… 엄마 여동생의 남편, 그러니까 나한테는 동서가 되는 셈이지. 글쎄 그가 간첩 혐의를 받고 15년을 선고받았다는 거였다. 그것도 벌써 몇 달 전에 말이다. 알고 보니 그 일은 신문에도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었어. 신문으로 볼 때는…… 그게 나랑 상관이 있는 일이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니? 네 엄마도 그랬겠지. 그건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어. 그땐, 진짜로 그런 일을 했든 그렇지 않든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어. 그저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만이 그들이 바랄 수 있는 최대치가 된 거겠지. 살아남는 것.

그런데 네…… 이모부, 그래 네 이모부가 안기부에 끌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네 이모……는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구나. 네 이모는 복대를 하고 그 누구도 임신한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숨겼어. 그리고 산달이 되어서야 네 엄마에게 연락을 했던 거다. 그때 우리가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 그 전날까지만 해도 네 엄마와 나는 평범하고 행복한 예비부부였는데 갑자기 그런 일 속에 말려들어간 거다. 네 이모는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는데, 우린 병원에 갈 수도 없었어. 네 엄마는 하숙집에 살고 있었고 나는 친척 집에 머물고 있었거든. 그래서 우리는 여관방을 하나 빌렸다. 수소문해서 산파 할머니를 불러왔지. 그렇게 겨우겨우 여관방에서 아이를 낳았던 거다. 딸이었어. 다행히 산모도 아이도 건강했는데 네 이모는 네 엄마에게 그 딸을 맡겼어. 아니, 맡겼다는 표현은 틀린 것 같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만, 여튼 그렇게 된 거다. 나는 그 모든 일에 반대했다. 간첩? 간첩의 딸을 맡아 키운다고? 그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어. 너무 위험한 일이었지. 심지어는 부도덕한 일이라는 생각까지 했어. 게다가 그걸 누가 알게 되기라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니? 난 상상도 할 수 없었어. 하지만…… 네 엄마는 단호했어. 나보고 떠나도 좋다고 말했어. 자신은 그 아이를 평생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서. 그게 자신의 지상 과제라고 하면서 말이다. 난 그 모든 게 미친 계획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결국 네 엄마의 뜻에 따르기로 한 거다. 왠 줄 아니? 내가 그만큼 그 여자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어. 내 말 알아듣겠니? 나는 도저히 니 엄마를 떠날 수가 없었던 거야. 사흘 후에 딸을 두고 떠나던 네 이모가 아직도 생각이 난다. 섬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에 올라야 하는데 네 이모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지. 네 엄마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렸어. 그리고 그 둘은 그 후로 완전히 인연을 끊었어. 완전히 모르는 사람들처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처럼 말이야.”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두 손으로 벤치를 꽉 잡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디론가로 떠밀려 가기라도 할 것처럼. 떠밀려 가서 다시는 내 자신으로 돌아오지 못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작년 송년회 때 화장실에서 우연히 만난 윤이소 매니저의 아내가 내게 던진 그 말, 그 목소리.

“그런데, 당신 누구라고요?”

나는 더 이상 아무런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다고, 멈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는 아무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커다란 돌이 내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버지는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는 식은 올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했다. 우리 부모님은 노발대발했지. 네 이모의 딸을 나와 네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고 속일 수도 있었지만, 네 엄마는 반대했어. 그러고 싶지 않다고 하더구나. 그렇겐 할 수 없다고 말했어. 우리 부모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내가 미혼모와 결혼을 했고, 그래서 결국 이혼을 하게 된 거라고 알고 계셨지.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거라고. 그래서 내가 실패를 한 거라고. 혼인신고를 한 후에 우리는 경기도 광주의 그 작은 동네로 이사를 간 거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만한 곳. 돌이켜 보면 어쩌면 네 엄마나 나나 그런 식으로 숨을 수 있을 거라고 완전히 믿은 건 아니었을 거다. 처음 그 동네에 도착해서 한 일은 네 엄마와 네 이모가 주고받은 편지와 사진을 태우는 거였다. 혹시 몰라서 네 엄마가 가지고 있던 네 외할아버지 사진 같은 것들도 다 태워 버렸다. 그게 그 동네에서의 삶의 시작이었다. 그 후로 처음 몇 년 동안 나는 불안감에 젖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점 그 생활에 적응해 갔어. 적어도 난 내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네 엄마는 그렇지 못했다. 지나치게 과민하게 굴었어. 너도 기억을 할 거다. 네 엄마는 완전히 불안감에 갇혀 버렸지. 가끔씩은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말이다.”

나는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을 떠올려 보았다. 조그만 마당. 거기에 작은 양철통을 가져다 놓고 불을 붙인 후, 어머니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편지와 사진 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을 것이다. 나는 그때 어디에 있었을까? 방 안에 혼자 누워 있었을까? 아니면 미닫이문이 열린 마루를 기어 다니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까, 두꺼운 밧줄이 내 심장을 옥죄고 있는 기분이 들었고 토할 거 같았다. 폐쇄. 나는 몇 달 전 친구를 만났을 때, 내가 발음했던 단어를 다시 한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폐쇄된 동네. 어머니는 폐쇄된 채로 살기로 결정한 거였다.

“이제 그만 이야기하셔도 돼요.”

아버지는 지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했다. 주위는 적막했고, 주차장의 차들은 거의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우리 앞에 커다란 버스가 그대로 세워져 있어서, 그게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 같아서 나는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한 번 시작한 이상 절대로 멈출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 여자, 기억할 거다. 소나무 숲의 그 여자. 그즈음 나는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는 중이었다.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었어. 그런데 그 여자가 자살하고 경찰이 집에 왔을 때, 나는 갑자기 내가 딛고 있는 땅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내 자신이 불안감을 떨쳐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불안감에 익숙해져 있었을 뿐이라는 걸 말이다. 불안감 속에 우리 자신이 포함되어 버렸던 거지. 경찰들이 무언가를 조사하기만 한다면 우리 부부가 간첩의 딸을 데리고 와서 키웠다는 걸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 삶의 절반이 이미 무너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무서웠고 억울했다. 무엇을 위해서 내가 하루에 세 시간을 넘게 통근하며 살아가야 하는 건지, 무엇을 위해 그런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거다.”

“그래서 떠나신 거군요.”

내 말에 아버지는 화가 난다는 듯이 말했다.

“네 엄마와 헤어지고 난 후에도 몇 년 동안은 계속 불안감에 시달렸어. 경찰만 보면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때때로는 그 동네에 살고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불안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고, 일에 제대로 집중하지도 못했지. 내가 예상했던 삶과는 멀어졌어. 그걸 위해서 떠나온 건데, 모든 게 어그러져버린 거다. 가끔씩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지. 인생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네 엄마가 그 여자와의 관계에서 그토록 경솔하게 군 걸 이해할 수가 없어서 화가 났고, 때때로는 너에게 화가 났지. 네가 만약 그 책가방을 그 여자네 집에 두고 오지 않았다면, 네 엄마와 그 여자를 연결시키는 증거는 없었을 테니까. 아니, 그전에 니가 그 소나무 숲 별장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 여자와 네 엄마가 만날 일이 없었다면…… 아니…… 애초에……”

아버지는 빠르게 말을 이어가다가 거기에서 멈췄다. 애초에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그것이었을까? 나는 언젠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어머니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이혼한 게 내 탓인 거 같아 미안했다고. 나는 그때 어머니에게 듣고 싶었던 대답이 이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란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게 그런 말은 해주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아니 내 옆에 앉아 있는 늙은 남자에게 질문했다.

“그게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래, 네가 잘못한 거다.”
놀랍게도 그 말은 내게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않았고, 오히려 나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에게 질문했다.

“왜 그때 서울에 왔을 땐, 아무 말씀도 안 한 거예요?”
“그걸 네 엄마가 원했으니까.”
“그럼 지금은 왜 이런 이야기를 다 해주시는 건데요?”

그때, 누군가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경비원이었다. 그는 주차된 두 대의 버스 사이로 플래시 불빛을 비추었다. 갑자기 비쳐든 불빛 때문에 우리들은 갑자기 시력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거기에 누가 있는 거요?”
아버지가 벤치에서 소리쳤다.

“조금만 있다가 돌아갈 겁니다!”
곧이어 투덜거리는 소리, 그리고 우리로부터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다시 어둠 속에 남아 있게 되었을 때, 빛의 잔상들이 눈앞을 떠돌았다.

“그땐 아무 말씀도 안 하셨으면서 지금은 왜 이런 이야기들을 다 해주시는 거냐고요.”
아버지는 잠시 동안 나를 바라보았고 슬프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네가 나를 찾아왔으니까, 나에게 질문을 했으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우리 앞에 이 커다란 버스도 나를, 나와 내 옆에 앉은 이 늙은 남자를 보호해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 것 같았다.

“맞아요. 제가 여기까지 온 거죠.”
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만약 네가 나를 미워했다면 그건 잘못된 거라는 말을 하는 거다. 나는 너를 내 친딸처럼 키우려고 노력했었다. 너를 딸처럼 사랑했어.”
너를 딸처럼 사랑했어. 나는 그 문장을 머릿속으로 발음해 보았다.

“미워한 적 없어요.”

그건 사실이었다. 나는 아무도 미워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어쩌면 그게 정말로 나의 잘못이었던 건지도 몰랐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것. 나는 그를 혼자 남겨두고 주차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지만 걸음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아까 사람들로 북적이던, 이제는 문을 닫은 특산물이나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을 지나쳐 갔고, 아직도 영업을 하고 있는 편의점을 지나갔다. 편의점 앞에는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교복을 입은 여자애 두 명이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채 서 있었다. 나는 그 애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려보니까 나는 좁은 길 위에 서 있었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길이었고 바닥에는 붉은색과 회색 블록이 이어지고 있었다. 좁은 길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블록 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는 내 키만 한 하얀색 시멘트 담장이 이어져 있었는데, 담장 안으로는 기와지붕을 한 양옥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나는 거기에 서서 어두운 하늘 위로 이어지는 전신주의 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길의 끝을 바라보려고 애썼다. 그 길을 바라보면서, 나는 문득 열 살이 끝나가는 그 겨울, 내가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가출을 시도했던 그 해 겨울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때 나를 멈추게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아주 오랫동안 나는 그 당시의 나를 멈추게 만든 것, 나를 결국 버스에 오르지 못하게 만든 게 우리 가족, 더 엄밀하게 말해서는 어머니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벗어나고 싶었던 대상도 어머니였고, 나를 멈추게 한 대상도 어머니라고. 하지만 어쩌면 그날 내가 진정으로 떠나고 싶었던 건 어머니가 아니라 그 작은 동네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를 멈추게 한 것도. 화재로 누군가를 잃은 적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얼굴도 알지 못하는 오빠가 죽은 곳. 그래서 그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개를 키우는 곳. 어머니와 함께 그 작은 동네를 떠난 후에도,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그 작은 동네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네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나를 붙잡거나 밀어내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그 동네를 떠나야 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그 동네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하지만 이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동네는 존재한 적이 없었으니까. 화재가 일어나고, 그때 겪은 상실 때문에 개를 키우고, 내 오빠가 죽은 그런 동네는 존재한 적이 없으니까. 문득 몇 달 전 남편의 잠든 숨소리를 들으며 그가 낯선 사람 같다고 느꼈던 게 떠올랐다. 세상에, 그건 정말로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나 자신에게 가장 낯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는데.

“그건 특정한 사람만이 겪은 일이 아니야, 그건 우리 모두가 겪은 일이야.”

나는 당장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그 말을 반박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건 우리 모두가 겪은 일이 아니니까. 우리 모두가 겪은 일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순간 내가 정말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꼭 해야 하는 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곳까지 왔던 그대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무작정 그냥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나는 계속 경주의 이름 모를 그 작은 동네에 갇혀버린 것 같았다. 나는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좁은 길과 끝도 없이 늘어선 집들과 전신주를 보다가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내가 주차장으로 다시 돌아간다 한들, 더 이상 거기에 아버지가 남아 있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 것 같았다.

몇 시간 후, 나는 고속도로의 졸음 쉼터에 차를 세웠다. 내 앞의 차 안에서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와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애가 내리는 게 보였다. 둘 다 검정색 옷을 입고 있어서, 나는 그들이 장례식장에 다녀오는 길이리라고 생각했다. 좀더 나이 든 여자가 화장실에 가는 게 보였고, 어린 여자애는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애가 스트레칭을 하는 걸 지켜보다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내 눈앞에 거기에 살았던 내 자신, 그 어린 여자애가 떠오른다.

작은 동네 독자의 곁에 머물고 싶은 손보미 작가의 소설 제 24화-1

열한 살의 여름, 여자애는 모두가 잠든 밤에 자신의 책가방, 빨강머리 앤이 그려진 책가방을 품에 안고 마당으로 나온다. 마당에는 떠나기 전 버리려고 묶어 놓은 온갖 짐들이 쌓여 있다. 여자애는 긴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끌고 걸어간다. 자박자박 자신의 발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것 같아, 목덜미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어디선가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린다. 여자애는 평소에는 개구리를 싫어하지만 적막한 밤, 그래도 무언가 깨어 있는 생물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여자에는 책가방을 들고 소나무 숲으로 갈 생각이었지만, 결국 아무래도 자신이 그곳까지 갈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여자애는 목적지를 예전에 할머니와 개가 살았던 옆집으로 바꾼다. 여덟 살 때 와본 이후로 툇마루 가까이까지 온 건 처음이다. 불빛이 없어서 주위는 아주 깜깜하다. 개집은 반쯤 허물어져 있다. 가까이 가니까 툇마루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는 게 두 눈으로 보일 정도다. 여자애는 신발을 벗지 않고 툇마루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책가방을 품에 안고, 두 손으로 예전에 언제나 할머니가 머물렀던 방문을 연다. 무언가 풀썩 내려앉는 기분이 들어서 여자애는 소리를 낸다. 옴마야. 하지만 그건 흙과 먼지 들일 뿐이었다.

군데군데 거미줄이 있고 창문이 깨지긴 했지만, 방 안은 그런대로 깨끗하다. 여자애는 자신의 책가방을 거기에 내려놓는다. 한동안 가방을 내려다보던 여자애는 방을 빠져나온다. 방을 빠져나오다가 그 애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건 자신이 몇 년 전 툇마루에 놔두었던 사탕이었다. 여자애는 사탕을 집어 들고 살펴보다가 눈물이 삐져나오는 걸 느낀다.

그 애는 사탕 봉지를 열어 입에 넣고 먼지투성이인 툇마루에 앉아 본다. 예전에는 다리가 땅에 닿지 않았지만 이제는 발이 땅에 닿는다. 그 애는 발끝으로 땅을 툭툭 치며 한동안 거기, 그 어둠 속에 오랫동안 앉아 있다. 사탕을 다 먹은 후 여자애는 아까 가방을 놓아두었던 할머니의 방문을 다시 한번 연다. 방 안은 텅 비어 있다. 여자애는 한동안 그걸 바라보다가, 방문을 닫고 툇마루 아래로 내려가서 빠르게 걷기 시작한다. 나는 그 애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느낀다.

  • 손보미 소설가
  • 〃 작가소개 〃

    손보미소설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 21세기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담요」가 당선 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그들에게 린디합을』,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이 있다. 2012년 젊은작가상 대상, 2013~2015년 젊은작가상에 선정되었으며, 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 제21회 김준성문학상, 제25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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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6-13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