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그림 산책

일출(日出), 빛과 색 이야기

옛그림 산책 일출(日出), 빛과 색 이야기 옛그림 산책 일출(日出), 빛과 색 이야기
색(色)이 분별되는 시간, 일출
“변색(辨色, 색의 분별)이란, 매상(昧爽)의 이후이며, 일출(日出)의 직전이다.” 풀이하자면, ‘변색’이란 어둠이 사라지고 해가 뜨려 할 때 어둠 속에 묻혀있는 온갖 물체들의 형색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시간(時間)이라는 뜻이다. 이 문장은 “조회(朝會)는 ‘변색’에 들어갈 때 시작한다[朝辨色始入]”는 『예기(禮記)』의 한 구절을 해석하는 이덕무(李德懋)의 글이다. 한(漢)나라 때 정리된 고대의 예법서인 『예기』는 황실 조회를 꼭두새벽에 시작한다는 내용을 담아내면서, 그 중요한 시간을 ‘변색’이라 했다. 빛(光)이 있음으로 색(色)이 나타나는 자연현상을 명시하는 말, ‘변색’은 빛과 색의 불가분의 관계를 기반에 두고 있다. 뉴턴(1642~1727)의 역사적 보고서였던 『광학(光學)-빛의 반사, 굴절 및 색채에 관해서-』(1704)에서 “색채란 빛의 분할로 인하여 생기는 현상”이라고 정의했듯이, ‘변색’이란 말은 색이 빛의 역할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과학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훌륭하고 명쾌한 단어로 보인다.

그런데 유럽의 철학사에서는 뉴턴의 광학에 대항하는 철학자들의 이론이 이어졌다. 괴테(1749~1832)가 『색채론』(1810)에서 뉴턴의 광학을 비판하는 「논쟁편」을 따로 두어, 색채는 빛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시각(視覺)에 의거한다고 주장했다. 쇼펜하우어도 『시각과 색채에 관해서』(1816)에서, “그(뉴턴)는 눈에서 찾아야 할 것을 빛에서 찾았다”라고 논박했다. 여기서 오래된 말 ‘변색(辨色)’을 다시 보게 된다. ‘辨(분별하다)’이라고 했으니, 색을 분별하는 주체는 사람, 즉 사람의 눈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요체로 말하자면, ‘빛’이 있고 또한 우리의 ‘시각’이 있어야 ‘색’이 존재한다. 빛이 나타나고 만 가지 색이 분별되는 시간은 일출이 시작되는 그 시점이다. 또한 이 시간을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행위 중에 대표적인 것이 ‘관일출(觀日出)’일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일출의 장관을 보지 못하고 매일의 일출을 맞이한다. 어둠을 몰아내며 빛이 떠오르는 순간이 매일매일 어김없이 발생하기에 그 감동을 잊고 지낸다. 그러다 문득 새해 새 빛이 떠오르는 날이 되면, 어둠에서 빛이 떠오르는 시간을 몸소 느껴보고자 행장을 꾸려 추위를 무릅쓰고 동해 바닷가로 떠나보는 사람들이 있다.
동해의 장관, 일출
고려 시대 문인 안축(安軸)의 『관동별곡』 한 구절이 이러하다. “등명루상, 오경종후, 위일출경, 기하여!(燈明樓上, 五更鍾後, 爲日出景, 幾何如. 등명루 위, 오경 종소리 후, 일출경이 어떠한가).” 노래 구절을 읽노라면, 동해의 일출이 상상되어 호쾌한 기분이 일어난다. 등명루는 삼척에서 강릉으로 가는 길 어딘가에 있던 바닷가 누각이며, 오경은 대략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이다. 우리 국토 동쪽 면이 깊고 푸른 태평양이라, 우리나라 동해 바닷가는 해 뜨는 장면을 관람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렇지만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교통편이 좋은 오늘날에도 그러한데 고려와 조선의 선비들은 어떠했을까. 관동지역으로 갈 일이라도 생기면 일출을 보려고 벼른다. 날이 흐리면 허탕이다. 그래서인지 새벽잠을 설치고 일출을 맞이한 성공사례가 종종 시문으로 남곤 했다. “같이 간 늙은 중이 벽에 기대 졸다가, 한밤중에 손님을 발로 걷어차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게 해주었지[同遊老僧倚壁睡, 夜半蹴客候初日].” 걷어차서라도 꼭 깨워달라고 부탁했던 모양이다. 스님이 양반을 걷어찼다니. 그래도 이 양반은 노스님이 고맙기만 하다. 아마도 노스님은 눕지도 못하고 자다 깨다 했을 것이라고, 이렇게 시를 남긴 이유이다. 조선 전기 문인 김종직(金宗直)의 장편 시, 「금강산에 올라 일출을 보다[登金剛看日出]」의 첫 구절이 이러했다.

우주의 모습을 몰랐던 오래전, 새벽마다 떠오르는 둥근 해는 신비로운 현상이었다. 희화(羲和)라는 여신이 여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에 태양을 싣고 용을 몰아 공중을 달려 서쪽 끝 우연(虞淵)이란 못에 이르러 멈춘다는 이야기가 『산해경(山海經)』에 실려 있다. 태양수레를 상상한 동아시아 신화는 그리스 신화와 유사하다. 조선의 문인들도 해가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여섯 마리 용이 떠받들어 올린다는 시구를 상투적으로 남겼다. 앞서 걷어차인 김종직도 해가 물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며, “불덩이 수레바퀴 갑작스레 굴러 파도 물 위로 솟아오르네[火輪忽輾波濤出]”라고 해 뜨는 장관을 묘사했다. 조선후기의 그림으로 넘실넘실 파도 위로 빨간 해가 떠오르는 장면이 여러 폭 전하고 있다. 이를 잘 그린 화가는, 이른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가로 이름이 높은 화가 정선(鄭敾, 1676~1759)이었다. 그 당시 한양의 일부 문인 그룹에서 금강산 유람의 열풍이 불었고, 정선은 마침 이들과 한 동네에 살면서 그림 솜씨로 인정받은 터라, 그들의 유람여정을 그림으로 그려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정선이 그린 산수화들은 유람한 문인들에게 여정의 기억이었고, 유람을 떠나려는 문인들에게 필수 코스의 조망지점이었다. 그 가운데 일출 그림은 낙산사(洛山寺)와 문암(門巖)에서의 일출이었다. 문인들도 이곳의 일출을 시문에 남겼다.

그림 1_정선, 《신묘년 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
중 <문암관일출>, 견본담채(絹本淡彩), 36.0x37.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선의 <문암관일출(門巖觀日出, 문암에서 일출을 보다)>(그림 1)은 신묘년(1711년) 화첩의 한 면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다. 정선이 금강산을 처음 그릴 시기 구사했던 조심스러운 필선을 볼 수 있다. 그림 속 두 문인은 갓을 벗어젖히고 무릎을 끌어안고 해를 바라보고 있다. 정월의 새해맞이는 언감생심이었다. 한양에서 강원도로의 여행이란 말 타고 가마 타고 보름은 넘게 다녀야 했으니 대개는 봄가을을 택했다. 그림 속 해는 작지만 동그란 홍색이다. 해 주변을 붉게 조심스레 물들여 놓았다.

그림 2_정선, <문암관일출>, 견본담채(絹本淡彩), 25.5x33.0cm, 간송미술관 소장

당시 금강산 열풍의 선두에 섰던 김창흡(金昌翕)은 정선의 그림을 보면서 일출의 기억을 떠올려 「고성문암관일출(高城門巖觀日出, 고성의 문암에서 일출을 보다)」이란 시를 썼다. 그 일부이다. “금계가 울었다. 사람들은 산머리에 올랐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끝을 보니, 홍창(紅漲, 붉게 부풀어 오른 물)이 만 이랑이구나. 멀리 저 멀리 보니, 높이 더 높이그러나 천천히, 거짓같이 수레바퀴[幻輪]가 오른다. 태양이 오르기 시작하여 물 위를 뜰락 말락 하는 때, 변화의 양태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창흡의 시적 표현과 정선의 그림 표현이 딱 어울리며 이전에 없던 것이라던 그 시절 호평을 나름껏 감상하기 바란다. 아울러, 정선과 문인들이 그려낸 진경산수화 문화는 이목(耳目)의 체험을 실현하고 이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철학사적 예술사적 의미가 있었다는 것도 터득하기 바란다.

그 당시 유람 선비들은 풍경의 기이함을 찾아다니는 일종의 탐색가들이었다. 이곳저곳을 비교하여 품평하고 더욱 멋진 곳이 어디인가 논하여 순서를 정했다. 금강산을 포함하는 관동유람이 최상급이었고, 문암의 일출은 그들의 기관(奇觀) 목록에 오른 선택된 풍경이었다. 김창흡의 형이면서 한국철학사에서 위치가 우뚝한 학자 김창협(金昌協)이 쓴 「동유기(東遊記)」를 보면 문암 일출 앞에서 다 함께 소리 지른 기억을 기록했다. “해가 떠오르자 노비들까지 모두 크게 소리 지르며 멋지다[奇]고 하는데, 구름 어린 곳의 광채(光彩)로 더욱 기이해졌다[益奇].” 장관의 요체 중 하나는 바다와 하늘로 번지는 붉은 광채, 빛과 색의 어울림이었다. 정선과 함께 금강산을 오른 이병성(李秉成, 1675~1735)은, ‘붉은 구름 만 떨기가 바다의 동쪽으로 몰려들고, 상서로운 빛이 번쩍번쩍 길을 열었네[紅雲萬朶海東來, 瑞彩煌煌一道開]’라 하였다. 정선은 그 감동의 색을 위와 같이 표현했고, 정선의 그림은 당시 선비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삶의 의미로 보는, 일출
일출이 동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들에도, 산에도, 나의 집 동쪽에도 매일 새벽이 찾아온다. 정선이 그려놓은 일출 장면이란 옛 선비들도 일생에 한두 번 만나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말할 것도 없는 것이 해가 뜨는 바다를 구경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매일 뜨는 해가 평화로운 세상을 비추는 일이다. 조선시대 문헌을 일괄하여 보면, ‘일출’이란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은 「격양가(擊壤歌)」를 바라는 소망이었다.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쉰다. 日出而作 日入而息 내 샘 파서 물 마시고 내 밭 갈아 밥 먹는다. 鑿井而飮 耕田而食 임금의 권력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상관이랴. 帝力於我何有哉
요순시절 한 노인이 ‘격양(땅바닥을 두드림)’으로 리듬을 맞추며 불렀다고 전해지는 이 노래는 유토피아를 뜻한다. 임금이 누구인지 그가 무엇을 하는지 몰라도 좋은 세상. 대통령을 손수 뽑는 정치제도에서는 어이없이 들리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크고 작은 무리를 이끄는 사람들이라면 의미를 새겨봄 직한 말이다. 리더를 잊고 개개인이 충실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그곳에 최상의 리더가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출의 평화에서 일몰의 평화가 이어지는 그 시간마저도 개인에게는 영원할 수 없다. 동해의 일출을 바라보며 다가오는 일몰을 재미있게 노래한 조선시대 시가 있어 소개한다. “나는 일출 보기를 좋아하지, 일몰은 차마 보기 어려워. 해가 지면 어찌나 외롭고 슬퍼지는지. 내 머리가 다 하얗게 될 거야. (중략) 내가 동해바다를 술로 만들어 따르며 하얗게 빛나는 태양이 천년만년 있으라고 축원할 거야. 한 번 취하여 시름을 달래기를 만 번을 한다면, 시름은 없어지고 나도 늙지 않겠지.”

이 시의 지은이는 홍여하(洪汝河)로 17세기 대학자요 문장가였다. 요 근래에 술을 마시는 사람이 치매에 덜 걸린다는 의학계의 학설이 발표되어 세간에 인기를 누렸다. 스트레스가 주는 뇌 건강의 심각성을 생각하게 하는 학설이었다. 이 선비는 동해의 바닷물을 술로 만들어 모든 시름을 다 몰아내고 심신의 젊음을 연속시키고 태양도 바다로 다시 들여보내지 하겠다고 한다. 취기(醉氣) 속 호언장담이 서글프다. 시간의 흐름과 몸의 늙음과 뇌가 아둔해짐은 피할 수 없다. 춘추시대 슬기로운 악공이 늙어가는 주인을 세워준 말이 있다.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해가 솟아오를 때의 햇빛 같고, 少而好學如日出之陽 장성하여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해가 중천에 오를 때의 햇빛 같고, �而好學如日中之光 늙어서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켜놓은 촛대의 빛과 같으니 (…) 老而好學 如炳燭之明
떠오르는 빛은 젊음처럼 뜨겁지만, 중천을 넘어가면 열기가 식는다. 석양의 시간이 지나면 빛이 사라진다. 위의 인용 글은 이렇게 끝난다. “촛대를 들어 밝힘과 어두운 데를 그냥 가는 것, 어느 쪽이 낫겠습니까[炳燭之明 孰與昧行乎]?” 당연히, 촛대로 밝힘이 낫다. 늙어서도 자신을 다듬고 배우고 성찰하는 의지를 가지는 것은 어두워진 시간의 촛불처럼 귀중하다. 『설원(說苑)』에 전하는 이 글은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평공(平公)의 악사(樂師) 사광(師曠)의 말이다. 오늘도 새 빛이 떠올랐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일출을 따라오는 일몰의 순리이다. 달려가는 수레처럼 흘러가는 시간, 촛불이 태양처럼 소중해지는 시간을 생각할 때, 비로소 우리 앞에 일출과 변색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

정선, <낙산사(洛山寺)>, 종이에 옅은 색, 56.0x42.8cm, 간송미술관 소장
낙산사의 일출과 문암의 일출이 가장 명성이 높아 정선이 이를 그렸다. 배꽃이 하얗게 핀 낙산사의 봄, 새벽에 해가 돋는 장면이다.

글, 사진 / 고연희

1965년생,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저서
『정선 : 눈앞에 보이는 듯한 풍경』
『선비의 생각, 산수로 만나다』
『그림, 문학에 취하다』
『꽃과 새, 선비의 마음』
『화상찬으로 읽는 사대부의 초상화』
『조선시대 산수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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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4-25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