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작은 동네> 제 17화

작은 동네 독자의 곁에 머물고 싶은 손보미 작가의 소설 제 17화 작은 동네 독자의 곁에 머물고 싶은 손보미 작가의 소설 제 17화

“정말 조용히 이사를 왔네요. 전혀 몰랐어요. 아마 이 동네 사람들은 여기에 누가 사는 줄도 몰랐을 걸요.”
“아, 아니에요. 이사를 온 게 아니에요. 잠깐 요양차 온 거예요. 한 달 정도만 머물면 될 줄 알았는데,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잖아요.”
“언제까지 머물 생각이에요?”
“그건 잘 몰라요. 전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거든요. 몸이 근질근질거려요. 여긴 너무 무료하고……”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와인을 한 잔 더 마셨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몇 살이세요?”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가 대답하기도 전에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죄송해요. 이런 질문은 무례한 건데 말이에요. 전 스물일곱 살이에요. 아, 아니 스물여덟 살이요.”

그리고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이제 열한 살이 되었지?”

나는 잡채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와인을 한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얘는 아주 똑똑해요. 이런 아이를 자식으로 두셔서 행복하시겠어요.”

어머니는 나를 한번 쳐다보고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나이 땐 자기가 어른이라고 생각하죠.”

나는 정곡을 찔린 거 같아서 포도 주스를 술처럼 생각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술을 너무 급하게 마시는 것 같아요.”

“맞아요. 사실 전 술을 마시면 안 돼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도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마치 자신의 술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어머니와 나를 부른 사람처럼 말이다. 그리고 일단 술기운이 돌자, 그녀는 순식간에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어머니는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나를 거실로 데려가서 티브이를 틀어주었다.

“티브이 보고 있어. 알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근데 유부남이 뭐예요?”

“아무것도 아니란다.”

어머니는 티브이 볼륨을 높여주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나는 어머니와 그녀를 엿듣고 싶어서 그쪽으로 귀를 열어두었지만, 그들이 나누는 말을 거의 듣지 못했다. 내가 알아낸 건, 그녀가 엄청나게 말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큰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고, 갑자기 훌쩍이기도 했다. 거실에 앉아서 티브이에서 방영되는 만화영화를 보던 나는 문득 침실이라고 여겨지는 방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바로 거기에 내 책가방이 보관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몰래 저 방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지만 저기에 내 가방이 있다 한들, 그걸 어떻게 집에 가지고 간단 말인가? 이런저런 생각에 내 조그마한 머리통이 터져 나가려고 할 즈음에, 어머니가 그녀를 부축해서 거실로 나오는 게 보였다. 어머니는 그녀를 소파에 눕혀준 후에 리모컨으로 티브이를 껐다. 그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자기를 혼자 두지 말라고, 돌아가지 말라고 울먹였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한숨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좋아질 거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작은 소리로 흐느끼고 있었다.

“얼마 전에 난 아이를 잃었어요. 인공유산 말이에요.”

나는 소파 끝에 걸려 있던 숄을 어머니에게 건넸고 어머니는 그걸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흐느끼며 숄을 자신의 가슴께로 끌어 올리며 말했다.

“이번이 두 번째예요.”

어머니는 그녀의 어깨를 문질러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을 거예요. 정말로 괜찮을 거예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인공유산이 뭐예요?”

어머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뱃속에서 아이를 잃는 거야.”

나는 더 자세한 설명을 바랐지만, 그래 봤자 어머니가 더 이상의 설명을 해주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어서 그냥 다른 질문을 하기로 했다.
“엄마, 왜 저 아줌마-나는 그녀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지만, 그녀가 임신을 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손쉽게 호칭을 결정할 수 있었다-는 저렇게 많이 울어요?”

이번에는 어머니에게도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술에 취한 거야. 술에 취하면 분별력을 잃어버리거든.”

나는 어머니가 와인을 두어 잔 마셨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 엄마도 취했어요? 엄마도 분별력을 잃었어요?”

어머니가 대답했다.
“아니, 엄마는 절대로 분별력을 잃지 않는단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내게 전날 배달 온 신문을 찾아오라고 했고 신문에서 영화 편성표를 찾아보았다. 그날 밤에는 「인디애나 존스」가 할 예정이었다. 어머니는 그 영화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같이 볼 거지?” 어머니가 내게 물었다. 밤에,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을 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난 후, 어머니는 오랫동안 아버지의 말을 듣기만 했다. 나는 여전히 그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그 동네를 떠난 이후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여전히 나는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한참 동안 아버지의 말을 듣기만 하던 어머니는 수화기를 내게 건네주었다. 아버지는 내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도 아버지에게 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날 밤, 어머니와 나는 같이 앉아서 「인디애나 존스」를 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순식간에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언젠가 어른처럼 말하는 내 또래 여자애들이 사용했던 문장이 떠올랐다. 그 애들은 더 이상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게임은 하고 싶지가 않다고 말했었다.

“흥미를 잃었어.” 나는 어머니가 새로운 영화나, 혹은 아버지에게 사달라고 부탁한 새 책을 펴볼 때마다 ‘흥미를 느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어머니는 그녀에게 흥미를 느낀 건지도 몰랐다. 그녀가 가진 것들은 어머니가 가진 것들하고는 너무나 달랐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그녀를, 그러니까 그녀의 집, 그녀의 자동차, 그녀의 식탁, 그녀의 화장, 그녀의 옷차림 같은 것들을 흥미롭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어머니가 그녀에게 느꼈던 감정은 그런 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오묘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어른이 되었고 그녀가 그 당시 처해 있던 상황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머니는 그런 걸 그날, 완벽하게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어머니가 그녀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녀를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바로 내가 알고 있는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런 내 예상은 보기 좋게 틀려버렸다. 명절 연휴가 끝나고, 봄방학 때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그녀의 집을 몇 번 더 방문했고, 그때마다 그녀는 술을 마시고-어머니의 표현대로-분별력을 잃어버렸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말을 놓지 않았지만, 그녀는 어머니를 ‘언니’라고 불렀다. “언니가 없었으면 나는 여기서 외로워 죽었을 거예요.” 봄방학 내내 나는 어머니가 그녀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려고 애쓰는 모습과 술에 취한 그녀를 도와주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다. 개학을 한 후에도 어머니는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달라진 건 없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어머니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변했다고 느끼긴 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버스를 타고 나를 학교로 데려다줬고, 가끔 나는 친구들과 방과 후에 놀다가 어머니와 약속한 시간에 교문 앞에서 만나 함께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버스 안에서 나는 어머니에게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종알종알 떠들어댔고, 어머니는 나를 보며 빙그레 웃곤 했다. 한 달에 한 번, 부모님과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서 경양식 집에서 밥을 먹고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도 그대로였다. 어머니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아버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때때로 나는 아버지에게 그 사실, 어머니에게 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하고 싶은 기분을 느낄 때가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때, 혹은 어머니가 내게 흥미를 잃을까 봐, 어머니 마음속에 아버지와 나를 포함하지 않는 그런 공간이 생길까 봐 두려워질 때. 하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그런 걸 말한 적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생각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결국 버림받은 건 어머니와 나였지, 아버지와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중에 그런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그녀를 ‘스칼렛 오하라’처럼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고. 물론 그녀는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이렇게 냉정하게 말해야 한다는 점이 마음 아프지만-스칼렛 오하라만큼 강단 있게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는 여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스칼렛 오하라나 그녀는 아마 한 번도 원한 적도 없고, 그리고 절대로 가질 수도 없는 종류의 삶을 산 여자들이었다.

2월 내내 남편은 회사 업무 때문에 야근을 했고, 심지어는 회사에서 잠을 자고 오는 날도 있었다. 모처럼 정시에 퇴근한 날에도 서재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고 밤에는 침대에 눕기 무섭게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갑자기 나는 그런 게 궁금해졌다. 어떻게 그는 저토록 순식간에 잠 속으로 피신할 수 있는 걸까? 그는 왜 잠들기 전에나 후회나 죄책감, 혹은 헛된 희망이나 환상에 빠져들지 않는 걸까? 그는 어떻게 “아, 그건 우리 모두가 겪은 일이야”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걸까? 잠든 그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나는 그가 나와는 한 번도 같은 시공간에 속한 적이 없는 완전히 별개의 사람, 낯선 존재처럼 느껴져서 이상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남편의 스크랩북을 펼쳐보는 걸 그만두었다. 더 이상 그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3월에 개강을 한 이후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수업을 나갔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동화책 번역을 했다. 남편이 몰랐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했는지 알 수 없지만, 가끔 나는 새벽에 깨어나 「또 다른 여자」를 보았다. 그러니까, 윤이소가 등장하지 않은 회차까지도. 아니, 어쩌면 윤이소가 등장하지 않은 회차를 중점적으로. 윤이소가 등장하지 않은 회차를 보면서 나는 화면 속 어딘가에 윤이소가 서 있는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내 상상 속 그녀는 언제나 송년회에나 어울릴 법한 화려한 옷을 입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원래 사랑했던 여자에게 이별을 고하는 남자 주인공과 이별 통보를 듣고 있는 여자 사이에, 소파에 앉아서 소리를 지르는 남자 주인공 부모의 옆자리에, 사랑에 빠져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침대 위에 엎드려 있는 여자 주인공의 발치에. 모든 것을 다 이해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작은 동네 독자의 곁에 머물고 싶은 손보미 작가의 소설 제 17화-1

기분 전환을 하고 싶어서 차를 몰고 나가 대학 시절 친구들을 만난 적도 있었다. 점심 식사를 하고 수다를 떨다가 갑자기 그녀들에게 윤이소를 아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대답은 대동소이했다.

“아, 그 옛날 배우?”

나는 그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윤이소가 얼마나 재능 있는 배우인지에 대해 설명해줬다. 가끔 누군가는 내게 질문했다.

“어떤 영화에 나왔는데?”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내가 본 윤이소의 출연작이 「또 다른 여자」 한 편뿐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곤 했다. 나는 그녀의 다른 작품은 찾아본 적도 없고 찾아볼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 윤이소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나서 고생 같은 건 모르고 톱 배우 대열에 들었다가 어느 날 사라져버렸다고.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 법이지.” 그렇게 말하면 다른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흘러간 배우에게 우리가 왜 신경을 써야 되니?” 마지막으로 누군가가 그런 말을 덧붙이면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다른 이야기-남편을 따라서 외국으로 떠난 친구나 이혼한 친구나 유산을 한 친구에 대해-를 시작했다.

  • 손보미 소설가
  • 〃 작가소개 〃

    손보미소설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 21세기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담요」가 당선 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그들에게 린디합을』,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이 있다. 2012년 젊은작가상 대상, 2013~2015년 젊은작가상에 선정되었으며, 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 제21회 김준성문학상, 제25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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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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