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작은동네> 제16화

작은 동네 독자의 곁에 머물고 싶은 손보미 작가의 소설 제 16화 작은 동네 독자의 곁에 머물고 싶은 손보미 작가의 소설 제 16화

어머니가 나를 데리러 온 건 고작 20분 정도가 지난 후였다. 나는 그녀가 어머니에게 집의 위치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지, 어머니가 그 복잡하고 험한 길을 따라서 이 집에 잘 찾아올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는데, 어머니와 함께 우리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 걱정이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소나무 숲 안에서 뱅뱅 돈 것이었고—그러니까 길을 잃었다는 게 완전한 거짓말은 아닌 셈이었다—, 그녀의 집에서 나와 뒤쪽으로 조금만 걸어 나오니까 동네와 연결되는 길이 나왔던 것이다. 우리 집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말하기도 어려웠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까지 멀리 떠나온 것도 아니었다. 나를 데리러 온 어머니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했고, 그 집에서 나온 후에는 상체를 굽혀서 자신의 목도리를 내 목도리 위로 한 번 더 둘러주었다. “가자.” 내 손을 잡은 어머니는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길을 잃었다는 그녀의 말을 믿었던 걸까?

어머니가 내 손을 너무 꽉 잡고 있어서 나는 손이 아팠다. 아마도 그때, 어머니가 내게 보였던 태도들, 그러니까 어머니의 악력과 어머니의 꽉 다문 입술과 어머니의 빠른 걸음걸이는 일관된 한 가지 감정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리라.

그것은 나와 상관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저 어머니가 단독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문제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날, 집으로 함께 걸어가는 동안 어머니는 내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다리를 다쳤고, 어머니의 걸음이 너무 빨라서 계속 헉헉대고 있다는 사실, 내가 손을 아파할 거라는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 두려워서 손이 아프다는 표시도 낼 수가 없었고, 걸음을 늦춰달라고 요청을 할 수도 없었다.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나는 대문 앞을 서성거리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출근할 때처럼 코트까지 걸치고 있었지만, 발에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아버지는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아버지에게 다가갈 때까지도 어머니는 여전히 내 손을 꽉 잡은 채였다. 그제야 걸음을 멈출 수 있었던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숨을 골랐다. 아버지는 채근하듯이 어머니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무슨 일이야? 여보, 대체 무슨 일이야?”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어요.”

그렇게 대답한 어머니는 갑자기 내 손을 놓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갑자기 손이 자유로워지자, 나는 좀 어리둥절해졌고, 내 자신이 어디에선가 영원히 박탈당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어머니와 내가 작은 동네를 떠난 이후로 어머니는 나와 함께 어디를 가든 내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거나 했다.

“이래야 우리가 가족처럼 보일 거 아니니.”

와서 생각해보니, 그 말은 참 이상하다. 왜냐하면 팔짱을 끼든 끼지 않든, 손을 잡든 잡지 않든 어머니와 나는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대문 밖에 남겨진 아버지는, 실내로 들어간 어머니가 마루로 연결된 미닫이문을 닫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버지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그제야 내 얼굴에 난 상처와 찢어진 바지, 그리고 무릎에 붙여진 반창고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미닫이문을 열자, 치킨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버지는 잠시 나를 혼자 남겨두고 어머니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그런 후에 나를 화장실로 데려가서 얼굴과 손을 씻겨줬고, 그다음에는 내 방 서랍장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내주었다. 사실 그즈음에는 어머니도 그런 식으로 내가 씻는 것을 도와주거나 입을 옷을 꺼내주지는 않았지만 그날 밤 아버지는 내게 그렇게 해줬다.

그날 저녁 식사는 아버지와 나, 둘만 했다. “엄마는 몸이 좀 아프시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상을 펴고 접시와 포크를 가지고 와서 내가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닭고기를 찢어주었다. 그날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한 데다가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탓에 나는 내내 허기짐을 느끼고 있었는데 정작 음식을 앞에 두자 거짓말처럼 무언가를 먹고 싶은 기분이 싹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먹어야 해.”

잠시 어머니에게 다녀온 시간을 제외하면 아버지는 내가 밥을 먹는 내내 나를 돌봐줬고, 저녁을 다 먹은 후에는 내 얼굴에 붙어 있는 반창고를 떼어내고 상처 위에 약을 바른 후 새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그런 식으로 집을 나가면 어머니가 무척 슬퍼하실 거다.”
아버지는 이렇게 덧붙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나는 그게 내 얼굴에 난 상처에 대해 말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걱정해야 할 다른 거리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날 밤 잠들 때까지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새벽에 잠에서 깬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서 저녁에 먹은 닭고기를 모두 게워냈다.
몸이 안 좋아서 토한 적은 있었지만, 부모님의 도움이나 보살핌을 받지 못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날 밤 부모님 방문을 두드리며 나를 보살펴달라고, 나를 보호해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를 막은 건 무엇이었을까? 완전히 기진맥진해졌고 나는 입을 헹구고 눈물을 닦은 후 엉금엉금 기듯이 방으로 돌아와서 침대 위에 누웠다.

어머니가 그녀의 집으로 들어왔을 때 나를 보고 지었던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그 집의 거실 소파에 얌전히 앉아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그녀가 어머니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어머니가 대답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나는 두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그 표정, 그러니까 방과 후에 교문 밖을 서성이다가 나를 발견하고 짓는 그 표정—안도하고 안심하는—을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언젠가 집 앞 작은 다리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 뺨을 찰싹 때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집 소파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 어머니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과 행동은 내가 예상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때때로 그 당시 어머니가 나를 보고 지었던 표정을 떠올린다. 어머니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실망한 것 같기도 했으며,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때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그 후로 몇 달 동안, 그러니까 그 동네를 떠나게 될 때까지 어머니는 어떤 종류의 자제력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이건 내 표현이 아니라 그 당시 어머니와 다투던 아버지의 표현이다.

“당신은 지금 완전히 자제력을 잃었어.”

그 시기의 어머니는 일관성 없이 나를 대했는데, 때때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을 퍼부었다가 또 어떤 때는—그 집에서 나를 데리고 오던 때 그랬던 것처럼—나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그 당시 나는 그런 어머니의 태도가 가끔씩은 곤혹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그렇지만 이건 어쩌면 선후 관계의 문제인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내 존재를 절대로 잊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절박하게 사랑을 퍼부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어머니는 후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가 무엇을 후회한단 말인가? 나를 낳은 것에 대해? 엄마가 된 것에 대해?

그녀는 내게 책가방을 몰래 가져다주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책가방을 찾으러 다시 가지도 않았다. 책가방을 생각하면 애가 탔지만, 내가 그녀의 집에 혼자서 찾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사실 나는 그녀의 집은커녕 아예 소나무 숲 근처로도 가지 않았다. 심지어 그해 겨울, 굴삭기가 소나무를 뽑으러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왜 구경 안 가니? 너 그거 좋아하잖아?”

빨래를 개던 어머니가 물었을 때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다고 느꼈다.

“이제 재미없어요.”

어머니는 빨래 개는 것을 잠깐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읽고 있던 동화책을 덮으며 어머니가 할 말을 기다렸지만, 어머니는 그냥 다시 빨래를 개는 것으로 돌아갔다. 나는 책을 펼쳐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나는 겨울방학 내내 그녀가 나에게 책가방을 돌려줄 묘안을 마련해주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방학이 끝나갈 즈음 나는 내가 책가방을 포기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억울하고—무엇이 억울한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슬펐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 몰래 아버지에게 책가방과 필통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이유 같은 건 묻지 않았고, 며칠 후 새 책가방과 필통을 사다주었다.

작은 동네 독자의 곁에 머물고 싶은 손보미 작가의 소설 제 16화-1

나는 아침에 등교를 할 때마다 어머니가 내 책가방이 바뀐 걸 알아챌까 봐 걱정을 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내 책가방이 바뀌었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해 구정 연휴를 앞두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나를 데리고 서울에 있는 친가를 방문하자고 말했다. 왜 갑자기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그런 요구를 했는지, 아버지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안 된다고 대답했다. 며칠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문제 때문에 다투었고 집안 분위기는 냉랭했다. 결국 어머니의 고집을 못 꺾고 혼자 떠나던 날 아침, 아버지는 여전히 화가 난 목소리로 어머니에게 말했다.

“난 모든 걸 당신이 원하는 대로 했어.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아버지는 내 인사 같은 건 받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평정심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아마도 그게 잘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날 하루 종일 어머니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했다. 다른 명절 연휴에 그랬던 것처럼 내게 짜장면을 시켜주고 잼을 바른 식빵이나 라면을 만들어주었지만, 정작 어머니 자신은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고, 책을 펴놓거나 티브이를 켜놓고 거기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멍하니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내 이름을 부르고 내가 어머니에게 가면 나를 꼭 안아주면서 말했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지?”

그날 밤, 어머니는 신문에 실린 영화의 편성표를 찾거나 하지 않았고, 몸이 좋지 않다면서 일찍 방에 들어갔다.

다음 날, 그러니까 구정 당일 아침,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을 때, 잠결에 나는 그게 아버지로부터 걸려온 전화일 거라고 짐작했지만 전화를 받는 어머니의 말투 때문에 전화를 건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라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그녀, 그러니까 그 소나무 숲에 사는 여자였다. 어머니는 내 방으로 들어와서 내게 외출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그녀가 우리를 초대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는데, 마을에 사는 그 누구와도 교류를 하지 않던 어머니가 다른 사람의 초대에 응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의 어떤 부분이 어머니의 마음을 흔들었는지 알고 싶었다. 자신의 딸을 도와준 사람에게 답례 인사를 하려는 것일까? 한편으로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내 책가방을 돌려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명백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데 책가방을 내가 어떻게 받아 온단 말인가? 검정색 모직 바지와 파란색 스웨터를 입고 그 위에 감색 코트를 걸친 어머니는 내게는 자잘한 꽃무늬가 그려져 있는 벨벳 원피스와 초록색 니트 코트를 입혀주었다. 우리는 그녀의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서 과일 바구니를 하나 샀다. 나는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과일들이 들어 있는 정말로 커다랗고 예쁜 바구니였다.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뒷마당에 세워져 있는 하얀색 세단을 보았다. 어머니와 나는 그 자동차 앞에 잠시 동안 멈춰 서 있었다.
“엄마, 그 아줌마는 운전을 할 줄 아나 봐요”

내가 말하자 어머니가 감탄했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 아주 멋지구나.”

우리 동네에는 자가용을 모는 사람이 없었다. 학교 운동장에 주차된 선생님들의 자가용을 본 적이 있긴 했지만 그 차들은 이 하얀 세단에 비하면 너무나 볼품이 없었다. 문을 열어준 그녀의 모습 역시 어머니와 나를 감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파자마 차림도 아니었고, 숄을 두르고 있지도 않았으며, 머그컵을 들고 있지도 않았다. 피부가 창백하지도 않았다. 속눈썹은 길고 반짝거렸고, 입술에는 붉은색 립스틱이 칠해져 있었으며 귀에 달린 진주 귀걸이가 달랑거렸다. 그녀의 기다란 머리카락은 끝이 굽실거렸고, 허리가 잘록 들어간 무릎까지 내려오는 시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눈이 부어 있긴 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겉모습을 꾸민 여자를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그녀가 마치 책받침에 사진으로 들어간 연예인 같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그녀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머니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뒷마당에 세워져 있는 하얀색 세단을 보았다. 어머니와 나는 그 자동차 앞에 잠시 동안 멈춰 서 있었다.

“그날, 얘를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어서 들어오세요.”

어머니에게 건네받은 과일 바구니를 낑낑거리며 집 안으로 옮긴 그녀는 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거실을 통과하는 동안 어머니는 실내를 두리번거렸지만 나는 벽난로 쪽만 슬쩍 보았다. 벽난로는 여전히 꺼져 있었다. 식당은 아주 컸다. 우리 집 마루와 부엌에 붙어 있는 방을 합친 것만큼이나 컸다. 식당의 중앙에는 대리석으로 상판이 깔린 식탁이 있었고, 식탁 위에는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식탁 위 음식은 어린 내가 봐도 중구난방이었다. 스테이크와 파스타, 야채샐러드와 만둣국과 갈비찜 그리고 잡채가 함께 차려져 있었다. 어머니가 물었다.

“이걸 혼자 다 했어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전 음식 같은 건 하나도 못 해요. 사람을 불렀어요.”
“그분은 어디 가셨어요?”
“그분도 집에 갔죠. 명절이니까.”

어머니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오기로 한 사람이 오지 않아서요. 혼자 음식을 먹기엔 너무 많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고, 이 동네엔 아는 사람도 없고, 그러다가 저 꼬마 아가씨를 떠올렸죠. 혹시나 해서 전화를 걸었는데, 이렇게 와주셔서 너무 좋은 거 있죠.”

호들갑스럽게 말한 후, 그녀는 와인을 한 병 가지고 왔는데, 그런 술병을 실제로 본 것도 나는 난생처음이었다. 출장을 다녀올 때 아버지가 술을 사 오실 때가 있었지만, 거의 위스키 종류였고 나는 아예 만지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식탁 위에는 와인 잔이 두 개밖에 없어서 그녀는 하나를 더 가지고 왔다. 그리고 어머니와 자신의 잔에는 와인을 따르고 내 잔에는 포도 주스를 따라주었다.

“제가 무례한 건 아니죠?”
“아니요.”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어머니가 술을 마실지 안 마실지 궁금했다. 나는 우리 집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가끔 회사일 때문에 술을 마시고 들어올 때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날엔 나는 언제나 아버지가 들어오기 전에 잠들어야 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잠든 딸을 깨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와인 잔을 들고 나를 한 번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한 모금 정도 마신 후에 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 포도 주스를 마셨다. 나는 내가 진짜 술을 마시는 어른이 된 거 같아서 약간 우쭐해졌다.

  • 손보미 소설가
  • 〃 작가소개 〃

    손보미소설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 21세기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담요」가 당선 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그들에게 린디합을』,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이 있다. 2012년 젊은작가상 대상, 2013~2015년 젊은작가상에 선정되었으며, 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 제21회 김준성문학상, 제25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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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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