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작은동네> 제15화

작은 동네 독자의 곁에 머물고 싶은 손보미 작가의 소설 제 15화 작은 동네 독자의 곁에 머물고 싶은 손보미 작가의 소설 제 15화

그날, 동네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가지 못한 내가 찾아간 곳은 소나무 숲이었다. 나는 우리 집을 지나고, 여전히 아무도 살지 않는 옆집 할머니 집을 지났다. 그 집은 내가 그 동네를 떠날 때까지 언제까지나 그런 식으로 튼튼하게 남아 있었지만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는 할머니 집 앞 공터를 볼 때마다 나는 망가진 것, 다시 복구될 수 없는 어떤 것을 완전히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처음 목적지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곳, 동네의 가장 안쪽으로 간 것이다. 소나무 숲은 언제나 그랬듯이 고요했다.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했지만 결국 거짓말을 하지 않은 셈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어쩌면 나는 약간 심통이 났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그 이전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소나무 숲의 저 안쪽까지 걸어가보기로 했다. 나는 그토록 나를 이끄는 마음의 실체를 정확히 알지도 못했다. 처음에는 호기로운 마음이었지만, 걸어도 걸어도 눈에 보이는 게 소나무밖에 없자 나는 겁이 덜컥 나기 시작했다. 녹지 않은 눈 때문에 길도 미끄러운데, 형세 자체도 험해진다는 게 한눈에 봐도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가방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결국, 나는 무언가에 미끄러졌는지 아니면 무언가에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지만, 그 바람에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이 앞으로 쏠렸고 그걸 피하려다가 옆 나무 가지에 얼굴을 긁혔다.

면바지의 무릎 부분이 무언가에 걸려 찢어졌고, 무릎에서는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통증도 통증이었지만, 그제야 나는 완전히 겁에 질려버렸다. 이런 건 내가 생각한 ‘실종’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내가 우리 집에서 너무 멀리 떠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나무 숲의 크기를 전혀 가늠할 수 없었던 나는 이 소나무 숲이 영원히 이어질까 봐, 내가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뱅뱅 돌게 될까 봐 무서워졌다.

나는 내가 걸어왔던 방향의 반대쪽으로 돌아 무작정 다시 걷기 시작했다. 찢어진 바지 사이로 찬바람이 송송 들어왔고, 그럴 때마다 무릎에 난 상처가 쓰라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래도 그때의 나는 거의 초인적으로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울면 안 된다며 내 자신을 다독이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 순간에 내 앞에 집이 나타났다. 숲의 한가운데에 나무가 심어지지 않은 넓은 평지가 나타났고, 그 한가운데에 커다란 집이 한 채 있었던 것이다. 마치 알라딘 앞에 지니가 펑 하고 나타났던 것처럼, 나는 이게 헨젤과 그레텔 앞에 나타난 과자 집 같은 것, 나를 매혹시키고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동화 속에서 그런 속임수에 속는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게 내 일이 되자,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눈물이 눈에 대롱대롱 맺힌 채로, 초인종을 마구 눌렀다.

작은 동네 독자의 곁에 머물고 싶은 손보미 작가의 소설 제 15화-1

문을 열어준 건, 어떤 여자였다. 그 여자를 뭐라고 불렀어야 했을까? 아줌마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젊어 보였지만 언니라고 부르기는 망설여지게 하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피부는 창백했고 얼굴은 약간 부어 있었으며 눈 밑은 푹 꺼져 있어서, 어디가 몹시 아픈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남색 실크 파자마 위에 두꺼운 빨간색 모직 숄을 두르고 있었고 곱슬거리는 머리는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었지만, 잔머리가 마구 삐져나와 있었다. 한 손에는 커다란 머그컵을 들고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커다란 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나를 한눈으로 훑더니 작고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에는 부자연스러운 활기가 감돌았다.

“어머나, 얘 너 무릎에서 피가 나잖아. 얼굴도 엉망이다.”

그녀는 나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얘, 너 이름이 뭐니? 괜찮니?”

나는 덜덜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리면서 쓰라린 고통과 후회가 나를 사로잡았다.

“아, 얘, 울지 마, 울지 마, 제발 울지 마.”

그녀는 내가 울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더니 나를 소피에 앉히고 따뜻한 보리차 한 잔과 털 슬리퍼를 가져다주었다. 보리차는 엄청 커다란 머그컵에 담겨 있어서 그걸 받아 든 내 팔이 후들거릴 지경이었고, 털 슬리퍼는 내가 신기에는 터무니없이 컸지만 나는 군말 없이 슬리퍼를 신고 보리차를 마셨다.

몸의 떨림이 서서히 사그라지면서 나를 사로잡고 있던 고통과 후회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거기에 왜 있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호기심에 가득 차서 집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 집의 내부는 우리 집이나 그즈음 내가 놀러가 본 적이 있는 친구네 집과도 전혀 달랐다. 내가 앉아 있는 황갈색 가죽 소파에서는 광이 났고, 벽은 모두 통나무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넓은 거실 바닥에는 하얀색 러그가 깔려 있었다. 무엇보다 거실 한구석에는 커다란 벽난로가 있었는데 나는 그걸 외국을 배경으로 한 만화영화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커다란 숄을 하나 더 가지고 와서 내게 덮어주고 이동식 난로를 가지고 와서 틀어주었다. 그 집에는 이동식 난로가 몇 대나 더 있었다.

“벽난로를 켜주면 좋겠지만, 미안해. 나도 켤 줄을 몰라.”

나는 소파에 앉아서 얌전히 보리차를 마셨다. 그녀는 약간 부산스러웠지만 손이 아주 빨랐다. 그녀는 하얀 러그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뜨거운 물로 적신 수건으로 내 무릎을 닦아주었고, 옥도정기를 바른 후에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그녀는 내 얼굴과 손도 닦아주고, 오른쪽 볼과 양 손바닥에도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그녀가 소파 위에 앉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 머그컵이 빈 걸 확인하고 부엌에 가서 보리차를 한 잔 더 가지고 왔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내가 메고 있던 가방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길을 잃었어?”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몇 살이야?”
“곧 열한 살이 돼요.”

그녀는 내 대답이 꽤 인상적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한 번 반복했다.
“아, 곧 열한 살이 되는구나.”

그녀는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서더니 내 키를 가늠해보았다.
“또래에 비해 키가 작아서 부모님이 걱정하시겠다.”

“아닌데요. 그런 걱정은 안 하세요.”
실제로 부모님은 그런 걸 걱정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대답 같은 건 상관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아. 나중에 클 거야. 걱정하지 마. 나도 그랬거든, 어릴 적엔 엄청 작았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벽난로 선반 위에 올려진 거울에 자기 자신을 비춰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많이 컸어. 어른이 된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뽐내는 느낌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몸짓과 표정을 보고 있던 나는 그 순간 갑자기 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순식간에 실감해버렸다. 나 자신이 불과 몇 시간 전에 ‘실종’되겠다며 집을 나온 아이라는 사실과 이 사실을 부모님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최대한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 몰래 내 방으로 들어가 낮잠을 잔 척을 하는 것이었다.

“저, 아무래도 엄마가 걱정하실 것 같아요.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실 수 있어요?”
초조해진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너네 집이 어딘데?”
“우리 집은 다리 근처에 있어요.”

나는 내가 동네로부터 지나치게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왔고, 그래서 그녀는 내가 말하는 곳이 어디인지 잘 모르리라고 여겼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내가 지칭하는 곳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다.

“너 혼자는 못 보내겠다. 너네 집 전화번호를 알려줘. 엄마에게 데리러 오라고 할게.”
그건 최악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내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으니까.

“내가 운전해서 너를 데려다주면 좋겠지만, 난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돼. 그러면 그 사람이 정말 화를 낼 거야”
“그 사람이 누구예요?”

그녀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뭐, 의사 선생님도 며칠 동안은 절대로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하기도 했고.”

“어디가 아프세요?”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 건 아닌데…… 아마 넌 이해 못 할 거야.”
“그럼 집으로 가는 길만 알려주세요.”
“곧 해가 질 것 같은데 너를 혼자 보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어떡하니? 넌 아직 꼬마잖아.”
“아니에요. 전 꼬마가 아니에요.”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니? 일단 가방은 내게 맡겨둬. 그 가방을 너네 엄마가 열어보시면 정말 굉장히 화내실 거야. 그 안에 분명히 돈이랑 여분의 옷 같은 게 들어 있겠지? 엄마에게는 그냥 이 근처에 놀러왔다가 길을 잃었다고만 말씀드려.”

하지만 나는 책가방을 두고 가는 게 영 마뜩치 않았다. 그녀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책가방은 나중에 혼자 다시 가지러 오던가, 내가 몰래 가져다주면 되잖아. 어머니에게 혼나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거 같은데?”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손보미 소설가
  • 〃 작가소개 〃

    손보미소설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 21세기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담요」가 당선 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그들에게 린디합을』,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이 있다. 2012년 젊은작가상 대상, 2013~2015년 젊은작가상에 선정되었으며, 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 제21회 김준성문학상, 제25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 작가 소개 프로필 사진 저작권: ⓒ이천희
  • 본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 본 콘텐츠는 사전 동의 없이 상업적 무단복제와 수정, 캡처 후 배포 도용을 절대 금합니다.
작성일
2019-04-10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