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버지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남편은 별일도 다 있다는 듯이 툴툴거렸지만,
딱히 더 말을 걸지는 않았다. 밤에, 남편이 잠든 이후로도 한참 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누워 있었지만 도무지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와서 남편의 서재로 갔다. 그리고 남편의 스크랩북을 뒤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맹렬한 태도로. 그러다, 문득 윤이소가 떠올랐다. 남편의 회사가 윤이소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돈을 빚졌다는 말이 아니라, 아니 어쩌면 돈을 빚졌는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윤이소가 없었다면 그 회사는 시작조차 할 수 없었으리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아무도 윤이소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나는 남편의 스크랩북을 옆으로 밀어두고 인터넷의 검색창에 윤이소의 이름을 쳤다. 그러나 윤이소에 대한 특별한 기사는 없었다. 그녀가 사라진 것에 대해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언론도, 그러니까 그런 가십만 다루는 싸구려 언론조차도 떠들지 않았다. 나 말고는 송년회에 나타나지 않은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윤이소의 매니저와 그의 아내조차도. 사람들은 마치 처음부터 윤이소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굴고 있었고, 나는 그게 옳은 일이 아니라고 느꼈다.
윤이소를 다룬 마지막 기사는 그녀가 「또 다른 여자」에 출연한다는, 일종의 제작 발표회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제작 발표회에 나온 건 아니었다. 제작 발표회에는 그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참가했다.
검색을 해보니까 아직도 그 드라마는 방영 중이었지만 윤이소의 하차에 대해 언급하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해 송년회 때 화장실에서 만난 윤이소 매니저의 아내는 윤이소가 편지 한 장만 달랑 남겨놓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고 말했었다.
어쩌면 드라마의 제작진에게 하차 의사를 밝히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윤이소의 역할이 드라마에서 어떤 식으로 처리되었는지 궁금해진 나는 드라마를 소개하는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코너에는 여전히 윤이소의 사진과 윤이소의 배역을 설명하는 문구가 남아 있었다.
“수현—여주인공의 이름이다—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그녀가 다니는 회사의 이사. 산전수전 다 겪었다. 이 세상에서 무서울 것이라고는 없다.”
나는 돈을 지불한 후 서재의 전등은 켜지 않고 헤드폰을 착용한 채로 드라마—윤이소가 아직은 등장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11월 방영분부터—를 보기 시작했다. 드라마의 내용은 그저 그랬다. 유력 정치인의 아들이 아버지 정적의 딸과 사랑에 빠진다.
아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을 하고 싶지만 그게 여의치 않다. 그래서 눈속임용으로 돈이 필요한 평범한 집안의 여자에게
자신과 계약 연애를 해달라고 부탁하는데(아들의 부모는 아들이 원수 집안의 딸과 결혼을 하느니 차라리 ‘그런’ 여자와 결혼을 하는 게 낫다고 여긴다),
그러다가 결국 그 여자와 진짜로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었다.
원래 큰 배역도 아니었는데, 윤이소가 더 이상 나오지 않으리라는 게 공식적으로 공지된 11월 마지막 주 방영분이었다.
이런 대사가 나왔다.
“이사님은 미국으로 떠나셨어요.”
그게 전부였다. 그전에는 윤이소의 배역이 사라질 거라는 어떤 징조도 없었다. 드라마에서 배역 하나를 없애는 게 어쩌면 저렇게 손쉽게 이루어질 수가 있지? 나는 영상을 보며, 세상 모든 사람들이 윤이소를 너무 불공정하게 대한다는 생각을 했고, 그것 때문에 어쩌면 나는 약간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잠시 후,
갑자기 서재 안이 환해졌고 고개를 드니까 조명 스위치 옆에 남편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펼쳐진 스크랩북과 내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헤드폰을 빼서 목에 걸었다.
“안 자고 뭐 해?”
“드라마를 보고 있어.”
목에 건 헤드폰으로 드라마 속 등장인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후회하게 될 거야. 네가 후회하게 되면 내가 정말로 못 살 것 같아.
“드라마?”
“「또 다른 여자」.”
내가 드라마의 제목을 말하자,
그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을 보자 나는 질문하고 싶은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어졌다.
“여보, 윤이소가 사라졌지?”
“뭐?”
그는 내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가 곧바로, 그러니까 내가 되묻기도 전에 대답했다.
“아아, 응. 맞아, 사라졌어.”
나는 당연히 남편이 내게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느냐고, 그런 일에 왜 신경을 쓰느냐고 물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그가 내 질문 때문에 일종의 타격을 받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약간 쑥스러워 보일 뿐, 다른 감정의 동요 같은 건 없어 보였다.
“신경 쓰이지 않아?”
“뭐가?”
“윤이소가 사라진 것 말이야.”
“왜?”
왜,라는 그의 질문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당신들이 그 여자를 버린 거잖아, 나는 사실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 질문은 너무 통속적이어서 비웃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말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해? 당신도 알고 있잖아. 그 여자가 얼마나 제멋대로 구는지.”
나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지만 그게 내가 틀려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던 건, 남편이 진실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불쌍한 여자. 불쌍한 여자들.
그런 단어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나는 당신이 왜 그 여자 이야기를 하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다. 왜 그러는 건데?”
나는 약간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윤이소가 당신들을 도와줬었잖아.”
“당신들? 우리 회사를 말하는 거야? 회사도 할 만큼 다 했어. 그 여자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나는 윤이소의 모습을 떠올렸다. 언제나 도도하던 여자, 어디서나 가장 아름답던 여자,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을 것 같던 그런 여자를
남편의 회사는 무참히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분명 남편이 한몫했으리라. 내가 다시 헤드폰을 착용하고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기 시작하자 남편은 고개를 흔들더니 방에서 나가버렸다. 드라마에는 더 이상 윤이소가 나오지 않을 테지만 나는 드라마 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날은 3학년 겨울 방학식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방학식이 끝나고 친구들과 놀다가 돌아오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정확한 시간만 알려주면 엄마가 데리러 갈게.”
그즈음에는 가끔 그런 식으로 방과 후에 친구들과 시간을 보낼 때가 있었다. 친구네 집에 놀러갈 때도 있었다. 어머니와 시간을 약속하고, 학교 근처에서 놀다가 교문에서 어머니를 만나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날 내가 원했던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친구들과 자유롭게 어울리고 싶었다. 친구들과 골목을 걷고, 낯선 자동차를 만나고, 그들에게 소름끼치거나 사악한 제의를 받고 그걸 보기 좋게 거절하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위험에 처했다가 스스로를 구출하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내가 혼자 버스를 타고 집에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말하자 어머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안 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은데? 친구들이랑 놀다가 교문 앞에서 만나든지, 아니면 방학식 끝나고 바로 엄마랑 집에 오든지.”
잠들기 전, 어머니는 내 방에 들어와서 어떤 걸 선택할 건지 한 번 더 물었다. 내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한숨을 쉬고 방에서 나가버렸다. 다음 날 어머니는 방학식을 하는 동안 교문을 지키고 있다가, 내가 교문에 나타나자 친구들 사이에서 나를 낚아채버렸다.
나는 화가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에 가자마자 내 방으로 들어간 나는 침대에 누워서 계획을 세웠다.
잠시 후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점심을 먹으러 나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군말 없이 나갔고 기분이 나아진 것처럼 행동했다. 그게 내 계획의 시작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밥을 먹으면서 볼 수 있도록 「알라딘」 비디오테이프를 틀어주었다. 나는 이 영화를 부모님과 시내에 있는 극장에서 본 적이 있었다. 특별히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아버지는 「알라딘」 비디오테이프를 구해다가 내게 선물해주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내가 왜 그 영화를 그토록 좋아했는지 몰랐을 것이다. 나는 알라딘과 자스민이 키스하는 장면을 좋아했다. 알라딘은 마법 양탄자 위에 올라타 있고 자스민은 높은 궁궐의 발코니에 서 있다. 둘은 키스를 하고 싶지만, 망설인다. 그때 마법 양탄자가 제멋대로 움직여서 둘은 입을 맞추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키스를 할 때, 알라딘의 입가에는 주름이 졌다. 나는 그 장면을 어른이 된 후에도 언제나 기억을 하고 있을 정도로 좋아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알라딘」에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밥을 먹는 내내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기 때문이다.
“기분이 나아진 거 같아서 다행이야. 오늘은 아빠가 빨리 퇴근하신대. 올 때 네가 먹고 싶은 걸 사다 주신다고 하셨어. 뭘 먹고 싶어?”
어머니가 물었지만,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먹고 싶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씹고 있던 밥알의 맛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긴장하거나 혹은 흥분하고 있었고, 심지어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을 어머니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굴려고 노력했다. 머릿속에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대로 치킨이 먹고 싶다고 대답하자, 어머니는 아버지가 있는 사무실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착하구나, 우리 딸.”
내게로 돌아온 어머니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밥을 다 먹은 후, 나는 양치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책가방을 열었다. 그 당시 내 보물 1호는 책가방이었다. 아버지가 일본 출장을 다녀오면서 사다 주신 거였는데,
책가방 앞쪽에는 빨강머리 앤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 책가방을 가진 애는 전교에 나밖에 없었다. 나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아주 약간의 용돈을 책가방에 넣었다. 정말로 아주 약간이었다. 버스 삯으로 사용하고, 빵과 우유를 하나 사 먹을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교과서는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두었고, 필통은 챙겼다. 나는 하릴없이 필통을 한번 열어보았다. 각각의 연필에는, 내 이름과 학교, 반, 번호까지 꼼꼼히 적힌 견출지가 붙어 있었다. 나는 48색깔짜리 색연필과 며칠 전 크리스마스 때 어머니를 졸라서 선물 받은 만화 월간지, 아버지가 미국 출장 때 디즈니랜드에서 사다 주신 내 팔뚝만 한 미키마우스 인형, 잠옷과 여분의 바지와 티셔츠를 하나씩만 더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가방은 빵빵해졌다.
방에서 나온 나는 살금살금 걸어서 가방을 마루에 놔둔 채, 부엌과 통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설거지를 하는 중이었다.
“엄마, 나 소나무 구경하고 올게요.”
어머니는 손을 멈추고 나를 한번 돌아보았다.
“털모자 쓰고, 장갑 끼고, 옷 단단히 입고 가.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까.”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설거지에 집중했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방에서 나와서 마루에 놓아둔 책가방을 조심스럽게 멨다.
그리고 혹시라도 어머니와 마주칠까 봐 부츠를 신고 재빨리 대문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는 ‘실종’될 계획이었다.
엄청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저 버스를 타고 집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 정도밖에 없었다.
집 근처에 있는 좁은 다리를 지나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나는, 제발 동네 사람들을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며 버스를 기다렸다.
동네 사람들은 그게 누구든 내가 혼자 버스 정류장에 있는 걸 이상하게 여길 터였다. 아무리 그들이 어머니와 왕래가 없다 하더라도 오지랖이 넓은 누군가는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릴 가능성이 있었다. 다행히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로 20분 정도가 지났고, 드디어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문이 열리고, 나는 버스 입구 계단을 하나 올라섰지만, 이상하게도 더 이상은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마치 어딘가에 끼인 사람처럼 버스 계단 위에 멈춰 있었다. 버스 기사가 내게 물었다.
“얘, 탈 거니? 안 탈 거니?”
나는 파리해진 얼굴을 하고 힘없이 뒷걸음쳐서 버스 밖으로 떨궈져 나왔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버스 문이 닫히는 걸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후에는 떠나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오랫동안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다음에 버스가 도착하면 꼭 타는 거야.
하지만 30분 후쯤에 다시 버스가 도착했을 때도, 나는 버스에 올라타지 못했다. 시장에 다녀오는지 양손에 비닐봉지를 바리바리 든 동네 아주머니가 버스에서 내리다가 나를 보고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너, 벽돌집 딸이잖아? 혼자 어디 가니? 엄마는?”
나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꾸벅 인사를 한 후,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날, 나는 떠나지 못했다.
물론, 그 시절의 내가 집을 떠난다는 것, 부모님을 떠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았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그저 내 자신이 취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하나의 태도나 경향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처음부터 떠날 생각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도 부당하다. 엄밀하게 말하면 나는 멈춘 것이었다.
〃 작가소개 〃
손보미소설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 21세기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담요」가 당선 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그들에게 린디합을』,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이 있다. 2012년 젊은작가상 대상, 2013~2015년 젊은작가상에 선정되었으며, 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 제21회 김준성문학상, 제25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