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드득뽀드득 과자 부숴 먹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침 일곱 시, 할머니가 과자 먹는 소리입니다. 진이에게는 그 소리가 알람입니다. 아침밥 준비가 조금만 늦어도 할머니는 과자를 세게 부숴 먹습니다. 배고프니까 어서 밥 달라는 말입니다.
할머니는 일곱 살입니다. 7년 전, 오토바이 사고로 기억을 잃고 다시 나이를 먹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그래그래, 다 잊어먹고 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안 잊어먹고 어찌 살겠나.” 엄마가 푸념을 늘어놓으며 할머니 밥그릇에 수북하게 밥을 담습니다. 할머니는 사고 직후에 자기가 누구인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런 기억을 하지 못했습니다. 1년 넘게 병원에 다니고 나서야 차츰 사람을 알아보고 소소한 집안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자꾸 일을 시킵니다. 세탁기로 빨래하는 일과 설거지하고 청소하는 일이 일곱 살 할머니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 정도라도 움직여야 기억 회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걸 엄마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일을 잘 하는 편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날은 게으름을 피웁니다. 개수대에 씻을 그릇을 가득 쌓아 놓고는 과자만 먹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엄마의 목소리가 커집니다.
“설거지 안 해?”
“안 해.”
“그럼 알아서 해. 그 대신 밥 담을 그릇이 없으니까 굶어야 해.”
“…….”
엄마가 일부러 차가운 얼굴을 합니다. 그러면 할머니는 삐쭉 내밀고 있던 입술을 거두고 어느새 거뜬히 설거지를 해냅니다.
진이는 정신연령이 자기보다 낮은 할머니가 너무 싫습니다. 밥 먹을 때 가끔 다투기도 합니다. 맛있는 반찬이 있으면 할머니가 자꾸 욕심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진이가 학교에서 늦게 돌아오자 엄마가 집에 없었습니다. 식탁에는 진이와 할머니가 좋아하는 김과 계란찜이 표고버섯나물과 함께 차려져 있었습니다. 수저 옆에는 엄마가 써 놓은 쪽지도 있었습니다. ‘진아, 엄마는 오늘 촉석루 행사가 있어서 서둘러 나간다. 계란찜 해놨으니 할머니랑 싸우지 말고 밥 맛있게 먹어.’
진이는 배가 고파 얼른 손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식탁에 앉기도 전에 할머니는 계란찜을 젓가락으로 절반 딱 나누어 선을 그었습니다. 똑같이 나눠먹자는 뜻입니다. 진이는 그런 할머니가 싫다 못해 미워 죽을 지경입니다. 처음에 할머니는 계란찜을 앞쪽에서부터 차례차례 조금씩 먹어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나물은 먹지도 않고 한 손으로 김을, 또 한 손으로는 계란찜을 빠르게 먹어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야!”
갑자기 진이가 소리를 지르면서 들고 있던 숟가락으로 할머니의 숟가락을 세게 내리쳤습니다. 할머니가 진이 몰래 계란찜을 숟가락 끝으로 굴 파듯이 파먹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엄마! 나 다시는 할머니랑 밥 같이 안 먹을래. 정말 치사해 죽겠어.”
“진아! 할머니는 진이보다 어리니까 동생 돌보듯이 해야 하는 거 알지?”
“며칠 전에 피자 시켜 먹을 때도 맛있는 토핑만 걷어 먹었단 말이야.”
“그래그래, 진이가 하는 말 다 알아. 나중에 집에 가면 이야기하자.”
할머니와 싸운 이야기에도 엄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진이를 곱게 타이르며 다독여주었습니다. 진이는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더 이상 밥을 먹지도 않고 문을 쾅 닫고는 피아노 학원으로 가버렸습니다. 학원의 한 평짜리 칸막이 방에서 진이는 늦도록 피아노 연습을 했습니다. 배가 고팠지만 할머니가 미워서 집에 가기 싫었습니다. 그때 살며시 연습실 문이 열렸습니다. 피아노 선생님인 줄 알고 얼른 고개를 돌리자 보기도 싫은 할머니가 얼굴을 들이밀었습니다.
“이거…….”
할머니가 학원에 찾아온 것만 해도 창피해 죽겠는데 검은 비닐봉지까지 덜렁덜렁 들고 와서 내밀었습니다. 진이는 얼른 할머니를 떠밀 듯 내보내고 문을 닫았습니다. 봉지 속에는 삶은 계란 두 개와 은박지에 싼 소금이 들어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더 미워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습니다.
엄마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엄마는 찬불가를 부르는 ‘불자 가수’입니다. 가끔 늦은 시간에 공연이 있는 날은 밤늦게 돌아옵니다. 엄마가 술이라도 한잔 마시고 오는 날엔 꼭 ‘만다라’ 노래를 부르며 현관에 들어섭니다. 그럴 때 엄마의 볼은 눈물로 얼룩져 있고 핸드백은 손끝에 축 늘어져 있습니다. 수없이 반복하는 마지막 소절, ‘떠나지 못하는 내 몸의 번뇌를 씻어내 주세요’는 일곱 살 할머니도 알고 따라 할 정도입니다.
그날 새벽, 진이가 자다가 일어나 화장실 가려고 나오자 엄마가 베란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엄마, 안 자고 거기서 뭐해요?”
“응, 안개 본다고…….”
어디서부터 몰려왔는지 안개가 베란다 창밖까지 빽빽이 와 있었습니다. 베란다 문을 살짝 열자, 훅 달려드는 안개에 밀려 진이와 엄마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안개가 거대한 몸으로 고층 아파트 베란다까지 들어섰습니다. 바깥 들판은 마치 바다 같았습니다. 차츰 날이 밝아오면 들마을의 안개는 진양호 너머 산등성이로 기어오릅니다. 안개가 산을 업어주고 산이 안개를 안아주며 산골짝 사이사이에서 소복소복 어울려 놉니다.
언제 깼는지 할머니가 세탁기를 돌려놓고 과자를 먹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일찍 세탁기를 돌리면 아랫집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엄마의 나무람에 할머니는 대답 대신 과자만 더 세게 부숴 먹습니다.
진이는 일찍 일어났다고 늦장을 부리다가 오히려 다른 날보다 더 바쁩니다.
“엄마, 그림 숙제 넣어놓은 내 보조 가방 못 봤어요? 아침에 잊어먹고 안 갖고 갈까 봐 미리 현관 입구에 두었는데.”
“응, 어제저녁에 보니까 현관문 옆에 세워져 있던데? 잘 찾아보렴.”
이리저리 아무리 찾아봐도 보조 가방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다급해진 진이는 혹시나 하며 할머니한테 다그쳐 물었습니다.
“할머니, 내 보조 가방, 하얀 곰이 그려져 있는, 그 가방 못 봤어?”
가만히 듣고 있던 할머니는 대답 대신 턱으로 세탁기를 가리키고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진이가 얼른 세탁기 뚜껑을 열었습니다. 곰의 일그러진 얼굴이 이리저리 물살에 씻기고 있었습니다.
진이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아악! 내 숙제, 오늘 꼭 제출해야 된단 말이야!”
“아이구, 어쩌나! 할머니가 진이 가방이 더러우니까 씻어주려다가 숙제를 꺼내지도 않고 세탁기에 넣었나 봐!”
놀라 달려온 엄마의 얼굴 뒤로 기죽은 할머니의 얼굴이 진이 눈물에 겹쳐 보였습니다. 눈물범벅이 된 진이가 세탁기에서 물이 줄줄 흐르는 가방을 꺼내 할머니 앞에 집어 던졌습니다. 할머니는 울먹울먹하며 방으로 뒷걸음질 쳤습니다.
“진아, 그래도 할머니한테 그렇게 사납게 하면 안 되는 거야. 진이가 아기 때라 잘 모르겠지만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할머니는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오셨어. 오자마자 그만 사고를 당해 이렇게 되신 거야. 다 엄마 때문이야. 밤늦게 엄마를 기다리다가 골목에서 달려 나오는 오토바이에 치여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치신 거지. 그 전엔 진이를 얼마나 귀여워하셨는지 몰라.”
“…….”
“숙제는 선생님께 잘 말씀드리면 연기해주실 거야. 어서 눈물 닦고 학교 가자, 늦겠다. 오늘은 엄마 차로 데려다줄까?”
“응.”
“엄마, 오늘도 어디 가?”
“응, 내일부터 개천예술제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전야제 행사에 가야 돼.”
“늦어요?”
“그래, 좀 늦을 거야. 근데 왜? 무슨 일이라도 있니?”
“응, 오늘부터 모레까지 피아노 경연대회 총 연습 때문에 학원에서 늦게 오거든요. 늦은 시간에 골목길을 지나오면 무서워서요. 가로등도 희미한데, 가끔 나쁜 언니들이 나타나 괴롭힌대요.”
“그럼 오늘만 혼자 오렴. 내일부터는 당분간 엄마가 아무 일정이 없으니까 마중 갈 수 있어.”
“알았어요.
진이가 차에서 내리면서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듯 찡긋 눈인사를 했습니다. 엄마도 운전대에서 잠시 한 손을 떼고 가볍게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날 밤. 진이가 걱정하던 일이 그만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사람들 몇 명이 골목에 서성이는 것을 보고, 혹시 싶어 오던 길을 되돌아 모퉁이를 막 도는 순간이었습니다. 나쁜 언니들 세 명이 나타나 진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야! 초록반바지! 어딜 도망가려고?”
“…….”
진이는 무서워 떨기만 했습니다.
“좋은 말할 때 있는 거 탈탈 다 털어 내놔!”
앞을 가로막고 있던 한 명이 손끝으로 진이의 이마를 쿡쿡 찌르고 주먹으로 배를 툭툭 쳤습니다.
“이거 말이 없는데, 어디 손 좀 잘 봐줄까?”
“…….”
진이는 갑자기 혀가 굳은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겨우 눈짓으로 피아노 가방을 가리켰습니다. 가방 속에는 피아노 교재비로 가지고 갔다가 깜박 잊고 못 낸 돈이 3만3,000원이나 있었습니다. 한 명이 재빨리 가방 속에 손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막 꺼내려는 순간, 어디선가 쏜살같이 어른 한 사람이 나타나 닥치는 대로 막대기를 휘둘렀습니다.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평소보다 더 늦은 진이 마중을 나왔다가 진이가 위험에 처한 걸 보고는 가로수 버팀목으로 겁을 준 것입니다. 그들은 할머니의 기세에 놀라 도망을 쳤습니다.
그때야 진이는 정신을 가다듬고 할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앞에 서 있는 할머니는 일곱 살 할머니가 아니라 너무나 당당한 할머니, 엄마의 엄마였습니다.
“할머니…….”
진이가 성큼성큼 다가가 할머니에게 와락 안겼습니다. 그때까지도 할머니는 가로수 버팀목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말없이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유난히 몸이 작은 진이는 할머니 등에 가볍게 업혔습니다. 유치원 때 업혀보고 처음이었습니다. 진이한테만큼은 여전히 힘센 장사였습니다. 할머니의 등이 참 따뜻했습니다. 진이는 할머니의 넓고도 마른 등에 얼굴을 묻고 가는 팔로 할머니 목을 살며시 끌어안았습니다. 흐린 불빛에 간간이 비치는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할머니가 진이를 업고 집의 반대 방향으로 잘못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진이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화도 내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찬란한 불꽃이 펑펑 터졌습니다. 촉석루에서 개천예술제 전야제 행사로 불꽃놀이가 한창이었습니다. 남강에 띄워놓은 유등을 따라가는 동안에도 진이는 내내 할머니 등에 업혀 있었습니다. 하늘까지 치솟았다가 “뻥!” 터져 흘러내리는 불꽃들이 논개, 용, 연꽃 모양의 여러 유등에 부딪치면서 더욱 빛났습니다.
“와아! 할머니 저 불꽃 좀 봐, 와아! 정말 굉장하다!”
“…….”
할머니는 진이를 업은 채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불꽃을 바라보았습니다.
- 글
- 최명란(1963년생)_시인, 동시작가
동시집 『하늘天 따地』 『수박씨』 『바다가 海海 웃네』, 시집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 『자명한 연애론』 『명랑생각』 『이별의 메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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