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동화

거꾸로 할머니와 '바이올리'

생각하는 동화 거꾸로 할머니와 바이올리 글 김아정 생각하는 동화 거꾸로 할머니와 바이올리 글 김아정
할머니의 하루는 거꾸로 흐른다. 아침에는 본래의 나이인 여든 살로 지내다가, 점심 먹을 시간이 되면 일흔일곱 살 즈음이 된다. 아침과 점심 사이, 할머니는 둘로 나뉜다. 나는 두 할머니를 각각 아침할머니, 점심할머니라고 이름 지었다. 비스듬히 열린 방문 너머로 두 할머니를 엿봤다. 점심할머니가 자꾸만 코코를 찾아대자 아침할머니가 대답했다.
“코코는 이제 여기 없다니까.”
코코는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던 갈색푸들이다. 코코가 엄마와 함께했던 시간은 나와 함께했던 시간보다 길었다고 한다. 재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코코는 잠드는 병에 걸린 듯 밥을 먹다가도 자고 산책을 하다가도 잤다. 결국 코코는 우리 집을 떠났다. 가족들 모두 슬퍼했다. 나는 슬프기보다 같이 놀 친구가 없어져서 심심해졌다. 코코 다음으로 나와 잘 놀아주는 가족은 할머니였다. 나는 예전보다 더 많이 할머니에게 놀아달라고 졸랐다. 할머니는 그때마다 나를 데리고 공원에 놀러 갔다. 그런데 가끔 할머니가 코코를 찾아 헤맸다. 해가 저물어가는데도 할머니는 공원을 뛰어다니며 코코를 불러댔다. 나는 할머니에게 코코가 죽었다고 대답했다가 혼이 났다. 그땐 정말 억울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그날 처음, 점심할머니를 만난 것이었다.
“할머니, 식사하세요.”
나는 할머니의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점심할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밥은 누가 차렸니?”
“엄마가요.”
나는 두 할머니를 부엌 식탁에 데려와 앉혔다.
“은자야, 왜 이 시간에 집에 있어? 회사는? 휴가라도 낸 거야?”
점심할머니의 말에 아침할머니가 대답했다.
“은자 회사 그만둔 지가 언젠데.”
“뭐? 회사를 그만둬? 아니 왜?”
엄마가 점심할머니의 밥 위에 생선살을 발라 올려주었다. 엄마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농담했다.
“나도 이참에 살림이나 배워볼까 해서.”
할머니는 요리솜씨가 뛰어나다. 지금은 요리를 하다가도 아침할머니와 점심할머니가 투닥투닥 다투느라 냄비 불 끄는 것을 깜빡 한다. 이제는 할머니가 해준 요리를 더 이상 먹지 못하지만 다행히 엄마의 요리가 조금씩 할머니의 요리를 닮아가고 있다. 밥을 다 먹고 난 뒤, 나는 엄마를 도와 설거지를 했다.
“우리 소미 다 컸네, 설거지도 하고.”
아침할머니가 말했다.
“열한 살짜리 애한테 애기가 뭐야, 애기가.”
“열한 살이라니? 소미가 키가 좀 큰 편이라 그렇지, 올해 막 초등학교 들어갔다고.”
내 나이를 가지고 뒤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아침할머니는 그러니까, 원래의 할머니다. 모든 일을 기억한다. 내가 초등학교 사학년이라는 것도, 내가 할머니를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점심할머니의 기억은 나의 여덟 살에 멈춰 있다. 점심할머니의 말대로 일학년 때 나는 키가 제법 컸다. 하지만 그 이후로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아서, 지금은 교실 맨 앞줄에 앉는다.
설거지를 마치고 뒤를 돌아보니 할머니가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엄마와 나는 할머니를 부축해 방으로 데려갔다. 침대에 할머니를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엄마 은행이랑 마트 다녀올 테니까,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해.”
나는 엄마를 현관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텔레비전을 보려다가 할머니가 깰까 봐 휴대폰에 이어폰을 꽂고 소파에 앉았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하나씩 골라 들었다. 노래가 흥겨워지자 나도 모르게 엉덩이가 들썩였다. 그때 할머니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벌써 깼어요?”
“소미야, 할머니 바이올리 연주 듣고 싶어.”
바이올린 타령을 하는 것은 오후 세 시 즈음 등장하는 세 시 할머니다. 세 시 할머니는 나를 유치원생으로 보았다. 유치원 때 바이올린을 잠깐 배웠었다. 나는 바이올린에 소질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할머니는 내 연주 보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은 활 잡는 방법도 다 까먹었는데. 세 시 할머니에게 텔레비전도 틀어주고 휴대폰으로 할머니가 좋아하는 옛날 노래도 들려주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자꾸만 "바이올리" 타령을 했다. 내가 바이올리가 아니라 바이올린, 이라고 고쳐줘도 소용없었다. 할머니가 하도 조르는 탓에 결국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옛날에 쓰던 내 바이올린 아직 집에 있어?”
“바이올린은 왜? 그거 너 방 침대 밑에 있을걸?”
전화를 끊고 방으로 달려갔다. 휴대폰 불빛을 비춰 침대 밑을 확인했다. 안쪽 구석에 시커먼 게 보였다. 나는 침대 밑을 비집고 들어갔다. 어렸을 때 숨바꼭질을 하면 꼭 여기에 숨었었다. 그땐 침대 밑 세상이 크고 넓었다. 지금은 몸이 꽉 껴서 숨이 막혔다.
나는 겨우 바이올린을 꺼냈다. 걸레로 시커먼 먼지를 닦아내자 케이스가 반짝반짝 빛났다. 뚜껑을 열자 작고 귀여운 바이올린이 보였다. 유아용으로 만들어져, 보통 바이올린의 사 분의 일 사이즈밖에 안 되었다.
‘이게 아직 남아 있다니. 작아서 켤 수도 없는데 엄마는 왜 굳이 보관해 둔 거지?’
케이스 안주머니에서 송진가루를 꺼내 활에 여러 번 덧발랐다. 할머니가 신이 나는지 박수를 쳤다. 기억을 어렴풋이 되짚으며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연주했다. 음이 죄다 안 맞았다. 할머니가 두 눈을 반짝이며 바이올린을 빤히 바라봤다.
“그거 네거니?”
벌써 네 시 할머니가 왔나 보다. 네 시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네, 어릴 때 연주하던 거예요.”
“한 번 만져봐도 되니?”
나는 할머니에게 바이올린을 내밀었다. 할머니가 갓난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레 바이올린을 끌어안았다.
“딸이 어렸을 때 바이올리가 하고 싶댔어. 그때 나는 바이올리가 뭔지도 잘 몰랐어. 밥이나 해 서 먹일 줄 알았지, 그 애의 꿈을 키워주진 못했어.”
할머니의 말이 낯설었다. 엄마가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꿨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얼마 전에는 말이야, 이쁜 애기도 하나 낳았단다.”
애기라면 나를 얘기하는 것이다. 네 시 할머니의 아기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기했다.
“우리 손녀딸도 이런 바이올리 하나 사다 주면 좋아할까?”
“아기가 무슨 바이올린을 연주해요.”
“은자가 그랬어, 요즘은 조기교육이 중요하대. 요새도 소미 영어 가르친다고 하루종일 영어동요를 틀어 놔.”
순간 뜨끔했다. 나는 영어를 잘 못 한다. 학원을 열심히 다니고는 있지만 적성에 잘 안 맞는 것 같다. 아무래도 엄마의 조기교육은 실패한 모양이다.
“우리 소미, 바이올리 하나 사줘야겠어. 은자를 쏙 빼닮았으니 분명 좋아할 거야.”
가만히 기억을 되짚어보니 바이올린을 좋아했던 건 엄마였다. 어렸을 때 나는 바이올린을 싫어했다. 엄마가 나를 억지로 음악학원에 데려간 거였다. 음악학원 바로 옆에는 태권도장이 있었다. 어렸을 적 나는 바이올린을 복도에 던져 놓고 태권도장 안을 기웃거렸다. 태권도를 못 배우는 게 전부 바이올린 탓 같았다. 나는 할머니에게 태권도를 배우고 싶다고 졸랐다. 할머니는 곧장 나를 데리고 태권도장에 갔다. 처음으로 도복을 입고 흰 띠를 맸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때 바이올린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발차기를 하며 온 동네를 뛰어다닌 것만 생각났다.
“이런 바이올리는 어디 가서 사니?”
“악기점에서 팔겠죠?”
“이 근처에 악기점이 있나?”
“학교 앞에 하나 있어요. 거기서 애들이 가끔 피아노도 치고 그래요.”
문득 엄마가 왜 바이올린을 치워버리지 못하고 침대 밑에 넣어뒀는지 알 것 같았다. 너무 작은 바이올린이었지만 너무나도 큰 바이올린이기도 했다.
“이거 드릴게요. 선물이에요.”
할머니가 두 눈을 깜빡였다.
“바이올린은 제 스타일이 아니더라고요. 너무 작아서 어차피 저는 켤 수도 없어요.”
나는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넣은 뒤 할머니의 손에 들려주었다. 할머니가 케이스 손잡이를 꼭 쥐더니 내 눈을 빤히 바라봤다.
“이걸 고마워서 어째. 고맙다, 얘야. 정말 고마워.”
기분이 이상했다. 선물이라고 했지만 사실 할머니한테 받은 걸 그냥 돌려주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얘야, 넌 누구니?”
내가 누구냐고 묻는 할머니의 말은 언제 들어도 아프다. 처음에는 울먹이면서 할머니를 원망했다. 나중에는 왜 나를 까먹냐고 화를 내기도 했다. 엄마는 나에게 자기소개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할머니가 나에게 누구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할머니에게 나를 소개했다.
“제 이름은 이소미예요. 열한 살이고요, 노래 듣는 걸 좋아하고 운동을 잘해요.”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우리 손녀딸 이름이랑 똑같네? 역시 소미라고 이름 짓길 잘했어, 우리 소미도 너처럼 씩씩하게 자랐으면 좋겠다. 근처 사니? 나중에 우리 집에 놀러 오렴. 내가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 줄게. 내가 요리솜씨 하나는 끝내주거든.”
나는 할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갈게요.”
그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였다.
“할머니, 일어나셨니?”
할머니가 바이올린을 들고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나는 가만히 서서 둘을 바라봤다. 베란다 창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저녁이 오고 있었다. 그 순간 할머니의 굽은 허리가 조금씩 펴졌다. 희끗하던 머리칼도 검게 물들었다.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도 조금씩 생기를 찾았다. 저녁할머니가 나타났다.
“엄마?”
엄마가 할머니를 불렀다. 저녁할머니가 엄마에게 바이올린을 내밀었다. 엄마가 바이올린을 받아들자 엄마의 짧은 머리칼이 조금씩 길어졌다. 통통하던 팔다리도 점점 가늘어졌다. 깊게 패인 뺨에는 볼살이 차올랐다. 앨범 속에서나 보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씩씩한 모습의 건강한 할머니와 긴 생머리가 찰랑거리는 예쁜 엄마였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둘은 이런 모습이었구나.’
“선물이야. 은자 너 갖고 싶어 했잖아. 바이올리.”
할머니가 엄마에게 말했다. 그때 소파 밑에서 조그마한 갈색 푸들이 튀어나왔다. 아직 새끼였을 때의 코코였다. 코코가 작은 몸으로 깡총깡총 뛰며 엄마와 할머니 사이를 맴돌았다. 엄마가 바이올린을 매만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할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코코가 둘 사이에 찰싹 달라붙어 앙앙거렸다. 나는 두 손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축축한 땀이 잡혔다. 거기엔 내가 없었다. 아니, 거기에도 내가 있었다.
생각하는 동화 거꾸로 할머니와 바이올리 글 김아정
김아정(1993년생)_동화작가
소설집 『다행히 졸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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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6-2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