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동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생각하는동화 : 선녀의 아이 생각하는동화 : 선녀의 아이
“길이 올 때마다 바뀌네.”
엄마가 핸들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마을은 내 기억과도 전혀 달랐다. 도로는 넓어지고 있던 가게는 사라지고 없던 건물이 올라가 있었다.

익숙한 풍경이 보인 건 차가 한참을 더 달린 뒤였다. 드문드문 집이 있고 논 사이로 좁은 길이 나 있는 곳에 다다랐을 때, 할머니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던 내가 기억났다. 마냥 기분이 좋았던 나와 푸근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던 할머니.

차에서 내려 파란 대문 앞에 섰다. 많은 게 바뀌었는데도 할머니의 집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대로였다.

외할머니는 내가 일곱 살 때 돌아가셨다. 내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꽤 오랫동안 할머니는 혼자 이 집에 살고 있었던 거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도 집은 그대로 두었다. 가족들이 번갈아 가며 집 상태를 살피면서, 휴가철이나 주말에 종종 쉬다 가는 곳이 되었다. 엄마랑 단둘이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문을 들어서는데 우편함에 삐죽 나온 종이가 보였다. 짐을 내려놓고 우편함을 열었다. 받는 사람이 할머니 이름으로 된 우편물이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우편물이 온 것도 오래전이었다. 주인에게 갔어야 할 편지가 우편함에 몇 년째 놓여있는 셈이다. 그 안에서 낡고 바랜 채로.

아무도 봉투를 열어보지 않았다. 할머니 집에서는 모든 게 그랬다. 가족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할머니의 흔적을 그대로 두었다. 나도 편지 봉투를 다시 우편함에 넣었다. 다음에 왔을 때도 그대로 있기를 바라면서.

대충 짐을 옮기고 나서 엄마는 평상에 벌렁 누워 눈을 감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엄마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배고파.”
엄마의 기분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너무 배가 고팠다. 그제야 엄마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라면을 꺼내더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에 부엌에서는 우당탕 그릇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라면 하나 끓이는데도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을 엄마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바닷바람이 여기까지 온 걸까. 시원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렸다. 할머니 집에 가까이 올수록 알 수 없이 밀려들던 기분이 온통 나를 사로잡았다. 할머니와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추억이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엄마는 이곳에 온 목적을 이루려 할 게 뻔하다. 나는 엄마가 하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할머니가 그리워졌다.
“어때, 기가 막히지?”
엄마가 라면을 끓여왔다. 딱 봐도 물이 너무 많았다. 여태 라면 물도 못 맞추느냐고 따지려다가 그만두었다.
“학교 갔다 오면 여기서 라면 먹고 그랬는데.”
라면이 매워서인지 할머니 생각이 나서인지 엄마가 코를 훌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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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동화 : 선녀의 아이
엄마는 삼남매 중에 막내다. 바로 위의 이모와도 열 살이나 차이가 났다. 늦둥이였기 때문에 외할아버지는 엄마만 예뻐했다고 이모랑 외삼촌이 말했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이모나 외삼촌이 아직도 엄마를 ‘막내’라고 부르면서 챙기는 걸 보면 시샘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일까. 엄마는 다른 엄마들과 달랐다. 엄마가 된 지가 12년째인데 라면 물도 못 맞춘다면 말 다한 거다. 엄마는 직업만 만화가가 아니라 엄마가 그리는 만화 속 주인공이랑 비슷했다. 잘 웃고, 잘 울고, 화를 냈다가 금방 잊어버린다. 빈둥거리다가 마감일에 쫓겨 작업실에서 밤을 새우고, 하나밖에 없는 딸의 간식은커녕 밥도 제때에 못 챙겨준다. 내가 밥을 해서 엄마에게 차려준 적이 있을 정도다.
“엄마, 제발 정리 정돈 좀!”
“청소가 뭐 대수니?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 딸아.”
평소 엄마와 나의 대화다.
이모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엄마는 아빠와 내가 모든 걸 다 이해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아빠는 그렇다 해도 나는 아닌데, 엄마는 뭘 몰라도 단단히 모르는 거다. 그리고 엄마가 모르는 게 또 하나 있다.
“우리 딸이 얼마나 어른스러운지 내가 챙겨 줄 필요가 없어. 혼자서 다 알아서 한다니까.”
마가 자랑스럽게 하고 다니는 말. 내가 이 말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엄마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는 싱거운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라면을 먹고 있는 엄마 머리 위에 말풍선을 단다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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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에 올려놓고 엄마는 할머니의 그릇들을 구경했다. 역시나 설거지는 뒷전이었다. 엄마는 할머니의 손을 만지듯이 그릇들을 가만가만 어루만졌다. 부엌을 나와서도 엄마는 한참이나 할머니의 흔적들을 찾아다녔다. 방마다 모든 게 할머니 그 자체였다. 형제들의 결혼식 사진이 줄줄이 걸려 있는 벽에서 엄마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엄마와 아빠의 결혼식 사진도 있었다. 촌스러운 가족들 모습에 나는 풋 웃음이 나왔는데, 엄마는 웃지 않았다. 엄마의 머리 위로 또 말풍선이 생기려고 했다.
바닷가 간다며?”
일부러 엄마에게 말을 걸었다. 할머니의 집에서 가장 좋은 건 5분 거리에 바다가 있다는 점이었다.
“아, 그렇지!”
할머니 손을 잡고 걸었던 길을 엄마와 걸었다. 엄마도 언젠가 할머니와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때 엄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해안가에 도착해서도 우리는 말없이 걷기만 했다. 바람이 불자 파도가 밀려왔다. 날이 흐려 바다 저편이 뿌옇게 보였다.
“지유야.”
엄마가 먼 바다를 보며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냥 이렇게 놀다 가면 좋겠다. 엄마랑 단둘이 할머니를 보러 온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집에 돌아가면 아무렇지 않게 나는 학교에 다니고 엄마도 작업실에 나가고. 가끔은 늦은 오후까지 자다 일어난 엄마가 부스스한 얼굴로 나를 맞는 그런 하루하루. 내가 잔소리를 늘어놓으면 엄마는 “뭐 어때?”라는 말풍선을 달고 있다면, 좋겠다.

엄마는 나를 떠나려고 한다. 2년이라는 시간은 나에게 엄청나게 길고 오랜 시간이다. 엄마 없이 지낼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엄마가 그리웠다.

그냥 알아보는 거라고 시작하던 엄마의 유학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구체적으로 바뀌었다. 엄마 결정이라면 늘 찬성하는 아빠도 이번에는 한 번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대신 내가 찬성하면 아빠도 찬성한다면서 결정을 미뤘다. 엄마는 어떻게든 나를 설득하려는 게 분명하다. 아빠도 빼놓고 둘이 여행을 떠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에게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지훈이는 잘 있니?”
한참 뜸을 들이던 엄마가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헤어진 지가 언젠데.”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돌아봤다. 바닷바람에 머리가 날려 엄마 모습이 피곤해 보였다. 결혼식 날 찍은 사진과는 사뭇 달랐다.
“우리 딸, 어른 다 됐네.”
“그래서 나 두고 떠나려는 거야? 어른스러우니까 혼자 있어도 된다고?”
엄마가 꺼낼까 봐 조마조마했던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바다만 보고 돌아가고 싶었는데.
“왜 혼자야? 아빠도 있는데. 그리고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엄마의 말에 기가 막혔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뭘 하든 모른 척했어?”
“엄마는 널 믿은 거야. 엄마 배 속에 있다 나온 애가 왜 엄마 마음을 몰라?”
“그러는 엄마는 내 마음을 알아? 어른 같다는 말, 난 진짜 싫다고!”
내가 소리치자 엄마는 기가 꺾여 머뭇거렸다.
“나 스무 살 되면 그때 가. 그럼 허락할게.”
이때다 싶어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깔고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엄마가 내 마음을 읽고 포기할 수 있게. 엄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의 웹툰이 인기를 얻으면서 덩달아 엄마도 유명해졌는데, 뭐가 더 필요한 걸까. 게다가 엄마가 가려는 곳은 비행기를 타고 열 시간도 넘게 가야하는 먼 곳이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겨도 달려올 수 없는 아주 먼 곳.
“딱 2년만 엄마한테 시간을 줘. 응? 지유야.”
엄마는 과자를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처럼 나에게 매달렸다. 역할 놀이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엄마가 된 것처럼. 참방참방 파도 소리만 들렸다.
“엄마한테 가장 소중한 건 당연히 지유 너야. 하지만 엄마도 엄마 인생이 있어. 포기하고 싶지 않은 삶 말이야.”
엄마에게 가장 소중한 건 나인데, 나를 두고 떠나려고 한다. 이해할 수가 없다. 엄마의 마음을. 엄마의 삶을. 내가 엄마를 너무 모르는 걸까.
“엄마는 넓은 곳에 나가고 싶어. 평생 시골 바닷가에서만 살았던 우리 엄마 대신에.”
“할머니 얘기하는 거야?”
엄마는 말없이 바다만 보았다. 늘 그대로인 할머니의 흔적이 나는 좋기만 했다. 엄마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걸까. 젊은 시절의 할머니와 어린 시절의 엄마는 바다를 보며 무슨 말을 나누었을지 문득 궁금했다.
“내가 끝까지 허락 안 하면?”
“하나뿐인 딸이 반대하는데 어쩌겠어?”
엄마가 장난스럽게 웃었는데, 하필 바람이 불어서 엄마 얼굴이 머리카락에 가려졌다.

엄마가 유학을 포기해도 내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동안 엄마의 축 처진 어깨를 봐야 하고 언제 또 엄마가 떠날지 몰라 불안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유학을 가도 좋다고 하면 나는 2년 동안이나 엄마 없이 지내야 한다. 나에게는 너무 크고 어려운 문제였다. 어떤 대답을 해도 내 마음은 즐겁지 않을 테니까.
“내일까지 생각해 볼게.”
“어?”
“내일까지 생각하고 얘기해 준다고.”
말하자마자 팽 돌아서서 먼저 걸었다. 집에 도착해서 바로 화장실로 들어왔다. 거울 속 얼굴을 보았다. 그 안에 엄마가 있었다.
“할머니…….”
어디선가 할머니가 내 목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할머니한테 엄마 얘기를 하고 싶었다. 영원히 볼 수 없는 할머니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엄마는 마루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바다를 바라볼 때처럼 엄마는 별을 구경했고 나는 엄마 옆에서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뒤적거렸다. 머릿속에는 온통 다른 생각이 들어찼다. 엄마에게 유학을 가도 좋다고 말하라는 쪽과 끝까지 반대하라는 쪽이 모래 위 발자국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초저녁인데도 밖은 한밤중처럼 깜깜했다. 조용하기까지 해서 솔솔 잠이 왔다. 책을 내려놓고 팔에 얼굴을 묻었다.
“어른스럽다는 말, 정말 싫어?”
엄마가 나직이 물었다. 대답을 하려는데 웅얼거리기만 할 뿐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어깨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엄마의 손길이 가물가물 꿈결처럼 느껴졌다. 엄마 문제에 대해 아직 결정을 못 했는데 잠이 왔다. 밤을 새워서 생각해도 모자란데. 엄마를 이해해보려고 해도 거기에 자꾸 내가 나타났다. 엄마를 이해하려면 내가 엄마처럼 생각해야 되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눈을 비벼 떴다.

달빛 사이로 엄마가 보였다. 먼 곳을 바라보는 엄마가 옆에 있었다.
이은용(1975년생) 소설가,동화작가
청소년소설 『맹준열 외 8인』 『내일은 바게트』 『그 여름의 크리스마스』, 동화 『열세 번째 아이』 『어느 날 그 애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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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12-26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