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4일 밤, 경성 시내에 수백 장의 전단지가 뿌려졌다. 3월 5일 경성에서 벌어질 제2차 만세 시위의 시간과 장소를 알리는 전단지였다. 일제 치하에서 이렇게 위험한 내용을 담은 전단을 제작해서 배포한 사람은 과연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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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불 꺼진 승동교회에 청년들이 은밀히 모여들었다. 3월 1일 만세운동을 앞두고 열린 학생 지도부의 마지막 회의였다. 본래 학생들은 독자적으로 독립선언 발표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종교계 측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연대하기로 결정했다.
“학생 지도부가 경찰의 주목을 받아 체포되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소. 지도부는 3월 1일 집회에는 가능한 참여하지 않을 것이오.”
종교계 인사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문을 발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학생들은 벌써 그 이후를 준비하고 있었다.
학생 지도부 중 한 명인 강기덕은 제2차 만세운동을 대비하여 병원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병실을 방문한 학생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된다.
“민족대표가 파고다공원에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강기덕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인사동에 위치한 요릿집 태화관이었다. 강기덕은 그곳에 모인 민족대표들에게 물었다.
강기덕 : “장소를 바꾼 이유가 무엇입니까?”
민족대표 : “파고다공원에서 선언서를 발표하면 경찰이 현장에서 체포할 것이고, 학생과 군중이 그것을 보면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기에 장소를 바꾼 것이오."
“민족대표는 이곳으로 오지 않을 것이오. 허나 계획대로 집회를 진행하도록 하시오.”
강기덕은 이후 병원에 돌아가지 않고, 남산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 오르자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잠시 후 커다란 만세 함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학생과 시민들이 대열을 갖추고 행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두 달여 간 한반도를 함성으로 가득 채운 만세운동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앳된 청년이 밤새 골목을 뛰어다니며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채순병. 사립국어보급학교에 재학하던 16살의 청년이었다. 그는 주변 사람을 통해 3월 5일 시위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말하는 이마다 모이는 시간과 장소가 달랐다.
“이래서는 될 일도 안 될 거야. 사람들에게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알려줘야겠어.”
채순병은 하숙집에서 같이 지내던 학생들과 돈을 모아 종이를 사고, 등사기를 돌려 전단지 400여 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하숙할 만한 집들을 골라 전단지를 뿌렸다.
남대문역 앞 도로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오전 9시가 되자 군중 속에서 인력거가 등장했다. 인력거를 타고 있는 이는 ‘조선독립’이라고 쓰여 있는 깃발을 손에 든, 강기덕이었다.
군중들은 인력거를 앞세우고 행진을 시작했다. 그 수많은 사람 중에는 지난밤 수백 장의 전단지를 배포한 16살의 채순병도 있었다.
제2차 만세운동은 대성공이었다. 3월 1일보다 세 배 이상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했고, 그들의 함성이 온 시내를 흔들었다. 이후 만세 운동은 전국으로 확대되어 이어졌다.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두 달 동안 1,542회의 집회가 열렸고 총 202만 명이 참가했다. 이 중 4만 7천 명이 체포되었으며, 7,509명이 사망했다.
채순병은 3월 5일 ‘조선 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들고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1년 3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2년 학업을 계속하려고 일본으로 갔으나, 일본 경시청의 감시를 받았으며,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9살에 요절했다.
[참고도서] <만세열전> 조한성, 생각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