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작은동네> 10화

독자의 곁에 머물고 싶은 손보미 작가의 소설 제 10화독자의 곁에 머물고 싶은 손보미 작가의 소설 제 10화

그 당시, 우리 집을 기준으로 동네 안쪽으로 죽 걸어가다 보면 인가가 드물어지는 지역이 나오고,
거기에는 넓게 소나무밭이 조성되어 있었다. 웅장하게 잘 자란 소나무가 아마도 100그루는 있었던 것 같다.
소나무가 그런 식으로 자라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 걸까?
동네 사람들은 그 근처로는 잘 가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인적이 드물었지만 가끔 그곳이 시끄러워질 때가 있었다.
바로 굴삭기가 들어와서 소나무를 캐 가는 날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우리 집에서 가까운 다리가 우리 동네와 외부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좁은 다리로 굴삭기가 들어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 우리—그러니까 나와 내 또래 아이들—에게 굴삭기가 어디로 어떻게 들어왔다가 어디로 어떻게 나가는지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굴삭기가 소나무를 뽑아 간다는 사실이었다.
그 당시 우리들은 그 소나무에게 주인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고, 그런 식으로 나무가 자신이 태어난 땅을 떠나는 이유도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우리를 흥분시키는 건, 그런 식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그토록 단단해 보이던 땅이 파헤쳐질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연약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 키의 몇 배나 되는 뿌리 뽑힌 소나무가 밴드에 묶인 채 굴삭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걸 보고 있으면 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던 것 같다. 인부들이 소나무의 뿌리를 원추형으로 정리해서 목화 마대로 감싼 후 소나무 잎이 다치지 않도록 노끈으로 묶어서 트럭에 실을 때면, 나는 무력감과 이 세상에 뽑히지 않을 것이란 없으리라는 막연한 공포감을 느꼈던 것이다. 인부들은 우리에게 저리로 가버리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 말을 순순히 듣는 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 나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지만, 소나무를 뽑는 날만은 아무런 위화감 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애들은 소나무가 뽑힌 구덩이를 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나는 소리를 지르는 게 창피해서 그냥 소리를 지르는 척만 했다. 내가 애들이랑 어울리는 건 그때가 거의 유일했다. 하지만 그게 나를 특별히 쓸쓸하거나 외롭게 만드는 건 아니었고, 그 당시 나에게는 어머니나 옆집 개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게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건 명백한 거짓말일 것이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우리 동네에서 30분 넘게 걸어가야만 도착할 수 있었다. 그게 우리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초등학교였다. 동네에서 같은 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애가 나를 포함해서 세 명 있었고, 3학년에 다니는 언니가 두 명, 6학년 오빠가 한 명 있었다.

내 기억에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은 없었다. 틀린 기억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기억은 그렇다. 나를 제외한 두 명은 함께 걸어서 등하교를 했다. 때로는 3학년생이나 6학년생도 다 함께. 나도 그 애들과 함께 걸어서 등하교를 하고 싶었다. 혹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 시간 동안 그 애들과 나는 어떤 이야기—고물상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시내에서 외식할 때 내가 먹었던 음식이라든가, 우리 옆집 개에 대한—를 나눌 수 있을 터였다. 나는 그렇게만 한다면 그 애들과 절친한 사이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등하교를 했다. 매일 아침 버스 시간표를 미리 알아둔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버스 정류장에 나갔다. 얼마 기다리지 않으면 학교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나는 나중에 이런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버스 시간을 잘 맞출 수 있었던 어머니는 어째서 한 달에 한 번 우리 가족이 고물상으로 나들이를 나갈 때는 버스 시간표를 알아보지 않았던 것일까?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어머니의 설명은 간단했다.
“그때는 서두를 필요가 없었잖니. 기다리는 시간이 무척 좋았어.”

내가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고물상에 간 건, 여덟 살이 끝나갈 때의 일이다. 아직 본격적인 추위가 찾아오기 전 우리 가족은 고물상을 방문했고, 언제나 그랬듯이 아버지가 마치 특권이라도 부여한다는 듯이 “저기에 올라가봐라” 하고 이야기했을 때 나는 저울 앞에서 무작정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부모님은 내가 왜 우는지 알지 못했고 나 자신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아마도 그 저울에 적힌 숫자가 나의 성장을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지표라는 것 자체가 내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리라.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아버지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가 싫어하는 일을 강요하지는 않을 거다.”

그렇다고 한 달에 한 번 있었던 토요일의 가족 외출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고물상 대신 시내에 있는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봤다.
주로 디즈니에서 만든 만화영화들이었다. 나는 금방 고물상 같은 건 잊어버렸고, 만화영화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고물상에는 아버지가 혼자 따로 시간을 내서 다녀오곤 했는데 그게 좀 귀찮으셨는지, 그 후로 우리 집 마당 한구석에 노끈으로 묶어놓은 신문 다발이 몇 개씩이나 쌓여 있는 걸 종종 볼 수 있었다. 내가 신문을 읽는 걸 부모님이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가끔 부모님 몰래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서 노끈으로 묶인 신문들을 들쳐보곤 했다. 등교 시간에 버스를 탄다고 해서 학교에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버스를 타도 걸어가는 것과 비슷한 시간이 필요했다. 버스는 우리 동네와 옆 동네의 구석구석을 돌았기 때문이다. 가끔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면 동네 아이들과 언니 오빠들이 함께 학교에 가기 위해 우리를 지나쳐 갈 때가 있었다.

그 애들은 우리 엄마에게는 인사를 했지만 나에게는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버스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가끔 내게 자리를 양보해주는 아주머니나 아저씨가 있었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사양했다.

“우리 딸 다리는 엄청 튼튼해요.”

어머니는 내 가방을 들고 있다가 버스에서 내리면 다시 내 어깨에 가방을 들려주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10분 정도 더 걸어가면 초등학교 교문이 나왔다. 어머니는 그 교문을 지나 나와 함께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건물 앞 현관까지 걸어갔다. 현관에 다다르면 그제야 어머니는 내 손을 놓아줬다. 내가 신발주머니에서 실내화를 갈아 신고 내 신발을 신발주머니에 집어넣는 동안 나는 내 뒤에 서 있는 어머니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알기로 아버지는 그 사실—어머니가 내 등하굣길을 함께한다는—을 몰랐다. 사실, 입학 초기에는 나처럼 어머니와 등교하는 애들이 여럿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런 애들조차도 혼자, 혹은 친구들과 함께 등하교하기 시작했다.

가끔 학교 수업이 끝나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은 후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다가 저 멀리 어머니의 모습을 내가 먼저 발견할 때가 있었다. 어머니의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낯설어 보였다. 어머니를 둘러싼 어떤 기운 같은 것이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어머니는 청바지와 스웨터를 입고, 굵은 웨이브를 넣은 머리카락은 뒤로 묶은 채 문구점에 걸려 있는 연예인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부채나 사진 같은 걸 들쳐보고 있었다.

그 순간 어머니는 나나 아버지와는 완전히 분리된 그저, 한 명의 여성이었다. 그럴 때가 종종 있었다. 이를테면 영화에 빠져 있는 어머니의 옆모습을 볼 때, 책이나 신문을 읽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걸 볼 때도 어머니는 내게 그런 느낌을 주었다. 어머니는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건 나와 아버지로 이루어진 세상이 아니라, 온갖 일들—멋지고 근사한 일들과 추악하고 불경한 일들—로 이루어진 세상이었다. 어머니는 책과 뉴스, 신문 들을 통해 그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빠삭하게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런 갈망을 가지고 있던 그 여성은 교문 밖에 서 있다가 나를 발견하기만 하면, 순식간에 내가 속한 세계로 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무언가 안도하는 듯한 표정, 혹은 감사하는 듯한 표정이 지나갔다. 마치 언제 어디서고, 부지불식간에 나에게 무슨 커다란 불행이 닥칠 수라도 있는 것처럼.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바로 어머니의 방식이었다. 자기 자신을 조금씩 조금씩 밀어붙여서 낭떠러지 끝에 서게 한 다음, 그 아래를 바라보면서 아찔함을 느끼고, 동시에 아직은 안전하다고 안심하는 그런 방식 말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한평생 그렇게 걱정 속에 휩싸여서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에 나는 친구들을 좀 사귀었다. 그 애들은 학교 가까이, 시내 중심부에 사는 애들이었다. 나는 그 애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최선을 다했다. 고무줄놀이를 할 때나, 숨바꼭질을 할 때나, 얼음땡 같은 게임을 할 때에 나는 언제나 술래를 하겠다고 자청했다.

애들과 친분을 쌓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 애들은 수업이 끝난 후에 자기들끼리 어울려서 놀이터에 놀러 가고, 문방구에도 들르며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야 했다. 2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친구를 사귀기 위해 다른 방법도 쓸 수 있었다.

내 기억에 아버지가 처음으로 출장을 떠난 건, 내가 아홉 살 봄의 일이다. 명절 연휴 때 어머니와 나만 집에 남아 있는 경험을 하긴 했지만, 그 기간은 길어봤자 사흘 정도였다. 아버지의 출장은 짧으면 5일이었고, 길면 열흘을 넘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명절 때와는 사뭇 어머니의 분위기가 달랐다. 어머니는 그 시기 동안 휴가를 얻은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음식을 만드는 데 소홀하지도 않았고, 내게 티브이 프로그램을 계속 볼 수 있는 특권을 주지도 않았다. 어머니에게서는 그 어떤 절박함, 외로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아버지는 명절 연휴 때보다 훨씬 더 큰, 바퀴가 달린 가방을 가지고 떠났고 돌아올 때는 가방 말고도 비닐 백들이 여러 개 들려 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가방에서 빨랫감을 꺼내 세탁기에 집어넣고, 아버지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면 우리 가족은 부엌과 통하는 방에 모여 앉았다. 아버지는 잔뜩 기대에 찬 눈으로 어머니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고,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 앉았구나.”
아버지가 주렁주렁 가지고 온 비닐 백을 뜯는 건 언제나 어머니의 몫이었다.

“자, 아빠가 이번엔 뭘 사 오셨는지 볼까?”
아버지는 출장 간 도시와 관련된 기념품, 그리고 어머니와 내 선물을 한 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내 생각에 어머니는 선물보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걸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먼 곳으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경험에 대해, 혹은 사진이나 책으로만 봤던 장소에 대해 누군가로부터 직접 듣는 것 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이국에 대한 관심을 마음껏 표현했다. 어머니가 비행기를 처음 탄 건, 10년 전쯤,
그러니까 내가 20대 중반의 일이다.우리는 방콕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내가 예상한 것만큼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여권을 발급받으러 갔을 때 어머니는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남들과 교류를 잘하지 않을지언정 어디에 가서 주눅이 드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나는 정반대였다. 나는 남들과 교류하는 걸 싫어하진 않았지만, 언제나 어느 정도는 주눅이 들어 있었다.

“좋지 않으세요? 항상 비행기를 타고 싶어 했잖아요.”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내가 묻자,

어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하고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내가? 아, 아니야, 내가 바란 건 그런 게 아니었단다. 네가 잘못 안 거야.”

그 당시 출장에서 돌아온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걸, 나는 어머니만큼 좋아하지는 않았다. 나는 아직 너무 어렸고, 내 자신이 조금만 더 나이를 먹게 된다면,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으리라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설명은 언제나—무엇과 비교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덜 생생한 것이었다.

내가 기다린 건 아버지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버지의 선물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사다 준 색연필이나, 초콜릿, 노트 같은 걸 잘 챙겨두었다가 같은 반 애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걸 나눠 주는 건, 내가 술래가 될게,라는 말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에게 덜 타격을 입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술래가 될게”라고 말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런 물건들을 나눠 주는 건 뭐랄까, 비굴한 일이었다.

그 당시 나는 용기를 내는 일이나 비굴함을 감수하는 그 모든 일에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내가 언제까지나 그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열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더 이상 용기를 낼 필요도, 비굴해질 필요도 없었다. 무언가가 달라진 것이다.

  • 손보미 소설가
  • 〃 작가소개 〃

    손보미소설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 21세기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담요」가 당선 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그들에게 린디합을』,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이 있다. 2012년 젊은작가상 대상, 2013~2015년 젊은작가상에 선정되었으며, 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 제21회 김준성문학상, 제25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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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2-25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