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작은동네> 9화

독자의 곁에 머물고 싶은 손보미 작가의 소설 제 9화독자의 곁에 머물고 싶은 손보미 작가의 소설 제 9화

나는 아버지에게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절박하지도 않았고, 혹시라도 그렇게 보일까 봐 걱정이 되어서 덧붙였다. 
“충분히 고민해보세요. 저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해도 괜찮으니까요.”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는 전화기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는데, 방금 전 내 말에 아버지가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조차 잘 기억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 아버지의 행동—어머니의 장례식 이후로 그토록 끈질기게 연락을 했으면서
이제 와서 자신은 나와 이야기를 하는 걸 한 번도 원한 적이 없는 사람처럼 구는 것—때문에 나는 기분이 약간 상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애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나는 좀 놀랐다.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이 버려진 전화기를 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여자애는 교복 차림—겨울방학이 벌써 끝난 걸까?—이었는데, 코트는 걸치지 않았고, 스커트 아래로 살구색 스타킹만 신은 종아리가 보였다. 그리고 버클 부분에 화려한 구슬 장식이 달려 있는 미들 굽의 메리 제인 슈즈를 신고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저런 구두는 금지였다. 검정색 단화와 운동화, 그게 우리에게 허용된 전부였다.
물론 몰래 저런 구두를 신고 다니는 애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런 애들 속에 속한 적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조차 없었다. 애들은 나를 ‘영감’이라고 불렀다. 악의가 있는 건 아니었고 그냥 재미로 그런 것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수학여행에서 새벽에 애들은 숙소에 모여 앉아 불을 다 끈 후 휴대전화 불빛에 의지해서 각자 숨겨 온 술을 꺼내놓고 마셨다.
나는 거기에 앉아 있긴 했지만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었다.

“쟤는 영감이라서 그래.” 누군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저렇게 화려한 구두를 사달라고 어머니에게 말했다면 어머니는 뭐라고 했을까? 어머니는 허락했을까? 어머니는 내가 어릴 적 우리 가족이 함께 외출을 할 때마다 화려한 노란색 시폰 원피스와 하이힐을 신었었다. 아마 그건 어머니가 더 젊었던 시절 즐겨 입었던 옷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옷은 점점 어머니의 옷장에서 사라지고, 결국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나는 부스 바깥에 선 채로 여자애의 구두를 다시 한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여자애가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건 열흘 후였다. 아버지는 지금 자신이 경주에 살고 있는데, 2월 초에 서울에 올라갈 일이 있으리라고 말했다.
“저녁때 잠깐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같이 저녁 식사 하실래요? 제 남편이랑 같이요.”
“네 남편이랑 말이냐?” 아버지가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며칠 후, 나는 도심에 있는 이탈리안 식당의 4인실 룸을 예약했다. 잠들기 전, 화장대 앞에 앉아서 머리를 빗고 있을 때, 남편이 물었다.
“그런 고급 식당을 예약할 정도로 아버지와 만나는 게 당신에게 중요한 일이야?
정작 당신 아버지가 만나자고 할 땐 코웃음도 안 쳤잖아. 대체 뭐가 변한 거야?”

남편은 자신의 충고가 내게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진행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아버지를 만나기로 한 날, 나는 아침부터 수선을 좀 부렸다. 남색 울 원피스와 낙타색 캐시미어 코트를 꺼내 입었고, 미용실에 가야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건 너무 과한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내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약간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와 떨어져 산 이후로 나는 한 번도 아버지의 부재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그래. ”남편이 말했다
남편과 내가 집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눈이 금방 그치리라고 말했다. “일기예보에 눈이 온다는 말이 없었다고.”
하지만 눈은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다행히도 커다란 눈송이는 지상에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
간선도로를 달린 후 시내로 나오자, 도로에는 차들이 꽉 막혀 있었다. 나와 남편은 도시 한복판에서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교통사고가 난 모양인데.”
남편이 말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약속 시간까지는 15분 정도 남아 있었다.
“나 내려서 전철을 탈게.”
남편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까지 해? 좀 늦어도 괜찮아. 늦게 가도 아무런 문제도 안 생겨.”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나는 20여 년 만에 아버지를, 나와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것도 내 쪽에서 요청해서. 나는 아버지에게 어떤 다른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3차선 도로 위에 서 있던 자동차에서 내렸다.
남편이 내게 뭐라고 떠들고 있었지만 나는 그걸 무시하고 겅중겅중 뛰어서 도로를 가로질렀다. 굽이 있는 부츠가 눈길에 미끄러질까 봐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걸어야만 했다. 전철역 안에 들어간 나는 장갑을 벗어서 겨드랑이에 낀 채로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얼굴을 닦아내고, 립스틱을 꺼내 덧발랐다. 전철 역사 안에도, 플랫폼 안에도, 전철 안에도 사람이 너무 많았다. 전철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내게 앞 좌석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괜찮은 거냐고 질문했는데 그제야 나는 내가 계속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내게 자리를 양보해주겠다고 했다.

“괜찮아요. 저는 아주 건강해요.” 나는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하며 대답했다.

식당은 도심의 건물 꼭대기에 있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식당 룸으로 들어가자 아버지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약속 시간에서 이미 20분이나 지난 후였다.

“네가 안 오는 줄 알아서 주문을 해야 할지 나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약간 볼멘소리로 말했다.

나는 사과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 이렇게만 대답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남편 차에서 중간에 내려서 전철을 타고 왔어요.”

“그랬구나.”

방금 전까지의 볼멘 목소리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갑자기 아버지는 모든 걸 이해하겠다는 듯이, 마치 이 모임의 주선자가 자기 자신이라도 된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하지만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주문을 끝낸 아버지와 나는 마주 보고 앉아서, 식전 빵을 뜯어 올리브오일에 찍어 먹었고, 잠시 후 나온 양파 수프와 염소 치즈 테린이 올라간 샐러드를 먹는 데 열중했다. 그다음으로 나온 비프 타르타르를 올린 바게트를 한입 물었을 때, 아버지가 나를 보며 말했다.

“좋아 보이는구나.”

아버지는 냅킨으로 입가를 한 번 닦은 후 내려놓았다. 나는 비프 타르타르를 보고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두 분이 헤어지신 후 만난 적이 있는지 전혀 몰랐어요. 어머니는 한 번도 아버지—나는 이 단어를 발음할 때 약간 창피한 기분이 들었고 그런 기분이 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약간 비참해졌다—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거든요.” “재밌구나, 네 엄마도 네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거든.”

아버지는 나를 상처 주고 싶은 걸까? 아버지는 낡아서 색이 약간 바랜 녹색 스웨터를 입고 그 안에는 체크무늬 셔츠를 착용하고 있었다. 머리는 하얗게 세어 있었는데, 염색을 따로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렸을 적 봤던 아버지의 얼굴을 완벽하게 떠올릴 수는 없었지만—어머니와 내가 가지고 있던 앨범에서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아버지의 얼굴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떤 종류의 익숙함을 느끼고 있었다.

“결혼사진까지 다 가지고 가셨죠?”
“뭐라고?”
“어머니가 말해줬어요.
아버지가 본인 사진은 다 가지고 가버렸다고요. 그래서 심지어는 어머니 당신 결혼사진이 한 장도 남아 있지 않다고요.”
“딱 세 번 만났다.”

아버지가 대답했다. 이번에는 내가 되물었다.

“뭐라고요?”
“네 엄마하고는 딱 세 번 만났다. 그렇게 즐거운 만남도 아니었다. 네가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네 엄마 말로는 네가 좋은 남자와 결혼을 했다고 하더구나.”

“제 결혼식은 완벽했어요. 전혀 문제가 없었어요.”
나는 비프 타르타르를 한 숟갈 떠서 입으로 넣고 씹으면서 대답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나를 만나자고 한 거냐?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냐?”
그런 질문을 받자, 나는 약간 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아버지는 왜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 저에게 계속 연락을 하셨어요?”
“나는 10년 전에 재혼했다. 지금의 아내가 전남편 사이에서 데리고 온 애들이 두 명 있고, 우리 둘 사이에도 애가 한 명 있어.”
여기까지 말한 후 아버지는 내 얼굴을 한 번 바라보았다. 나는 아버지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서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의 아내? 자식들? 그런 이야기를 왜 한단 말인가?

“행복하시겠네요.”
아버지는 냅킨으로 한 번 더 입을 닦은 후 말했다.

“내 아내는 진정한 행복은 신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말하지.”
“그 말을 믿으세요?”
“모르겠다. 그냥…… 우리는 일요일마다 교회에 간단다.”

어머니도 나도 종교를 가진 적이 없었다. 심지어 어머니는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한 번도 신에게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럴 필요가 뭐가 있니.”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시겠네요?”
“설명하기 복잡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해야겠지.”
“지옥에 가는 사람도 있고요?”

아버지는 포크를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교회에 다니시니까 천국에 가시겠네요? 저는 교회에 안 다니니까 지옥에 갈 거구요. 아마 어머니도 지옥에 갔겠네요.”
“너랑 이런 이야기, 하고 싶진 않다.”
“예전에 우리가 살던 그 동네 말이에요. 그 동네에 불이 나서 엄청 많은 사람들이 죽었잖아요. 그럼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버지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완전히 어리둥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게 무슨 말이냐?”
“그 동네에서 제가 태어나기 전에 불이 났었잖아요.”
“누가 그런 말을 했냐?”
“엄마가요.”
“네 엄마가?”
“제가 일곱 살 때, 이야기해주셨어요. 그때 오빠가 죽었다고.”
“네 엄마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거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몸을 테이블 쪽으로 바짝 붙였다. 이윽고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은 없었다. 불이 난 적은 없어.”

아버지는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네 엄마는 너에게 거짓말을 한 거야.”

  • 손보미 소설가
  • 〃 작가소개 〃

    손보미소설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 21세기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담요」가 당선 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그들에게 린디합을』,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이 있다. 2012년 젊은작가상 대상, 2013~2015년 젊은작가상에 선정되었으며, 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 제21회 김준성문학상, 제25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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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2-25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