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작은동네> 제8화

독자의 곁에 머물고 싶은 손보미 작가의 소설독자의 곁에 머물고 싶은 손보미 작가의 소설

이상한 일이지만, 내가 엄마 몰래 할머니 집을 방문한 후로도 1년 정도가 지났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 문제로 다퉜다. 그러니까 내가 할머니의 장례식에 갔어야 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할머니의 장례식에 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되었는데도 두 분은 그 문제 때문에 다퉜다. 어머니는 내가 제일 먼저 애도해야 하는 죽음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생판 남의 죽음인 걸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어머니가 말하는 의미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다음 나온 아버지의 말이 어머니에게 엄청난 타격을 줬다는 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게 누구의 죽음이어야 하는데? 당신의 죽음?”

나는 아버지의 이 말을 완전히 잊고 있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아버지의 말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가까운 가족의 죽음을 애도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어머니 말마따나 이 하늘 아래 나의 혈육이라고는 어머니밖에 없었으니까.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든다.

한 명의 사람이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몇 번의 애도가 필요한 걸까?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서른 중반쯤—들은 평균적으로 몇 번이나 가까운 친척의 죽음을 겪었을까?

문득 한 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어머니와 내가 서울로 이사 온 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봤던 때.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맞이한 추석 연휴였다. 티브이에서 예전처럼 자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해주지 않은 탓도 있었고, 서울로 이사를 온 후 마음 놓고 연휴를 즐길 처지가 못 되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한동안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 신문 편성표에서 영화 제목을 발견한 어머니는 그날 밤, 거실의 불을 끄고, 좁고 낡은 패브릭 소재의 소파에 앉아서 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나는 어머니 곁에 앉았다. 연휴가 끝나면 곧 중간고사를 봐야 했지만, 이번에는 끝까지 어머니 곁에서 영화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릴 적처럼 중간에 곯아떨어질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날 영화를 보다가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대체 이 영화를 왜 좋아하는 걸까?라는 궁금증이 나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스칼렛 오하라 같은 여성과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내가 생각한 어머니의 삶이 스칼렛 오하라만큼 다이내믹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어머니와 스칼렛 오하라는 삶의 지향점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었다. 내가 스칼렛 오하라 같은 삶—그렇게 떠들썩하고, 화려한, 혹은 굴곡진—을 산다고 했다면 어머니는 분명히 반대했을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스칼렛 오하라의 딸이 말을 타다 떨어져 죽는 장면이 나왔을 때, 나는 문득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언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오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오빠가 떠오른 것이다.
어머니는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그저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장면은 어머니에게 평범한 관람객 정도의 정서적 충격 이상은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 어머니를 거실에 남겨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는 내가 풀고 있던 수학 문제집이 펼쳐져 있었다. 그게 나의 일상이었다. 내 일상 속에는 어쩔 수 없이 오빠의 흔적이 있었다. 물론 내가 끊임없이 오빠의 존재를 느끼고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건 깨닫는 것에 가까웠다. 갑자기 불시에 아무런 징조도 없이 내가 내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처럼, 나는 불시에 오빠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리고 오빠의 존재는 그런 식으로 내가 한 번씩 떠올릴 때마다 내 일상 속으로 빠르게 흡수되어갔다.

그날 밤, 거실에서 들려오는 영화의 대사들을 무시하며 수학 문제를 풀려고 노력하던 나는, 역시 아주 오랜만에 누렁이를 떠올렸다. 혹은, 그 동네의 개들을. 혹은 그 동네의 좁은 길과 낮은 지붕들을 떠올렸다. 나는 어쩌면 내 자신이 어머니에게 일종의 ‘누렁이’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오빠의 대체재였을 뿐이라고. 그래서 어머니에게 다른 개는 필요하지 않았던 거라고. 지금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세상에는 그런 이야기들—자식이 죽은—이 너무 많다. 심지어는 아이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도 모르는 경우도.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이야기들에 익숙해져야만 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이 삶,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

아버지를 만난 건, 내가 밤중에 남편을 깨워서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하고도 한 달 정도가 지난 후, 그러니까 2월 첫째 주 토요일의 일이다. 새해가 되자, 남편은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빠졌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정성 들여 면도를 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옷차림을 한 채, 스크랩에 열중하다가 출근을 했다. 나에게도 겨울 계획이 있었다. 겨울방학 동안 친구에게 넘겨받은 일본어 동화책을 번역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아침마다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그가 미처 치우지 못한 잡지와 신문 쪼가리를 정리한 후, 남편의 서재에 들어가 앉아서 일을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나는 좀처럼 동화책 번역에 집중하지 못하다가 결국 남편의 서재에 있는 스크랩북을 읽는 데 열중하곤 했다. 남편이 스크랩북에 따로 번호를 붙여두거나 시간 순으로 정리를 해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읽은 것들은 시간 순도 아니었고, 어떤 다른 기준도 없었다.
나중에는 내가 읽은 기사들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이 되어버렸고, 때때로는 비슷한 잘못들이 이 세계에서 너무 자주 반복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편과 내가 같이 저녁 식사를 하는 일도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가끔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남편은 내게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던 결심이 그대로인지 물어보곤 했다.
남편이 내 아버지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남편은 처음에는 이렇게만 말했다.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야. 당신이 바보같이 또 상처를 받을까 봐 그래.”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와 나를 떠났을 때, 다른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것처럼 상처를 받은 건 아니었다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떠난 후, 조금 시간이 흐르자 나는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죄책감이 너무 커서 나는 다른 식으로는 그 일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지는 않았다. 다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병실 침대에 앉아 있었다. 침대 상판에 등을 기댄 채로, 환자복 위에 고동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이가 들어도 머리카락을 항상 쇄골 부근까지 길렀다. 나중에 항암 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질 때도, 어머니는 모자 같은 걸 쓰지 않았다. 머플러 같은 거로 머리카락이 빠진 머리통을 가리지도 않았다. 어머니에게, 아버지와 이혼한 게 내 탓인 거 같아서 미안했다고, 항상 죄책감을 느꼈다고 말하자 어머니는 약간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어머니는 이윽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몇 번이나 입술을 들썩거렸지만 결국은 그만두었다. 그냥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을 뿐이다. 나는 어머니가 내게 무슨 말이든 해준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 당시에는 내 자신이 듣기를 원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그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아니야, 그건 네 탓이 아니야.”

나는 이 말을 듣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그 말을 해주지 않았다.
남편은 아버지를 만나는 문제에 대해 계속 나를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상처’ 운운이 먹히지 않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생각을 좀 해봐,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당신에게 연락 한 번 안 한 분이야.
그런데 갑자기 연락을 했을 땐,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지 않아?”

나는 그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아버지를 만나는 게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쩌면 남편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관계가 한 명 더 늘어나는 게 불편하다고 느꼈던 건지도 모른다. 세상에, 가족이라니. (다시 한번 반복하자면) 어머니는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이 하늘 아래 혈육이라고는 어머니와 나밖에 없다고 했지만, 생각해보면 세상엔 핏줄이 섞이지 않은 가족 같은 그런 관계도 있었다.

내가 윤이소와 그녀의 매니저 부부를 보며 그들이 가족 같다고 여긴 것처럼. 하지만 남편의 그런 우려는 쓸데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계속해서 내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내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내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지만 그런 일이 반복되자, 아버지가 일부러 내 전화를 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몇 달 전의 아버지와 나의 처지가 뒤바뀐 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남편에게 그런 이야기 역시 하지는 않았다.급한 일이 생겼다며 남편이 출근한 어느 일요일 오후에 나는 거실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문득, 어머니가 이 집에 처음 방문했던 날을 떠올렸다. 나와 남편이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며칠이 지난 후였다.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던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이제 좀 안심이 된다.”

뭐가 안심이 되느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너의 인생이.”

그 대답을 들었을 때,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발코니로 나가보았다. 2월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나는 무언가를 견디는 사람처럼 두 손으로 난간을 잡은 채 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한 부부가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남자는 양복 위에 두꺼운 모직 코트를 걸치고 있었고, 여자도 롱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외투 아래로 한복 치맛단과 굽이 높은 꽃신이 보였다.

저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저들이 갑자기 어떤 위험에 처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아닌가? 저들이 어떤 위험에 처하기를 바랐던 걸까? 나는 그들이 올라탄 차가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무언가를 해야 해. 나는 외투를 걸친 후 아버지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와 지갑을 들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공중전화를 찾을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아파트 단지 안을 조금만 걸으면 찾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아무리 걸어도 공중전화 부스가 보이지 않아서 나는 아파트 바깥으로, 그리고 어디론가로 계속 정처 없이 걷기만 했다. 코끝이 발개지고 볼이 얼 때까지 걸어 다닌 후에야 나는 전철역 근처에서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부스 안에는 담배꽁초와 음료수 캔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고, 전화기에는 끈적끈적한 액체가 묻어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외투 끝자락으로 감싼 뒤 수화기를 잡은 채 동전을 넣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용케도 전화기는 작동되었다.

계속해서 코를 훌쩍이며 수화기 너머 연결음을 듣던 나는
갑자기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서 수화기를 내려놓을 뻔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내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했고,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 후에는 어리둥절해했다.
이런 상황은 꿈에서도 고려해본 적이 없다는 듯이.
나는 아버지에게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 손보미 소설가
  • 〃 작가소개 〃

    손보미소설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 21세기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담요」가 당선 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그들에게 린디합을』,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이 있다. 2012년 젊은작가상 대상, 2013~2015년 젊은작가상에 선정되었으며, 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 제21회 김준성문학상, 제25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 작가 소개 프로필 사진 저작권: ⓒ이천희
  • 본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 본 콘텐츠는 사전 동의 없이 상업적 무단복제와 수정, 캡처 후 배포 도용을 절대 금합니다.
작성일
2019-01-22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