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칸 영화제<각본상><남우주연상>, 타임즈<올해의 범죄소설> 수상

원작 대 영화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원작 대 영화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파격이 아니다. 대단한 독창성이나 기발한 상상력을 동원한 것도 아니다.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차이는 강박이나 작위가 아닌 작가와 감독이 가지고 있는 스타일이다. 스릴러란 장르가 가진 타성에서 조금 벗어났고, 그것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조너선 에임즈의 소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짧고 간결하다. 스릴러이면서도 비틀거나,
독자들을 긴장시키려고 억지로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 않는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처럼 엄청난 음모나 반전도 없다. 단편소설처럼 한 사람, 한 가지 사건을 향해 머뭇거리지 않고 빠르게 직진한다. 그 한 사람은 미 해병대 출신에 FBI의 성매매전담반에서도 한때 일한 적이 있는 주인공 조이다. 그는 지금은 혼자서 의뢰인에게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거나 사람을 구해주는 청부업자이다.

그가 무슨 연유로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과거 직업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소설은 그보다는 그의 내면심리에 집중한다.

원작 대 영화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컷 1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흔히 이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죄의식이나 세상에 대한 터무니없는 적개심, 아니면 정의감이나 복수심에 대한 분석이 아니다. 사이코패스의 왜곡된 피해망상도 아니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 어른이 되어서는 전쟁과 범죄현장에서 목격한 끔찍한 폭력과 죽음으로 찾아온 그의 트라우마이다.

이쯤 되면 그가 우연히 어떤 인물과 사건을 만나면서 그 트라우마로 분노와 집념에 사로잡혀, 무자비하고 자학적인 폭력에 빠져들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것이 정의든 아니든. 장르의 법칙이 그랬으니까. 『너는 여기에 없었다』라고 그 예상을 완전히 비껴가지는 않는다. 상원의원인 보토의 부탁으로 열세 살 난 딸 니나를 성매매업소에서 구하는 일이 그에게 맡겨진다. 매사에 준비가 철저한 그로서는 간단한 일이다. 빠르고 빈틈없는 행동과 자신이 애용하는 망치로 방해물들을 간단히 때려눕히고 소녀를 데리고 나온다. 예기치 못한 충돌이나 시행착오는 없다.

원작 대 영화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컷 2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소설은 그의 행동을 과장하고 비틀지 않는다. 현장에 피를 질펀하게 흘리지도 않는다. 독자들이 더듬거리는 사이 짧고 빠른 문장과 단어들로 지나간다. “조는 그자를 향해 전력질주하며 망치를 꺼냈다. 망치를 들고 쏜살같이 달려드는 조의 모습에 깜짝 놀란 경비는 총을 찾아 옷을 더듬거렸고, 그 사이에 조는 그자를 덮쳤다. 망치로 순식간에 경비의 얼굴과 목, 등 중앙까지 내리쳤다. (…) 이 집에 들어온 지 불과 10초도 안 되어 벌어진 일이었다.”

말도 없다. 비명이나 고함도 없다. 피 한 방울 보이지 않는다. 마치 단거리 선수가 트랙을 달리는 것과 같은 모습을 아무런 동요 없이 냉정하게 묘사한다. 그 자극적인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거나 자랑하기 위해 시간을 일부러 늘리거나, 느리게 돌리거나, 마구 반복하지 않는다. 서늘하고 잔인하다. 냉정한 것은 주인공 조가 아니라, 작가 조너선 에임즈이다.

그는 조의 일과 그것을 위한 폭력과 살인에 어떤 정의나 죄의식, 어떤 감정도 부여하지 않는다. 조는 일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이 그냥 돈을 받고 고용된 해결사이다. 그런 그의 살인과 폭력에 특별한 의미나 가치를 부여할 생각이 없다. 만약 그것에 어떤 기준을 들이댔다면 훨씬 많은 시간을 사건 속에서 보냈을 것이고, 소설의 부피도 커졌을 것이다. 물론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도 범죄 스릴러물의 전형인 선악은 있다. 정치적 야욕에 눈이 멀어 어린 딸을 성매매의 지옥에 빠뜨린 아버지, 그런 폐륜을 저지르도록 유혹한 비열하고 잔인한 범죄 집단, 의도하지 않게 그들과 얽힌 조의 응징과 복수.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니다.

조너선 에임즈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한 인간의 내면심리이다. 조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끔찍한 학대와 전쟁과 수사현장에서 목격한 주검들이 남긴 트라우마로 삶의 가치를 느끼지 못해 “밤이 되면 수면제를 입에 욱여넣고 검은 비닐봉지로 머리를 겹겹이 싼 뒤 강력 접착테이프로 목을 빙빙 둘러” 자살을 시도하는, “괜찮아, 그냥 가면 돼. 넌 원래 여기 없던 거야”라는 환청을 듣는 피폐한 중년남자이다. 특이하다면 그 자신도 폭력을 행사하는, 그것도 망치로 사람을 죽이는 청부업자라는 것이다.

원작 대 영화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컷 3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소설은 과거 환영에 사로잡힌 그의 내면을 이해하고 동정하지 않는다. 그의 행동과 내면 사이에 연결고리를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냥 이런 남자가 이런 일을 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치매증상을 가진 늙은 어머니, 일을 소개해주던 사람, 연락책이었던 야채가게 주인과 10대인 그의 아들이 살해당하고, 자신마저 죽을 위험에 처하자 복수를 시작한다. 추악한 패륜을 저지른 한 아버지(보토)를 죽이는 것에서부터.

복수의 시작이 소설의 끝이다. 조는 소설의 끝에서 자살의 꿈조차 잠시 접은 채 소녀를 다시 데려간 범죄 집단을 응징하겠다고 예고한다. 이를 위해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그를 “아버지에게 제대로 된 복수를 해본 적이 없는, 분노로 가득 찬 소년”으로 돌아가게 했다. “조와 같은 아이에게 꼭 필요했던 복수. 물론 필요한 게 늘 복수였던 건 아니다. 때때로 그건 정의였다”고 말한다. 그의 이런 변화는 어디에서 왔을까. 니나에게서 조는 무엇을 보고 느꼈기에 이렇게 된 것일까.

그 답은 영국 여성감독 린 램지의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 있다. 리나의 모습에서 조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봤다. 숫자를 세며 성적 학대를 견뎌내는 소녀는 아버지의 폭력이 끝날 때까지 숫자를 세던 소년 조였다. 그런 니나를 구원하는 일이야말로 곧 자신을 구원하는 일이다. 6년 전, 램지의 영화 <케빈에 대하여>에서 아버지와 어린 여동생을 죽이고 학교에서 끔찍한 총기난사사건을 일으킨 아들로 트라우마를 겪는 어머니처럼.

영화는 더 많은 시간, 더 자주 조(호아킨 피닉스 분)의 내면을 조각조각 들여다보면서 그것을 니나(예카테리나 삼소노프 분)의 모습과 교차시킨다. 그 과거의 환영이 너무나 짧고 어지럽고, 몽환적이어서 불친절하지만 정서적 불안정과 혼란스러운 내면을 이어주고 둘 사이에 동질성을 갖게 한다. 잘게 쪼갠 가늘고 날카로운 비트의 음악, 처음에는 뜬금없게 들리지만 점차 가사가 의미 있게 다가오는 샬린의 노래 「I've Never Been to Me」도 그 어울림에 가세한다.

이런 비슷한 영화는 이전에도 있었다. <레옹>이 그랬다. 둘의 차이라면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상업성을 의식한 폭력과 액션의 시각적 과잉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이다. 끔찍한 살인과 폭력을 이야기하면서도 유혈이 낭자한 자극적 액션이 없다. 조가 성매매업소에서 행한 무자비한 폭력조차 탈색과 음소거의 흑백 CCTV 화면으로 담아 자극을 지웠다. 원작보다 더 상징적이다. 원작보다 훨씬 더 탈장르적이고, 탈관습적이다.

원작 대 영화 - 너는 여기에 없었다 포스터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대신 조의 심리와 정서적 연결고리에 더 집중한다. 소설에 없는 것들을 집어넣고, 소설과 다른 선택을 하고, 소설과 다른 과감한 결말을 만든다. 반백의 뚱뚱한 조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늙은 보안관의 다른 모습이다. 그런 그가 어머니의 시신을 안고 강물 속으로 들어가 자살을 시도하자 니나가 숫자를 세면서 환영으로 나타난다. 니나는 어머니를 대신한 존재이자, 구원의 대상인 동시에 구원자이다. 이런 모습과 관계, 새로운 시작을 위해 영화는 소설과 달리 조와 니나를 서로 떨어지게 하지 않고, 복수를 남겨놓지도 않고,다음 이야기를 기약하지도 않는다.

어린 시절 조와 달리, 소설과 달리 아버지에게 직접 잔인한 복수를 한 니나와 역시 소설과 달리 여전히 자살의 환영과 충동에 사로잡혀있는 조가 카페에 앉아 대화를 한다. “우리 어디로 가요?” “글쎄 네가 원하는 곳 어디든, 어디로 가고 싶어?” “모르겠어요.” “나도 모르겠어.” 그래도 그들은 무작정 밖으로 나간다. 그들에게는 오늘이 “아름다운 날”의 시작이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은 여기에 없다. 누가 구원자이고, 구원을 받아야 할 자인가도 의미가 없다. 이런 동질감과 교감, 관계가 소설이 원하는 답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이대현_영화평론가. 1959년생저서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열일곱, 영화로 세상을 보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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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1-31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