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소설 <헛간을 태우다>와 영화 <버닝>

원작 대 영화 소설 헛간을 태우다 와 영화 버닝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원작 대 영화 소설 헛간을 태우다 와 영화 버닝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일단 이런 의문부터 든다. 하고많은 그의 소설 중에서 왜 「헛간을 태우다」일까. 아직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은, 다른 유명 작품도 수두룩한데. 무라카미 하루키 스스로 고백했듯이 ‘헛간을 태우다’라는 말에서 착안해, 그것이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 제목인줄도 모른 채 35년 전 어느 날 마음 편히 쓴 35쪽의 짧고 낯선 단편. 극적인 반전이나 마무리를 위한 멋진 착지가 없다. 좋게 말해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는 열린 소설.

「헛간을 태우다」는 서른한 살의 유부남인 주인공(작가)이 ‘아는 사람 결혼 피로연에서 만난’ 스무 살의 여자, 그녀의 애인인 미스터리한 인물과 함께 보낸 시간들과 그 속에서 일어난 에피소드이다.

특별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여자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긴 했지만, 그것으로 이야기도 끝난다. 더 이상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고, 어떤 설명도 없다.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지지도 않는다. 성기고 밋밋하고 찜찜하다.

그런데 하루키는 ‘내 작품을 말한다’에서 “나는 때때로 이렇게 엄청나게 섬뜩한 소설을 써보고 싶어진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헛간을 태우다」는 은유(메타포)와 상상이 가득한 섬뜩한 미스터리로 다가온다. 35년 전에도, 수필 같은 단편을 쓸 때에도 하루키는 소설가였구나.

원작 대 영화 소설 헛간을 태우다 와 영화 버닝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이창동 감독이 이 소설을 영화 <버닝>의 원작으로 선택한 이유 역시 무심하고 어설픈 듯하지만 그 안에 ‘섬뜩함’을, 한걸음 나아가 그 섬뜩함에서 ‘과거’가 아닌 ‘현재’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소설의 숨은 은유와 상징들을 자신만의 이야기와 상상력, 영상언어로 얼마든지 바꾸고 채울 수 있다는 자신감 또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영화 <밀양>으로 만든 것처럼.

그런 느낌과 자신감이 없었다면, 이창동 감독이 「헛간을 태우다」에 주목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쉽게 영화화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소설의 미스터리를 요즘 젊은이들의 이야기로 확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이창동 역시 지금은 영상으로 이야기를 하지만, 소설가였다. 그것도 몸서리 쳐질 만큼 집요하고 섬세하게 세상과 인간을 파고드는. 작가의 명성이나 인기에 편승해 원작에 의지할 감독이 아님은 삼척동자도 안다.

원작 대 영화 소설 헛간을 태우다 와 영화 버닝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이창동의 영화는 언어만 소설과 다를 뿐, 어떤 이야기에서도 현실을 외면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의 영화는 결코 편안하거나 달콤하지 않다. 쉽게 흘려버릴 수도 없다. 곳곳에 펼쳐놓은 은유와 상징들이 머리와 가슴을 붙잡고, 가상의 이야기로 현실을 더욱 생생하게 떠올리고 돌아보게 만든다.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오랫동안 가슴에 머무는 이유이다.

이창동 감독은 수수께끼(미스터리)가 「헛간을 태우다」의 매력이라고 했지만, 그가 소설에서 발견한 진짜 매력은 같은 젊은이면서 서로 다른 현실, 그 현실에 대한 각자의 인식, 그리고 그것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낸 남자의 ‘헛간(영화에서는 비닐하우스)을 태운다’는 행위이다. 그 ‘헛간 태우기’만은 소설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소설에서 “두 달에 한 번쯤 남의 헛간을 태운다”는 남자는 “세상에는 헛간이 얼마든지 있고, 그것들은 모두 내가 태워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어떤 헛간이건 15분이면 깨끗하게 태워버릴 수 있으며, 마치 처음부터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아무도 슬퍼하지 않고 그저 사라질 뿐이라고.

“저는 판단 같은 거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남자는 그것을 비에 비유한다. “비가 온다. 강이 넘친다. 무언가가 떠내려간다. 비가 판단을 합니까”라고. 그는 자신이 절대 비도덕적인 것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의 존재와 행위, 그리고 인식이 과장되고 극단적이며 비현실적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창동 감독은 그것으로 35년이 지난 일본 소설을 ‘현재, 대한민국’으로 끌고 온다.

원작 대 영화 소설 헛간을 태우다 와 영화 버닝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영화 <버닝>은 주인공 이종수(유아인)과 여자 해미(전종서)를 같은 나이의 고향 동창으로, 해미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남자 벤(스티븐 연)을 연상으로 바꾼다. 벤은 직업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서울 강남의 부유층, 종수는 가난한 작가 지망생의 유통회사 알바생이다. 소설에는 없는 ‘또라이’ 농사꾼인 종수의 아버지도 등장시킨다. 그런 다음 그들의 관계와 모습, 살을 보탠 이야기로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을, 그 위에서 벌어지는 ‘차이와 다름’의 비극성을 드러낸다.

소설도, 영화도 ‘헛간(비닐하우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실제로 남자가 그것을 태웠는지 이야기해 주지는 않는다. 독자와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그러나 아무리 상상은 자유라지만 남자가 최근에도 아주 가까이에서 태웠다고 하는 것이 ‘헛간(비닐하우스)’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차이라면 소설은 그 어떤 암시나 추리의 근거를 남기지 않았다면, 영화는 감독이 자신의 상상력으로, 추리와 스릴러의 맛을 살려 그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버닝>이 ‘단정’을 하지는 않는다. 해미의 ‘귤껍질 까기’ 팬터마임처럼 상상(거짓)과 현실(진실)조차 명확히 구분하지 않은 채 여전히 열린 결말, 미스터리한 이야기로 남긴다. 영화의 많은 것들이 그렇다. 어릴 적 고향집 옆에 있는 우물에 빠진 적이 있다는 해미의 기억도 진실인지 아닌지 분명히 말해주지 않는다. 고양이의 존재, 심지어 해미의 행방불명에 대한 진실여부까지도.

「헛간을 태우다」는 은유를 통해 한 인간의 행동양식에 대한 섬뜩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버닝>은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감독의 말대로 은유를 더욱 확장하고 변주해 그 섬뜩함을 사회적 상황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을 위해 영화는 청년실업 뉴스, 종수 아버지의 낡은 트럭, 어머니의 가출, 축산 공무원을 위협해 구속된 아버지, 벤의 호화로운 집과 친구들의 모임과 대화를 더했다.

벤은 대한민국에는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의 구분이 없어진 부자들, 뭐하는지 모르는데 돈은 많은 수수께끼 같은 많은 젊은 사람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재미만 있으면 뭐든지 해버리고, 슬픈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기에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

그리고 영화는 그 반대편에 미래를, 꿈을 잃어버린 지금 대한민국의 청년의 상징으로 종수를 세웠다. 소설가가 되고 싶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는 목표와 방향을 잃은 채 하루하루 희망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해미가 있다. 겉으로는 알바(내레이터 모델) 생활이 자유로워서 좋다고 하지만, 삶의 의미에 굶주린 진짜 배고픈 그녀는 아무런 존재가치가 없어 어느 날 석양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원작 대 영화 - 버닝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버닝>은 소설에서 끝까지 해미에 대한 두 남자의 모호한 정서와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존재가치를 분명히 설정한다. 종수에게 그녀는 ‘사랑’이고, 벤에게 그녀는 사라져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은 존재인 ‘태워지길 기다리는 헛간’이라고. <버닝>은 부정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말한 적도, 보여준 적도 없다고. 아니면 벤이 마지막 종수를 만나면서 “해미 어디 있어요. 같이 안 왔어요”라고 말한 것을 가지고 그것은 당신의 상상에 불과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은 엉뚱한 단정이 아니다. 종수가 벤을 칼로 찔러 죽인 후, 자신의 옷과 시신을 그의 고급 외제차와 함께 불태워버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직접 살해 장면은 보여주지 않았지만 영화는 벤의 화장실 서랍에서 발견된 종수가 해미에게 선물한 손목시계, 새로 만난 여자에게 보인 벤의 말과 행동의 반복, 벤의 집에 있는 해미의 고양이 등으로 스스로 충분하고 명백한 추리를 했다.

의외다. 수많은 은유와 상징들로 가득 채웠지만 누구나 쉽게 예상한 결말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감독이 만든 상상력이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소설의 ‘무심함’과 ‘포기’보다 상상력을 축소시켰다. 어쩌면 영화가 만든 모든 상상과 은유가 그럴지도 모른다. 자유의 자기 함정, 상상력의 자기 함정.

이대현_영화평론가. 1959년생저서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열일곱, 영화로 세상을 보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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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10-0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