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작은동네> 제4화

독자의 곁에 머물고 싶은 손보미 작가의 소설 작은동네4화독자의 곁에 머물고 싶은 손보미 작가의 소설 작은동네4화

‘폐쇄’라는 표현은 너무 과장된 것 같지만, ‘외따로 떨어졌다’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50가구 정도가 모여 사는 동네 초입에는 수심은 그리 깊지 않지만 너비는 꽤 넓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 위로는 어른 세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다리 하나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동네 뒤쪽으로는 넓은 소나무 숲이 있었다. 좁은 다리가 끝나는 지점부터 우리 집까지—우리 집은 그 동네에서 다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는 좁은 길이 이어져 있고 길가에는 볼품없고 오래된 관목이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었다.

동네에 있는 어떤 집들은 어디서부터가 사유지이고 어디서부터가 공유지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 담장이나 대문이 없는 집들. 그런 집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집 근처 땅에 그냥 마구잡이로 작물을 재배했다. 가끔씩 그 문제로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 거기에 사는 성인 남자들은 새벽마다 다른 사람—땅 부자들—의 논밭으로 출근을 했다. 내가 알기로 시내로 출근 하는 건 우리 아버지밖에 없었다. 출퇴근 시간이 꽤 길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 들어와야만 했다. 나중에 서울로 이사를 왔을 때 나는 그런 환경에서 자란 또래의 친구들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고 약간 충격을 받았다. 대학 시절에도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을 만날 수가 없어서 내 어릴 적 이야기를 하면 친구들은 의심 반 농담 반으로 내게 묻곤 했다.

“너 대체 몇 년 생이야?”

나는 웃어넘겼지만, 그럴 때마다 어린 시절, 그 작은 동네에서 살던 아이들이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건지 궁금해지곤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나를 ‘벽돌집 딸’이라고 불렀는데, 당연히, 거기에는 비꼬는 감정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정확한 표현은 아니었고, 굳이 찾는다면, ‘벽돌 담장 집’ 정도가 더 적당했을 것이다. 우리 집에는 그 마을에서는 드물게도 공유지와 사유지를 완전히 분리하기 위한 담장과 대문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거로도 모자라서 인부를 불러 담장 위로 벽돌을 몇 칸 더 쌓아올리게 했던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거나 하는 일은 드물었다. 동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걔네는 나랑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고, 좀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나를 싫어했다. 아마도 거기엔 우리 어머니의 약간 별난 태도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 동네에 사는 다른 집 아주머니들과 어울려서 고추나 마늘 같은 걸 다듬거나, 시간이 남을 때 다른 집에 놀러가서 수다를 떨거나 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런 시간에 어머니는 책을 읽거나, 혹은 내게 읽어줬다.

“책에는 모든 세계가 다 들어 있어. 사람들을 만날 필요조차 없을 정도야.”

아버지가 그런 어머니의 태도를 비난할 때가 있었다.

“여보, 당신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거야.”

나는 그게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는 몰랐지만 그 문장 중에서 ‘부스럼’이 나와 관련 있다는 사실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어머니는 걱정이 많았다. 사실 어머니의 평생이 그랬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나는 어머니가 그런 계통의 병원에 가거나 상담 같은 걸 받아보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유년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는 가끔 그런 게 궁금해지곤 했다.

그토록 걱정이 많았던 어머니가 어떻게 자신이 살고 있던 고향과 가족을 그런 식으로 대범하게 떠날 수 있었던 걸까?

어머니의 걱정거리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뭐라고 콕 짚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나는 어머니의 관심이 언제나 나의 안전에 쏠려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나를 지나치게 과보호한다고 질책하듯 말했지만, 그래도 두 분의 의견이 하나로 좁혀질 때도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 부모님은 매일 거의 빠짐없이 뉴스를 챙겨 보았고, 거의 모든 종류의 신문을 구독했다. 아버지는 그 모든 신문을 다 챙겨 보지는 못했고, 어머니는 집안일을 하는 틈틈이 그 신문들을 정독했는데—어머니는 병에 걸리기 직전까지 언제나 거의 모든 신문을 챙겨 보았다—내가 그 신문들을 보면 안 된다는 것에는 두 분이 완전히 동의한 상태였다. 신문에 실린 세상의 끔찍한 일들을 내가 읽는 게—혹은 사진을 보는 게—부적절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으리라. 월말이 되면 한 달 동안 쌓인 신문을 고물상에 가져다주곤 했는데 나는 고물상에 가는 게 좋았다. 특별한 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일요일에는 고물상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이 되면 일찍 퇴근한 아버지가 노끈으로 싼 종이 뭉치를 들었고 어머니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계절 중 봄을 좋아했는데, 왜냐하면 어머니가 그 계절에 가장 아름답게 차려입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스커트 부분에 자잘한 주름이 나 있는 시폰 재질의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후 허리띠로 허리를 졸라매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다. 내게는 초록색 재킷과 스커트를 입혀주고 하얀색 면 스타킹과 끈이 달린 구두를 신겨주었다. 그 동네에 그런 옷을 가진 아이는 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고물상에 간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그들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운이 좋으면 20분 정도, 운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면 30분 정도, 운이 나쁘면 40분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여섯 살 때부터 글을 읽을 수 있었고, 거기에 얌전하게 서서 맨 위에 올려진 신문의 헤드라인을 몰래 읽곤 했다.

작은동네4화

아버지의 단골 고물상은 시내에 있는 시장의 안쪽에 있었고 밖에서 보면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엄청나게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휴대용 랜턴, 확성기 등등이 올려진 선반으로 가득 찬 사무실을 지나 뒷마당으로 나가면 한쪽에는 거대한 종이산과 고철산이 있었고 그 옆 공간에는 납작하고 널찍한 초록색 철판이 있었다. 거기에 갈 때마다 아버지는 마치 내게 굉장한 특권이라도 부여하는 것처럼 말했다.

“저기로 가봐라.”

철판은 고물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었다. 철판 위에 고물을 올리면 그 옆에 있는 작은 전광판에 숫자가 찍히는 식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에 익숙하지 못해서 언제나 쭈뼛거렸다. 부모님은 저울에 찍히는 숫자를 지켜봤고 심지어는 중년의 고물상 주인 부부도 그랬다. 그들은 어떤 숫자가 나오던 간에 박수를 쳐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성장하고 있었고, 나는 내가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일어나는 일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흐뭇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라곤 했다. 하지만 내가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건, 고물상에서 키우는 삽살개 때문이었다. 나는 개를 만질 수도 있었고, 밥을 줄 수도 있었고, 심지어는 안아줄 수도 있었다. 개의 냄새와 감촉은 우리 가족이 시내에 있는 경양식 집에서 식사를 할 때까지도 남아 있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그리고 그날 밤에 잠들 때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고 나면 며칠 동안은 그 보들보들하고 작은 생명체를 안았던 경험 때문에 나는 약간 미칠 지경이 되었고, 동네를 배회하는 작은 개들—대부분이 토종 믹스견이었고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그리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을 마주칠 때마다 집으로 데려오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아빠에게 물어보렴.”

그 당시 우리 집은 현대식과—어머니 말마따나—구식이 미묘하게 섞여 있었다. 대문을 통과하면 조그만 마당이 나오고 슬레이트 지붕 건물이 나온다. 실내로 통하는 불투명한 여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사각형의 마루가 있는데 여닫이문 맞은편에는 내 방과 화장실이, 오른쪽 면과 왼쪽 면에는 각각 방이 위치하고 있었다. 부엌은 건물의 왼쪽에 별도로 붙어 있었는데, 부엌에는 문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마당과 통하는 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부엌과 바로 통하는 방에 달려 있는 쪽문이었다. 부엌과 바로 통하는 방을 우리 가족은 식당 방이라고 불렀다. 소파나 식탁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티브이가 있어서 우리 가족은 그 방에 모여서 밥상을 펴놓고 밥을 먹거나 티브이를 보았다.

나는 어머니가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동안 식당 방에서 놀곤 했다. 흑백 티브이에서 해주는 만화영화를 볼 때도 있었고, 혼자서 공기놀이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방에 큰 상을 펴주면, 쪽문 옆에 앉아 있다가 어머니가 건네주는 밑반찬 같은 걸 상 위로 갖다 두었다. 밥상은 편백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나무의 결이 그대로 살아 있었고 코를 대면 나무 냄새가 났다.

“결혼할 때 엄마가 사온 거란다.”

어머니는 상에 기스가 날까 봐 애지중지했고, 젖은 행주와 마른 행주로 번갈아가며 정성 들여 닦곤 했다.

내가 어느 날 식당 방의 쪽문에 기대앉아서 결국 개를 키우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치자, 어머니는 마늘을 다듬던 손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아빠에게 물어보렴.

나는 어머니가 반쯤은 허락을 하는 거라고, 그저 내 의지를 시험해보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나는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면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아홉 시도 지난 시간이었고, 부모님은 그날 밤 나 때문에 9시 뉴스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손을 씻으며, 어머니에게 왜 아직 애를 재우지 않은 거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아버지의 저녁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가 상을 차리는 걸 도왔고, 상을 다 차린 후에는 어머니 옆에 앉아서 두 분이 식사하는 걸 한참이나 지켜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아빠, 우리 개 키우면 안 돼요?”

아버지는 무심하게 음식을 씹으면서 내게 물었다.

“개가 어디에 있는데?”
“길거리에요.”
“길거리?”
“길거리에 개가 엄청 많거든요 그런 개 중 한 마리를 우리 집에 데려오고 싶어요.”

나는 아버지의 대답을 기다렸다.

“안 돼.”

아버지는 단호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한 번 바라보았지만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이윽고 아버지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내 한쪽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내 어깨를 감싼 아버지의 손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넌 개를 데려와서 키우는 게 어떤 일인지 몰라. 무언가를 데려와서 키우는 건 정말 정말 어려운 일이거든. 말도 안 되게 어렵지.”

나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가련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라고 종지부를 찍어버렸다.

“아빠 말이 맞는 것 같구나.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두 분이 허락하지 않은 이상 나로서는 더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게 우리 집의 법칙이었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두 분의 말투와 표정은 부자연스러웠고, 뭔가를 공모하는 듯한 느낌, 그들의 세계에서 나를 제외하고자 하는 의도가 느껴졌다.

하지만 근본적인 불만도 있었다.

겨우 조그마한 개 한 마리 데려와서 키우는 게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라는 아버지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옆집—우리 집에서 거의 20미터 정도가 떨어져 있었지만—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키우는 개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할머니의 집은 사유지와 공유지가 딱히 구분되지 않은 형태로 집 앞 공터 한쪽에는 쓰레기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고, 바로 그 옆에는 상추나 파 같은 작물이 자라고 있었다. 낡은 기와지붕, 좁고 먼지 쌓인 툇마루에 방 하나. 그리고 구식 화장실. 툇마루 아래쪽에는 제법 모습을 갖춘 개집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개집에 황토색 개가 한 마리 살고 있었다. 나중에 나는 그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진도 믹스견이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눈이 약간 처져 있었고 언제나 입을 벌리고 있었다. 개는 비교적 얌전한 편이었고 잘 짖지도 않았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얌전한 게 아니라 그저 나이가 들었던 것 같다.

개는 줄에 묶여 있었다. 줄은 무척 길어서 개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데 문제가 없었다. 개는 공터에 심어져 있는 작물을 먹어버리거나 옆에 널브러져 있는 쓰레기를 파헤쳐놓곤 했지만 말썽을 피우려는 의도는 아닌 것 같았고 그저 습관에 가까웠다. 딱히 할머니도 그것 때문에 개를 혼내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 공터가 할머니네 사유지는 아니었지만 내가 그 집의 공터를 지나 툇마루 가까이, 개집 가까이로 가도 되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내 어머니라면 절대 허락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부모님께 개를 키우게 해달라는 요청을 거절당한 후 나는 옆집을 자주 어슬렁거렸다.

개집 가까이로는 다가가지도 못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나는 그런 배포가 없다.

  • 손보미 소설가
  • 〃 작가소개 〃

    손보미소설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 21세기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담요」가 당선 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그들에게 린디합을』,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이 있다. 2012년 젊은작가상 대상, 2013~2015년 젊은작가상에 선정되었으며, 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 제21회 김준성문학상, 제25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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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12-12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