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통신망을 이용하여 영상을 보시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네트워크 상황에 따라 재생이 원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동영상 재생이 안 될 경우 FAQ > 멀티미디어를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거장들이 찬미했던 무명의 남자,
라디셰프가 쓴 한 권의 책
“나는 오랫동안 민중에게 존경받을 것이다. 나의 시에 새로운 소리를 덧붙였으므로…내가 라디셰프를 따라 자유를 찬미했으므로…사랑을 노래했으므로…” - 푸시킨 (1799~1837)
세계적인 거장들이 찬미했던 무명의 남자, 알렉산드르 라디셰프(Aleksandr Radishchev). 그는 모스크바의 부유한 귀족 출신으로 엘리트 교육을 받은 후 무난하게 정부 관리가 됐고, 차근차근 승진도 하며 그야말로 평범한 인생을 살던 남자였다. 그런데 한 순간 그의 인생이 예상 궤도를 이탈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것도 다름 아닌 책 한 권 때문에 말이다. 1788년 말 그가 거의 완성시킨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은 겉으로 보기엔 잘 안 팔릴 것 같은 여행책 같았다. 그래서인지 이듬해 7월 경찰의 검열까지 아무 문제 없이 통과하는데, 문제는 책을 찍겠다고 나서는 인쇄업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라디셰프 나리, 제가 아무리 무식해도 이 책이 출간되면 나라 전체가 뒤집어질 거라는 것은 압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겉표지와는 달리 책의 내용은 18세기 후반 농노제와 전제 체제 하에서 고통받는 러시아 민중을 현실적으로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집 안에 작은 가내 인쇄소를 차려 650권을 인쇄했고, 그 중 한 권은 여왕이 이 책을 꼭 읽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의 최측근 시인에게 따로 보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
출간이 그에게 가져다 준 형벌
프랑스 대혁명 이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여왕의 심경은 그 어느 때보다 예민했다. 자신의 자리도 불안해질까봐 두려워하고 있던 찰나에 그녀의 손에 들어온 책, 그것이 바로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이었다.
“여봐라, 지금 당장 붉은 펜을 가져오라!”
여왕은 그 즉시 라디셰프의 책을 한 줄 한 줄 읽어 나갔고, 각 책장의 여백에 붉은 펜으로 자신의 생각을 조목조목 적어나갔다. 그리고 아주 낮은 음성으로 명령을 내린다.
“지금 당장 이 책을 쓴 놈을 산채로 붙잡아 내 앞으로 대령할 것이며, 인쇄한 모든 책을 반드시 찾아내 모조리 불사르라. 또한, 나 외에 이 책을 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야 할 것이다.”
1790년 6월 17일 긴급 체포 당한 라디셰프. 그로부터 사흘 후 그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로 압송된다. 그는 결국 사회의 안녕을 해치고 정부에 대한 존경을 폄하함으로써 백성들이 관리와 상사에게 분노와 불만을 품도록 선동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예카테리나나 2세를 분노하게 만든
라디셰프의 위험한 문장들
그런데 도대체 이 책의 어떤 내용이 한 인간의 목숨까지 위협하게 만든 것일까? 가장 대표적인 대목 몇 개를 소개하자면 ‘스파스카야 폴레스트’라는 제목의 글에는 이렇게 써있다.
“나는 꿈에서 대권을 쥔 왕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내린 은혜의 대부분이 부자, 신하, 정의를 배반한 악인, 살인자, 반역자, 사회질서를 파괴한 위험인물, 내게 아부하며 굽신거리는 사람, 그리고 수치를 모르는 여인의 차지가 되었다.”
여왕은 이 대목에 밑줄을 긋고 붉은 펜으로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작가의 사상이 악독하다. 다른 통치자들이 어떤 이득을 취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많은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 젖비린내 나는 아기가 할머니를 가르치려 들다니! 악인에겐 악한 대가가 있을 것이다.”
또한, ‘노프고로드’라는 장에서 라디셰프는 인간의 권리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 자체를 몹시 두려워하던 여왕은 여백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이것은 현재 프랑스를 몰락 위기로 빠뜨린 질문이다. 이 세상 모든 제도는 맹목적인 바람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중략) 이것은 역사적 요구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일 것이다.”
새로운 군주의 탄생,
새로운 세상을 향한 작은 희망을 품다
여왕은 라디셰프 재판이 있은 지 정확히 석 달 후에 마치 자비라도 베풀 듯이 형벌을 10년 유배형으로 경감시킨다. 그런데 그가 사형을 피해 배정된 유배지는 다름 아닌 당시 시베리아에서도 가장 황량한 곳으로 알려진 이림스크였다.
“여왕은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구나.”
그로부터 5년 1개월 후, 예카테리나 2세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후계자인 파벨 1세가 왕위에 올랐다. 다행히 새로운 왕은 자신의 어머니가 했던 모든 일을 혐오했고, 과거 그녀의 모든 명령을 철회시킨 덕에 라디셰프도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후 어렵게 시베리아를 빠져나온 라디셰프는 오직 자식 교육에만 매진했으며, 성격도 매우 겸손하고 온순해졌다.
정조는 그의 보고서를 받자마자 곧바로 10년째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함봉련을 석방하고, 김태명을 긴급 체포하여 사형에서 한 등급을 줄여 처리한 후, 함봉련에 대한 모든 문건을 불태우라 명령했다. 특히 함봉련에 대한 문서를 태우라 명한 것은 무죄를 받은 사람일 경우, 관청에 서류조차 남겨서는 안 된다는 굳은 의지의 표시였다.
사후 1세기 동안 금서로 지정된 그의 책,
부를 수 없었던 그의 이름
그는 러시아 개혁에 관해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적극적으로 민법을 입안하는 등 온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위원회의 최고 책임자 자바도프스키가 라디셰프를 따로 부른다.
“무슨 일이십니까? 자바도프스키 님.”
“자네 요즘 또 시베리아가 그리운가봐?”
“그게 무슨...”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예전과 같은 허튼소리를 또 늘어 놓으면 그땐 시베리아에 묻힐 각오 정도는 해야 할 거야. 알아 들어?”
권력이 아닌 국민의 편에선 법률을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던 그에게
내려진 또 한 번의 협박. 그는 시베리아에서의 유배생활은 견뎌냈으나, 내려진 또 한 번의 협박. 그는 시베리아에서의 유배생활은 견뎌냈으나, 이번만큼은 깊은 절망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1802년 9월 11일 라디셰프는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으며, 러시아 근현대사 최초의 자살이라는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라디셰프 사후 1세기 동안 그의 작품은 금서였으며,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조차 금지됐었다. 도대체 세상은 무엇이 그토록 두려웠던 것일까?
누구 하나 알아보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이 남긴 한 권의 책. 거기에 몇 세기가 지나도록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깊은 좌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꿈꾸는 처절한 갈망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금서에 담긴 그의 신념만큼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 · 본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 · 본 콘텐츠는 사전 동의 없이 상업적 무단복제와 수정, 캡처 후 배포 도용을 절대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