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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성에 대한 욕망을 정치적으로
당당하게 이용한 신라인들
약 1500년 전, 신라는 놀랍도록 야했다. 늙고 기력 없는 노인이 어린 소녀와 관계를 맺어 병을 치유하는 방중술(房中術),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색을 바쳐 정치적 후원자를 얻는 색공(色供) 등 성에 대한 욕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정치적 야망을 실현시키는 전략으로 당당하게 색을 이용했던 신라 사람들.
“이는 매우 야하다, 신라 시대에는 문란했다 등 지금의 기준이 아닌, 당시의 문화를 이해해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최한나 <한나의 역사 스캔들> 저자
과연 이들이 철저하게 깨버린 ‘성(性)’이란 금기는 스캔들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인 걸까?
대원신통 가문 출신의
미실을 둘러싼 끊임없는 성 스캔들
신라시대, 당시 신분이 높은 사람들에게 색을 바치는 색공은 든든한 정치 후원자를 얻기 위해선 필수적이었다. 심지어 색공을 전문적으로 바치는 ‘대원신통’이라는 가문도 있었는데,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한 미실의 집안이 바로 그것이다.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등 세 명의 왕을 노련하게 상대하며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미실.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은 진흥왕의 이복동생인 세종이었다. 그런데 진흥왕이 미실을 보고 첫 눈에 반하여 탐을 내자 세종은 결국 자신의 부인인 미실을 색공으로 바치게 된다. 이후 진흥왕은 마치 혼이라도 빼앗긴 듯 정신없이 미실에게 빠져들었고, 이를 보다 못한 태후들이 미실을 절로 내쫓았으나, 진흥왕이 직접 찾아가 다시 궁으로 데려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토록 뜨거웠던 진흥왕의 로맨스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진흥왕의 아들인 동륜태자와 미실 사이에 터진 성 스캔들이었다. 이미 신라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진흥왕과 그를 이어 장차 왕이 될 동륜태자. 미실은 이 부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불륜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는 법. 진흥왕은 나중에서야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차마 미실을 내치지 못하고 그녀를 다시 품어줬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김춘추에게
색공을 한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노인과 소녀, 아버지와 아들.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신라의 자유분방한 성 문화. 그런데 이보다 더 진하게 금기를 깬 스캔들이 또 하나 전해진다. 우리에겐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잘 알려진 김유신 장군. 그 역시 색공과 관련된 놀라운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다. 각종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을 정도로 신라의 군사권을 쥐락펴락했던 김유신이었지만, 그의 출신 성분은 가야에서 건너온 귀화 집안으로, 신라 진골 귀족사회에서는 영원한 비주류 집안에 불과했다. 이때, 정치적 야망으로 가득 찼던 김유신은 선덕여왕을 이모로 둔 김춘추를 눈여겨본다. 물론 김춘추 역시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진골 귀족들의 힘에 밀려 강제로 물러났기 때문에 비주류이긴 마찬가지였으나, 외교력과 정치력이 탁월한 김춘추와 군사력과 전략이 뛰어난 자신이 함께한다면 신라에서 막강한 세력이 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또한, 마치 하늘이 돕는 것처럼 김유신에겐 보희와 문희라는 아름다운 여동생들까지 있었으니,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김춘추에게 색공을 하느냐였다
“그 당시 신라사회는 색공을 바침으로써 자기 집안의 뒤를 봐준다거나 조금 더 출세를 할 수 있다던가 하는 식의 색공이 당연하게 이루어졌고, 김유신이 김춘추를 자기 사람으로 영입하기 위해서 축국을 하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고름을 뜯어요. 그래서 꿰매주겠다며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원래는 보희를 엮어주려고 했지만 보희가 그날 코피를 쏟는 바람에 문희가 꽃단장을 하고 옷고름을 꿰매러 들어가게 된 거죠. 그런데 옷고름을 풀어헤친 남자와 꽃단장한 여자가 만났으니 그 방에서 눈이 맞았고 둘이 결국 첫날밤을 치르게 되죠.” 최한나 <한나의 역사 스캔들> 저자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흔하게 일어난
신라의 근친혼과 색공 문화
결국 김유신의 계획대로 김춘추와 하룻밤을 보내고 임신까지 한 문희.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 바로 색공 이후 김춘추가 모든 연락을 끊어버린 것이다. 이에 화가 난 김유신은 김춘추에게 문희를 데려가지 않으면 불에 태워 죽이겠다고 협박했고, 실제로 문희를 장작더미 위에 세워두고 불을 지피려는 퍼포먼스까지 실행했다고 한다. 그제서야 뒤늦게 김유신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은 김춘추. 그런데 그는 도대체 왜 자신의 아이까지 임신한 문희를 모른 척 했던 걸까? 사실 김춘추에겐 이미 책임져야 할 조강지처가 있었고, 김유신 역시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색공이라는 계략을 쓴 것이었다. 그렇게 김유신이 문희를 통해 왕의 가까운 친척이 된 후 이번에는 김춘추가 김유신에게 색공을 하게 된다. 당시 김유신의 나이는 60대였는데, 당시 김춘추가 색공으로 바친 여인은 10대 소녀였다. 그리고 그 소녀는 바로 김춘추와 문희의 막내딸이었다.
“김춘추와 문희가 김유신의 환갑 기념 선물로 색공을 바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색공을 바쳤던 소녀가 바로 김춘추와 문희의 막내딸이었던 거예요. 김유신하고는 외삼촌과 조카 관계인 거죠. 사실 이런 근친혼은 신라 때에도 있었지만 고려 때에도 있었거든요. 서양에서도 있었고요. 왕족이나 자신들의 고귀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있었던 거고, 특히 신라시대에는 골품제 때문에, 성골과 성골이 결혼해야만 성골이 나오고, 성골하고 진골이 결혼하면 진골로 떨어지거든요. 성골을 유지하기 위해서 친척들끼리만, 고귀한 혈통끼리만 관계를 맺는 거죠.” 최한나 <한나의 역사 스캔들> 저자
끝없는 타락의 길로 접어든 신라,
천 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다
가장 높은 계급인 성스러운 성골, 그 다음이 진골, 그 아래 6개의 두품으로 신분이 나뉘는 신라의 골품제도. 신라가 탄생했을 때부터 멸망할 때까지 신라 사회를 유지했던 이 제도는 혈통이 높고 낮음에 따라 올라갈 수 있는 관직에 한계가 있었고 심지어 옷 색깔, 집의 규모, 가마의 크기마저도 세세하게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당대 최고 권력을 누렸던 진골 귀족들의 욕망은 끝이 없었던 것일까? 신라 780년 무렵부터 서로가 왕이 되기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고, 150년 동안 무려 20번이나 왕이 바뀌었지만, 백성을 돌보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재산과 땅을 불리며 자신들의 곳간을 채우기에만 급급했는데, 특히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른 890년 무렵에는 흉년까지 겹쳐 백성들의 삶이 더욱 피폐해졌다. 더 이상 왕을 믿지 않는 백성들이 여기저기서 민란을 일으키자 왕의 권력은 땅에 떨어졌고, 지방에서는 호족이라는 새로운 권력층이 떠오른다.
호족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견훤과 궁예는 자신들을 따르는 무리를 모아 각자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웠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근친이라는 비인간적인 방법까지 선택하면서 끝이 없는 타락의 길로 접어든 신라. 결국 새롭게 성장하는 두 나라 사이에서 점점 자신의 입지를 잃어간다. 이후 왕건이 타락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자 935년 신라의 경순왕은 아무런 저항 없이 고려에게 항복했고, 이로써 천 년을 이어온 신라가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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