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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까지 먹어봤습니까, 조선의 소고기 파티

얼마까지 먹어봤습니까, 조선의 소고기 파티얼마까지 먹어봤습니까, 조선의 소고기 파티

조선시대, 쇠고기는 금육(禁肉)이라고도 했습니다.
농기계도 농약도 없던 시절, 쟁기를 끌어 땅을 깊게 파고 무거운짐을 실어날라 농사일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소였습니다.
소가 없을 땐 8명이 간신히 쟁기를 갈아야 했으니 소가 몹시귀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는 그냥 소가 아니라 농우(農牛)라고 했고, 나라에서는 법으로 소를 함부로 잡지못하게 금지했습니다.
그럼에도 조선 사람들은 끊임없이 소를 잡아먹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조선시대에 소를 잡아야 했던 이유!


01 제사 문화

조선은 유교의 나라였고, 그래서 조상님을 위해
번듯한 제사상을 차리는 것은 몹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조상님을 위해! 사람들은 법을 어겨가면서도 몰래 소를 잡아 제사상에 올렸습니다.

조선시대에 소를 잡아야 했던 이유!

< 기산 풍속화 중 ‘초상 치르기’ >


02 교육

밥을 잘 먹어야 공부를 잘한다는 생각은 이전에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지금의 혜화동에 있는 성균관은 조선 최고의 명문학교였고,
조선시대의 미래를 짊어진 인재들을 위해 특별히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성균관 근처 반촌은 합법적으로 소를 잡아 고기를 팔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소를 잡아야 했던 이유!

03 맛

내일 당장 농사가 어떻게 되건,
불 위에서 기름 자르르하게 구워진 소고기 한 점이면 혀가 즐겁고 배가 부르기 마련.

양반들은 물론, 조선의 임금 정조마저도 추운 겨울날 화롯불에다가
고기를 구워 먹는 난로회를 몹시 좋아할 정도였으니까요.

결국 금지령이 무색하게 사람들은 꾸역꾸역 소를 잡아먹었고, 덕분에 조선의 소의 숫자는 꾸준히 늘어났습니다.
15세기 소의 숫자는 대략 3만 마리 정도로 추정되는데, 16세기에 40만 마리가 되고,
이것이 가파르게 늘어나서 17세기에는 100만 마리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조선시대에 소를 잡아야 했던 이유!

조선시대 푸줏간, 현방

1775년의 조선에서는 하루에 소 1000마리, 1년에 38만 마리꼴로 도축되었습니다.
이렇게 잡은 고기들은 푸줏간을 통해 팔렸습니다.

조선시대의 푸줏간은 고기를 주렁주렁 걸어놓아 현방이라고 했지요.
이런 현방은 서울은 물론 전국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푸줏간, 현방

이런 현방에서 나라에 바치는 세금을 현방속이라고 했는데, 수익이 몹시 짭짤했습니다.
이렇게 큰돈이 되었기에 지방의 관리들은 열심히 소 잡는데 열을 올렸고, 몰래 소를 잡아 고기를 팔기도 했습니다.

왕족들마저 여기에 뛰어들었으니, 정조의 동생 은언군이 소를 몰래 잡아 고기를 팔던 게 적발되어
정조가 몹시 부끄러워하기까지 했습니다.

소를 잡고 낸 세금인 현방속이 무려 1000% 가까이 증가할 정도였으니, 사람들이 얻은 이익은 더 막대할 겁니다!

조선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소고기를 먹었을까?

그럼 궁금해집니다. 조선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소고기를 먹었을까요?
대략 한우 한 마리 당 250kg의 고기를 얻을 수 있다고 하면 1년 동안 생산되는 고기는 9500만 kg!

당시 조선 인구를 1600만으로 추정하면, 1인당 5.6kg의 소고기가 돌아갑니다.

조선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소고기를 먹었을까?

게다가 소는 고기만 먹는 게 아닙니다.
뼈를 고아서 탕을 만들고 창자도 구워 먹고 머리는 삶아먹으며 소가죽의 안에 붙은 살점마저 긁어내어 먹습니다.
그러니까 금육이니 가난이니 해도, 조선은 의외로 소고기가 넘쳐나는 나라였던 겁니다.

물론 그때도 가난해서 밥 굶는 사람은 있었겠지만, 고기가 없어서 풀만 먹고 그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조선의 특별한 소고기 요리, 육개장!

18세기 조선은 일본에 매년 2만 장의 소가죽을 수출합니다.
당시 일본은 불교국가로 고기를 잘 먹지 않았지만 소가죽은 쓸모가 많은 중요한 물건이었고, 따라서 수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소가죽의 주요 생산지는 바로 경상감영이 있던 대구였습니다.

조선의 특별한 소고기 요리, 육개장!

수출량을 맞추기 위해서 조선시대의 대구에서는 하루에만도 50마리의 소가 가죽을 남기게 되었고,
가죽 말고도 고기도 남겼습니다.

하루에만도 1톤이 넘는 고기는 어쩌나요. 당연히 먹어야 했습니다.

냉장고도 트럭도 고속도로도 없던 시기이니 고기를 보관하는 대신 푹 끓이는 요리로 만들었으니 이게 바로 대구탕.
이후 이 요리가 한국전쟁을 통해 전국으로 퍼지면서 육개장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일본의 음식점에는 소고기탕을 대구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니,
이제 소가죽이 아닌 요리마저 일본으로 수출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로부터 전해진 소고기 사랑

여전히 사랑받는 소고기가 조선시대에도 일등 음식이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한끼 식사를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소고기,

오늘 저녁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소고기 한 점, 어떠세요?

굳세어라 대한민국
글 / 이한 작가

역사 이야기로 글 쓰고 책 쓰는 사람.
조선기담, 요리하는 조선남자, 조선왕조실톡(해설)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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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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