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대표적인 상업지구이자 최근에는 한국인보다 외국인 관광객이 더 많은 거리 명동.
화려한 네온사인과 K-POP이 울려 퍼지는 한류열풍의 중심 거리, 명동에도 유구한 역사의 흔적은 거리 곳곳에 남아있다.
이렇듯 화려한 명동 거리에 숨어있는 역사의 한 장면들을 한국사 전문가 최태성 작가의 안내와 함께 찾아보자.
동영상 재생이 안 될 경우 FAQ > 멀티미디어 를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명동은 원래 ‘명례방(明禮坊)’이라 불리던 조선시대 한성부의 한 행정구역이었다. 경복궁 남쪽에 위치해 있어 ‘남촌(南村)’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가난한 선비들이 모여 살던 조용한 주택가 동네였다. 그러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동네 이름에 일본 왕과 같은 ‘명(明)’이라는 글자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일본 왕의 이름을 딴 ‘메이지초’, 또는 ‘명치정(明治町)’이라 불리며, ‘혼마치’라 부르던 그 시절의 충무로와 함께 일본인들의 주요 거주지가 됐다. 해방 이후인 1946년에 들어서야 밝은 마을, 밝은 고을이라는 의미의 ‘명동(明洞)’으로 명칭을 변경했고, 그 이름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명동에 가면 제일 많이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은행인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으로 1897년 명동에 세워진 한성은행이 그 시작점이었다. 한성은행은 당시 최고의 상권을 자랑하던 종로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기 위해 현재의 명동 일대인 청계천 광교에 세워졌는데, 이런 현상은 일제강점기에도 그대로 이어져 동양척식 주식회사, 식산은행, 조선은행 등 일본의 금융기관들이 한성은행의 남쪽인 명동 부근에 줄줄이 자리를 잡게 된다. 이는 종로 상권은 물론, 당시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충무로, 을지로와 가까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에도 당시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은행과 증권거래소가 바로 명동 인근에 있었던 것도 이곳에 은행들을 모이게 한 중요한 이유라 하겠다.
‘모든 돈은 명동으로 모인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명동은 금융 1번가로서, 금융의 중심이자 사채시장의 본거지로 명성을 떨쳐왔다. 이렇게 엄청난 돈이 몰려있던 명동이 바뀌게 된 건 바로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부터였다. IMF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하게 되면서 명동의 금융시장은 함께 붕괴되고 말았다. 이때 많은 금융기관들이 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명동의 사채시장, 금융시장이 옛 명성을 조금씩 잃게 되었는데, 거기에 또 하나의 이유를 들자면, 현재 우리나라 ‘금융의 중심’ 여의도가 상대적으로 뜨기 시작하면서 명동의 오랜 금융 전성기는 서서히 저물게 되었다.
명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하나은행 앞에는 의열단원으로 활약한 나석주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20년, 나석주 의사는 당시 일제 경제 시스템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명동을 타격하기 위해 이곳에 나타난다. 현재 롯데백화점 본점 자리가 당시 일본 식산은행이 있던 자리인데, 나석주 의사는 이곳 문을 박차고 들어가 폭탄을 투하했지만 불발된다. 그는 다시 뛰쳐나와 토지조사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누리고 있었던 동양척식 주식회사를 향해 다시 한번 폭탄을 투척! 그러나 이번에도 실패에 그치고 만다. 결국 일본 경찰과 시가전을 벌인 끝에 자결한 나석주 의사의 정신을 되새겨볼 수 있는 곳 역시 명동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