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날 이후 일제는 치안이라는 명목 아래 민간인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은 물론, 학교 안에도 제복을 입고 칼을 찬 교사를 배치하며 공포가 교실을 지배하도록 했고,
나아가 조선인의 정신적, 문화적 독립성을 말살시키기 위해 우리나라의 교육과정 전반을 손보기에 이른다.
이처럼 일제의 폭력과 억압이 난무했던 시대, 우리는 어떻게 독립운동의 명맥을 이어가며 일제에 맞서 싸울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을 한국사 전문가 최태성 작가와 함께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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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당시 일제는 ‘조선 교육령’을 통해 조선인의 우민화 작업을 진행해 나가기에 이른다. 이 시기에 나라 안팎에서는 다시 나라를 되찾기 위한 항일 투쟁이 전개되는데, 국내에서는 주로 비밀 결사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국외에서는 이를 위한 준비 기지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항일 운동 과정에서 독립운동가들은 점차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한다.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억압적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이어질수록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건 오직 교육뿐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민족 독립 사상을 고취시키고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암울한 조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거라고 믿었다.
1911년 만주에서는 이상룡을 중심으로 이희영, 이시영,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호영 등 이씨 6형제와 대한제국군인 출신 애국지사들이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고, 만주를 영토로 하고 있는 중국의 양해를 얻기 위해 처음에는 신흥강습소라는 이름을 내걸었지만 실제 목적은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학교였다. 신흥이란 이름은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주도했던 일제 강점기 초기의 애국 비밀결사대인 신민회의 ‘신’과, 부흥을 의미하는 ‘흥’을 합쳐 만든 것이다.
1919년 이후 신흥무관학교는 본격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을 비롯한 수많은 항일 무장투쟁 운동가들이 바로 이곳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광복군 부사령관 출신의 약산 김원봉 선생을 비롯해 고려혁명군 장군이었던 김경천, 청산리대첩 지휘관 이범석과 김훈 등도 모두 신흥무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던 인물들이다.
한편, 북만주에 위치한 화룡현 명동촌에는 김약연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매입한 5만여 평의 땅에 한인촌을 개척하고 거기에 ‘명동학교’를 세웠는데, 이는 북간도에서 일제의 탄압으로 1907년 폐교되었던 ‘서전서숙’을 계승한 학교로, 토론과 강연 중심의 커리큘럼을 갖고 있었다. 시인 윤동주를 비롯해 또 다른 민족시인 송몽규와 흑백 무성영화 <아리랑>을 만든 춘사 나운규 역시 이 학교 출신이다. 개교 이래 1925년 폐교될 때까지 17년 동안 명동학교는 총 1천 명 이상의 독립투사들을 배출한 진정한 민족교육기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