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쉬인사이드

세계 미식의 꽃, 프랑스 와인과 요리

디쉬인사이드 :세계 미식의 꽃 프랑스 와인과 요리 in 영화 미드나잇 인파리
디쉬인사이드 :세계 미식의 꽃 프랑스 와인과 요리 in 영화 미드나잇 인파리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는 그가 지닌 여러 방면의 재주가 응축된 만년의 걸작으로, 여러 번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영화다.
그는 이 작품에서 도시 구석구석마다 자유와 예술혼이 넘쳐흘러 세계의 예술가들을 끌어 모으던 시절의 파리를 잘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졸부의 천박함을 드러내는 미국인들을 등장시켜 파리의 매력을 이해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이들을 대비하여 풍자하고 있다.

미국, 영국의 국빈 만찬 메뉴로도 사랑받는 프랑스 요리와 와인

이 영화에서 펼쳐지는 신기하고 매력적인 파리의 밤을 다루기 전에 이야기를 잠시 조선 말로 돌려본다. 1883년 9월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이 수행원을 데리고 ‘보빙사(報聘使)’라는 이름의 외교사절로 미국을 방문을 하게 된다. 이들 일행은 뉴욕에서 일주일간 산업 시찰도 하고, 업계 인사들도 만나는데, 하루는 방문한 대형 보험회사의 초대로 델모니코스(DelMonico’s)라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대접받는다. 이 레스토랑은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이름으로 200년 전통을 내세우며 영업을 하고 있다. 1883년 9월 18일자 <뉴욕 타임즈> 기사에 의하면, 보빙사 일행은 그런대로 식사를 잘했다고 한다(They eat ordinary fare in an ordinary manner).

이들이 어떤 메뉴를 대접받았는지는 기록에 나와있지 않지만, 비슷한 시기에 같은 식당에서 있었던 뉴욕상공회의소 주최의 만찬 메뉴를 코넬대학의 데이터 베이스에서 찾아낸 이가 있어 여기에 옮겨 본다(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주신 블로거 적륜 님께 감사드립니다). 사진에서 보듯이 메뉴가 전부 불어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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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찬바람이 부는 11월이니 Huitres, 즉 굴을 먹는다. 다음에 Potages, 수프는 두 가지로 셰비녜 스타일의 콘소메와 커리플라워 크림수프. 그 다음이 hors d’oeuvre, 오되브르인데, 요즈음에는 애피타이저, 스타터, 카나페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날은 레이니에 스타일의 Timbal, 즉 뗑발요리다. 그 다음이 poisson, 생선요리다. 글씨가 희미해서 잘 안 보이는데, 아마도 Escalopes de bass… 마세냐 스타일의 농어 커틀릿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다음이 filet de boeuf à la Conde. 뒷부분이 잘 보이지 않지만 filet de boeuf는 소고기 안심요리다. 그 다음 entrées 메인이 시작되는데, 오늘의 메인은 세 가지 중 선택이 가능하다. Dindonneauxà la Lyonnaise, 리용 스타일의 어린 칠면조 요리 그리고 Mignons de chevreuilà la... 역시 잘 안 보이는데 우사드 스타일의 사슴고기 안심요리쯤 될 것 같다. 그리고 Côtelettes de ris de veauà la... 따예이랑 스타일의 송아지 내장요리다.

잠깐 쉬어가며 입맛을 새로이 하라고 소르베, 그러니까 샤벳을 먹는다. 그리고 Rotis, 즉 구이다. 구이는 오리와 꿩 구이가 올라왔다. 그 다음에 콩요리, 그리고 나서 디저트 메뉴가 나온다. Pudding àl'imperatrice, 여왕폐하 스타일 푸딩이거나 geléeMacédoine, 마케도이나 스타일 젤리, 또는 벵갈식 Charlotte에서 선택이 가능하다. 그 뒤에 케익 그리고 아이스크림, 마지막으로 과일과 커피… 요리이름도 프랑스식이고 조리법도 철저히 프랑스식이다. 당시 미국 상류사회의 식사문화가 그랬던 것이다.

조선에서 간 보빙사 일행은 점심이었고, 여기 소개한 메뉴는 만찬이었으니 내용은 조금 달랐을 것이나 한 가지 틀림 없는 것이 있으니 조선사람들이 미국에 가서 미국사람들로부터 프랑스 요리를 대접받았고, 메뉴는 전부 불어로 씌어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실제로 미국 백악관에서 국빈만찬을 할 때, 프랑스 요리에 프랑스 와인을 내다가 캘리포니아 와인도 내기 시작한 게 불과 수십 년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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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파리의 예술가들 역시 프랑스산 와인과 샴페인을 마셨다

이제 이야기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로 다시 돌아간다. 주인공 길 펜더(오웬 윌슨)는 헐리우드에서 잘 팔리는 시나리오 작가인데, 순수문학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파리로 이주하여 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하지만 그의 약혼녀 이네즈(레이철 맥아담즈)는 베벌리 힐즈나 말리부 해변의 고급주택에서 헐리우드 상류층의 삶을 동경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단히 성공한 미국의 실업가이지만 길의 눈에는 천박한 졸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아버지 눈에는 사윗감이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으니 피장파장이다. 길과 이네즈는 기업매수를 위해 파리에 온 이네즈의 부모와 만나 저녁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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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즈의 아버지는 프랑스 요리나 이런 것들에 관심이 별로 없는 듯 하다. 시켜놓은 샴페인이 모엣샹동이다. 모엣샹동이 질 낮은 샴페인은 절대 아니지만 파리의 최고급 호텔 최고급 레스토랑에는 이보다 개성 있고 맛있는 각종 샴페인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는데, 굳이 그걸 시킨 것이다. 우디 앨런은 화면에 보이는 샴페인 하나로 극중 인물의 취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길이 이네즈의 부모가 참석한 와인 테이스팅을 보여줌으로써 그를 더욱 뚜렷하게 묘사한다. 이네즈의 부친은 호탕하게 웃으며 크게 말한다.

“나야 언제나 캘리포니아 와인을 마시지만 오늘은 나파밸리가 6천 마일이나 떨어져있으니!”

캘리포니아 와인에도 질 좋은 와인은 얼마든지 있다. 로버트 몬다비에서 만드는 오퍼스원도 그렇고, 소량생산을 하는 와이너리에서 나오는 와인 가운데 품평회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경우는 허다하다. 하지만 수백 년의 전통을 가지고 꾸준하게 명성을 이어온 프랑스 와인에는 아직 비길 바가 아니다. 특히 이 영화 속 와인 테이스팅에는 얼핏 스쳐 지나가서 눈치채기 힘들지만 샤토 오브리옹, 샤토 마고, 샤토 라피트, 샤토 디껨 등 명품 중의 명품이 즐비하게 나온다. 이런 걸 앞에다 두고 나파밸리가 멀어서 운운하는 것은 객기 아니면 치기에 다름 아니다. 유머를 잃지 않는 우디 앨런은 멀리 석양노을이 비친 에펠탑을 배경으로 파리의 전경이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장면에서도 유쾌한 풍자를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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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커다란 매력은 시간을 넘나들면서 활기찼던 1920년대의 파리와 그전 벨에포크 시대를 그리면서 스콧트와 젤다 피츠제럴드 부부, 헤밍웨이, 피카소, 달리, 장콕토 그리고 드가, 로트렉 등 전설적인 인물들을 만나는 데에 있다. 그런데 마시는 와인과 샴페인은 변함이 없다. 그게 바로 프랑스의 힘이 아닌가 한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와 <사이드 웨이즈>에 등장하는 프랑스 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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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영화는 부드러우면서도 관능적인 탱고 뮤직이 흐르며 시작한다(이 곡은 <여인의 향기>로 더욱 유명해진 ‘Por Una Cabeza’다). 독일군 장교들을 접대하면서 인맥을 관리하는 주인공 쉰들러(리암 니슨)의 수완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여기서 그는 ‘1928, 1929 라뚜르? 마고? 불고뉴는 어때? 1937년 로마네 꽁띠?’라고 말한다. 로마네 꽁띠는 요즘 싼 것도 한 병에 천 만 원이 넘고 희귀한 빈티지는 한 병에 수천 만 원을 호가하는 와인이다. 쉰들러가 독일군에게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가 이 한마디에도 담겨있다. 넣은 돈 이상으로 빼내는 것이 유능한 사업가이니 쉰들러가 아낌없이 최고급 와인을 마구 대접할 때에는 더 큰 속셈이 있는 게 당연하다. 미국, 영국뿐만 아니라 당시 적국이었던 독일에서도 프랑스 와인에 대한 동경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와인이 나오는 또 한편의 영화를 간단히 소개한다. <사이드 웨이즈>는 알렉산더 페인이 만든 영화로,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 지역 와이너리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블랙코미디 드라마다. 주인공 마일즈(폴 지아매티)와 잭(토머스 헤이든 처치)은 단짝 친구인데, 잭의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추억 만들기 여행을 떠난다. 전성기를 넘어서 내리막길을 걷는 배우인 잭은 마지막으로 로맨틱한 모험을 해보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안팔리는 작가 지망생인 마일즈는 자신감을 잃고 매사에 부정적인데다가 가벼운 우울증 증세까지 있다. 그런데 그는 와인에 대해서는 애정도 깊고 지식도 해박하다. 미각과 후각도 일반인보다 뛰어나서 와인에 관해서 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자부심도 있다. 영화에선 그가 이곳 저곳 와이너리를 방문하며 와인 테이스팅을 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실제로 흥행에서도 크게 성공한 이 영화는 캘리포니아 와인업계가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이 영화에서 마일즈가 저평가한 ‘멜로’ 품종 와인은 판매가 그 이후 몇 년간 줄었다는 보고서도 나왔다. 아무튼 이 영화의 백미는 그가 신주단지 모시듯이 모셔놓은 와인 1961년산 ‘슈발 블랑’을 마시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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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쌍떼밀리옹 지역의 그랑크뤼급 와인인 슈발 블랑에서도 빈티지 와인이니 틈틈이 소설을 쓰며 영어를 가르쳐 생계를 유지하는 그에게는 신주단지나 다름이 없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는데, 첫 번째 소설이 출판된다든지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으면 마시기 위해 고이 간직한 그 와인을 그는 결국 동네 햄버거집에서 플라스틱 커피잔에 따라 벌컥벌컥 마셔버리고 만다. 캘리포니아 와인을 좋아하는 애호가에게도 결국 정상은 프랑스 와인에 있다는 이야기가 상징하는 바는 크다.

뛰어난 조리법이나 식사예법이 발전하기 어려웠던 우리의 현실

이렇듯 프랑스 요리와 프랑스 와인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전 세계 미식계를 수백 년 동안 평정하여 왔다. 그리고 조리법과 함께 식사예법은 전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피폐해진 조선 말을 거쳐 일제 강점기를 보냈고, 이내 민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폐허 속에서 배를 주리며 어려운 살림을 살아내야 했고, 동시에 경제발전을 이루어야 했다. 아쉽지만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뛰어난 조리법이나 세계적으로 통용될만한 식사예법이 발전하기 어려웠던 것이 현실이다. 오랜 세월 부를 누리던 계급에서 식사와 요리문화를 이어받은 중국이나 에도시대에 꽃피운 서민문화에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개화기를 맞았던 일본의 경우와는 확연히 달랐던 것이다.

지난 수십 년 사이에 미국에서도 누벨퀴진 붐이 불고, 캘리포니아 퀴진느라는 새로운 장르가 생겨나고, 일본에서는 전통적 교토 요리를 바탕으로 하여 프랑스 요리를 가미한 새로운 퓨전이 생겨났다. 또 피자와 파스타라는 대중적 품목의 세계적 확산을 바탕으로, 이탈리안 파인 다이닝도 급속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스페인 요리도 타파스와 바르 문화가 퍼져나가면서 맹렬한 기세로 아시아에까지 진출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와인이나 스페인 리오하 지방 와인을 필두로 두 나라의 질 좋은 와인도 기여를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미식의 나라로 남미의 페루가 부상하면서 서서히 미국의 대도시에 고급 레스토랑으로 그 존재를 알리고 있다. 남미 칠레 와인과 아르헨티나의 와인의 가격이 최근 십 수 년 사이에 많이 올랐다.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변화가 감지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프랑스 요리와 프랑스 와인의 그늘은 세계 미식업계에 여전히 깊게 드리워져 있다.

맺으며

한국의 기성세대에서는 ‘파인 다이닝’ 하면 뭔가 부담이 가고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 같다는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 젊은 세대에서 조금씩 변화가 보이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사실 예절과 교양이라는 게 정신적, 물질적 여유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만큼 전보다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겠다. 해외여행을 가도 옛날에는 컵라면과 고추장을 챙겨 다니면서 사진 찍기 바빴던 세대와는 달리, 젊은이들은 없는 예산을 쪼개서라도 현지의 맛있고 이름난 식당을 한두 번이라도 찾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냉면집이라는 곳을 가도 숟가락, 젓가락은 통에 들어있어서 손님이 알아서 꺼내 먹어야 하고, 간장과 식초는 제일 싸구려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있는데, 주둥이엔 더께가 앉아있는 경우가 왕왕 있다. 식탁은 어떻게 닦았는지 손님들은 오래 전부터 휴지를 꺼내어 그 위에 수저를 얹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김치찌개 명가라는 곳을 가도 찌그러지고 삭아서 녹물이 새어 나오는 양은냄비에 끓여내는 걸 다들 서민적이라고 좋아한다. 서민적인 걸 좋아하는 건 자유지만, 서민적이지 않은 걸 먹고 싶을 때 다른 선택이 있는지 되물어보면 한식에는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까 격식을 찾을 땐 양식당을 가고, 중식당, 일식당을 가야 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인이 처한 환경이다. 식당에서 먹어도 4천 원인 소주는 서민들의 든든한 우군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고급 한국 술도 있어야 ‘서민적인 것’이 오히려 빛이 난다. 한국의 요식업계가 프랑스 요리와 프랑스 와인의 세계를 들여다 보며 배워야 할 것을 배운다면 한식의 앞날은 더욱 밝을 것 같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2011년 작 
미국과 스페인 합작으로 제작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는 우리 앨런이라는 거장의 근현대 서양예술문학에 대한 동경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낭만파적 연애관을 담아낸 걸작이다. 약혼녀 이네즈와 파리로 여행을 온 소설가 길은 파리의 낭만을 만끽하고픈 자신과는 달리 파리의 화려함만을 즐기고 싶어하는 이네즈에게 실망해 홀로 파리의 밤거리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밤 12시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1920년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과 조우하게 된다.

그곳에서 헤밍웨이와 피카소의 연인이자 뮤즈인 애드리아나를 만나게 된 길은 예술과 낭만을 사랑하는 그녀에게 점차 빠져들고 만다. 우디 앨런 작품 중 최고 흥행작으로, 2011년 칸 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바 있다.
영화제작자. SCS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 이주익

이주익

영화제작자

영화제작자. SCS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영화 <워리어스 웨이>, <만추>, <묵공> 을 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음식과 요리에 관심이 많아, 취미로 음식에 대한 연구를 했고 음식 전문 서적 수천 권을 보유중이다. 음식 관련 영화와 TV 드라마 제작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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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09-11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