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계 전성시대
고려 때부터 시작된 과거는 나라에 필요한 인재를 뽑기 위한 시험으로, 요즘의 공무원 정기채용입니다.
과거의 꽃은 문과, 곧 인문계였습니다. 한자와 논술에 능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급제해야만 양반으로 신분을 인정받고 온갖 부귀영화와 권력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조선은 태조 2년인 1393년부터 고종 때인 1894년까지 모두 804번의 문과가 치러졌고, 모두 15,137명이 뽑혔습니다.
아니, 501년 동안 겨우 그것밖에? 하겠지만 바로 그렇습니다. 그만큼 살인적인 경쟁률 및 합격률을 자랑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심지어 1794년의 시험에는 23,900명이 응시했고 10,568명이 답안지를 제출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보고 하루 만에 시험 결과가 나와야 하니
채점이 되는 것은 고작 몇 백장 남짓,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빨리 답안지를 내지 못하면
채점도 못 받고 낙방해야 했습니다."
급제하기까지 바늘구멍
이제는 없어졌지만 한국 최고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시험이라면 역시나 사법고시였을 것입니다.
3차로 치러진 사법시험처럼, 과거 시험 중에서 문과는 여러 단계가 있었습니다.
소과만 합격해도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거나 하급 관리가 될 수 있었지만, 제대로 출세하려면 반드시 대과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대과시험의 최고봉은 전시. 이 중에서 갑과가 되면 LTE급 출세가 보장되었습니다.
그리고 과거는 지금의 공무원 채용과 달리 1년이 아닌 3년에 한 번 치러졌습니다.
게다가 응시 나이에 제한이 없었기에 10대의 아이에서부터 90대의 노인까지 모두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때로는 한 시험에 600~1000명이 모여들기도 했습니다.
그때도 서울 학군이 최고!
문과의 최종 합격자들 중에서는 서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습니다.
*거주지가 알려진 합격자 2,486명 대상 기준
또 하나, 때때로 식년시 말고도 별시라는 특별시험이 치러졌습니다.
별시가 시행되는 계기
별시는 갑자기 치러지는 시험이라
임금의 주변인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하였으며, 정기채용인 식년시보다 별시의 기회가 더 많았습니다.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남긴 말
“서울 10리 안만이 가희 살 수 있다.”
성공하려거든 꼭 서울에서 살아야 한단다~!
장원은 임금님 맘?
과거시험의 최종 순위를 결정하는 전시, 그 시험 유형이 논술이었습니다.
가끔 임금님이 직접 '자기 취향’의 시험 문제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출제 의도를 파악하기도 어렵고 유형별 대비도 힘든 데다가 순위 매기는 것도 임금님 맘이었습니다.
태종처럼 우열을 가리기 힘든 답안지 두 개를 제비뽑기로 장원을 뽑는 경우도 있었고,
세조는 탈락한 답안지를 1등으로 삼기까지 했습니다.
왕들의 황당한 채용 방식
“이쯤 되면 성실하게 과거 시험을 준비한 조선시대 선비들이 참 불쌍해집니다만,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힘든 상황을 이겨내며 과거를 제패한 공부의 신들이 있었습니다.”
천재와 둔재, 소년 급제와 노인 급제
조선왕조 대표 천재, 5천원 지폐의 주인공 율곡 이이는 무려 9번이나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해서
구도장원공이라는 별명을 받았습니다. 특히 1564년에 벌어진 식년시에서 6번의 장원을 해냈습니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한 해에 사법고시, 외무고시, 행정고시의 수석을 싹쓸이한 것이지요.
장원급제 당시 율곡 이이의 나이는 29세. 그런데 그보다도 어린 나이에 급제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가장 나이 들어서 문과에 급제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많은 불합리와 문제가 있었음에도 조선의 사람들은 온 재산과 시간을 바쳐가며 과거에 도전했고
관직에 나아갔으며, 대과 합격증서인 홍패는 가문의 보배로 잘 보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