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계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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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부터 시작된 과거는 나라에 필요한 인재를 뽑기 위한 시험으로, 요즘의 공무원 정기채용입니다.
과거의 꽃은 문과, 곧 인문계였습니다. 한자와 논술에 능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급제해야만 양반으로 신분을 인정받고 온갖 부귀영화와 권력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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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태조 2년인 1393년부터 고종 때인 1894년까지 모두 804번의 문과가 치러졌고, 모두 15,137명이 뽑혔습니다.
아니, 501년 동안 겨우 그것밖에? 하겠지만 바로 그렇습니다. 그만큼 살인적인 경쟁률 및 합격률을 자랑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심지어 1794년의 시험에는 23,900명이 응시했고 10,568명이 답안지를 제출했습니다.
![역사 인포그래픽:인문계 전성시대](/resources/front/images/contents/info/20180823/img04.png)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보고 하루 만에 시험 결과가 나와야 하니
채점이 되는 것은 고작 몇 백장 남짓,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빨리 답안지를 내지 못하면
채점도 못 받고 낙방해야 했습니다."
급제하기까지 바늘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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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없어졌지만 한국 최고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시험이라면 역시나 사법고시였을 것입니다.
3차로 치러진 사법시험처럼, 과거 시험 중에서 문과는 여러 단계가 있었습니다.
소과만 합격해도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거나 하급 관리가 될 수 있었지만, 제대로 출세하려면 반드시 대과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대과시험의 최고봉은 전시. 이 중에서 갑과가 되면 LTE급 출세가 보장되었습니다.
![역사 인포그래픽:급제하기까지 바늘구멍](/resources/front/images/contents/info/20180823/img05.png)
- 1) 생원시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을 시험.
- 2) 진사시 시(詩)와 부(賦)의 창작 능력을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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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과거는 지금의 공무원 채용과 달리 1년이 아닌 3년에 한 번 치러졌습니다.
게다가 응시 나이에 제한이 없었기에 10대의 아이에서부터 90대의 노인까지 모두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때로는 한 시험에 600~1000명이 모여들기도 했습니다.
![역사 인포그래픽:급제하기까지 바늘구멍](/resources/front/images/contents/info/20180823/img06.png)
그때도 서울 학군이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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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의 최종 합격자들 중에서는 서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습니다.
*거주지가 알려진 합격자 2,486명 대상 기준
![역사 인포그래픽:그때도 서울 학군이 최고!](/resources/front/images/contents/info/20180823/img07.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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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때때로 식년시 말고도 별시라는 특별시험이 치러졌습니다.
별시가 시행되는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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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식년시 조선시대에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된 과거.
- 2) 별시 조선시대에 정규 과거 외에 임시로 시행된 과거.
별시는 갑자기 치러지는 시험이라
임금의 주변인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하였으며, 정기채용인 식년시보다 별시의 기회가 더 많았습니다.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남긴 말
“서울 10리 안만이 가희 살 수 있다.”
성공하려거든 꼭 서울에서 살아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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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포그래픽:별시가 시행되는 시기](/resources/front/images/contents/info/20180823/img10.png)
장원은 임금님 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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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의 최종 순위를 결정하는 전시, 그 시험 유형이 논술이었습니다.
가끔 임금님이 직접 '자기 취향’의 시험 문제를 내기도 했습니다.
![역사 인포그래픽:장원은 임금님 맘?](/resources/front/images/contents/info/20180823/img1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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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출제 의도를 파악하기도 어렵고 유형별 대비도 힘든 데다가 순위 매기는 것도 임금님 맘이었습니다.
태종처럼 우열을 가리기 힘든 답안지 두 개를 제비뽑기로 장원을 뽑는 경우도 있었고,
세조는 탈락한 답안지를 1등으로 삼기까지 했습니다.
왕들의 황당한 채용 방식
![역사 인포그래픽:왕들의 황당한 해용 방식](/resources/front/images/contents/info/20180823/img12.png)
“이쯤 되면 성실하게 과거 시험을 준비한 조선시대 선비들이 참 불쌍해집니다만,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힘든 상황을 이겨내며 과거를 제패한 공부의 신들이 있었습니다.”
천재와 둔재, 소년 급제와 노인 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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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대표 천재, 5천원 지폐의 주인공 율곡 이이는 무려 9번이나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해서
구도장원공이라는 별명을 받았습니다. 특히 1564년에 벌어진 식년시에서 6번의 장원을 해냈습니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한 해에 사법고시, 외무고시, 행정고시의 수석을 싹쓸이한 것이지요.
![역사 인포그래픽:천재와 둔재, 소년 급제와 노인 급제](/resources/front/images/contents/info/20180823/img13.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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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급제 당시 율곡 이이의 나이는 29세. 그런데 그보다도 어린 나이에 급제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가장 나이 들어서 문과에 급제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역사 인포그래픽:천재와 둔재, 소년 급제와 노인 급제](/resources/front/images/contents/info/20180823/img14.png)
많은 불합리와 문제가 있었음에도 조선의 사람들은 온 재산과 시간을 바쳐가며 과거에 도전했고
관직에 나아갔으며, 대과 합격증서인 홍패는 가문의 보배로 잘 보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