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과 이어지는 정동길은 19세기 후반 대한제국을 통해 부국강병을 꿈꿨던 고종황제의 꿈,
그리고 그 꿈이 좌절되면서 남긴 아픔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1896년 한겨울 새벽, 세자 순종을 데리고 나섰던
‘고종의 길’을 따라 도착한 아관파천의 현장 ‘러시아 공사관’,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 등
덕수궁 돌담길로 이어지는 정동을 구비구비 걷다 보면 마음 한 구석이 어쩔 수 없이 알싸해진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잊고 싶지만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역사 속의 그 길로 떠나본다.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가로막힌 슬픈 역사의 길
1896년 2월 11일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새벽, 고종은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빠져 나와 황급히 러시아 공사관 쪽으로 몸을 옮겼다. 세자 순종도 고종과 동행했다. 그것도 극비리에 궁녀로 변장하고 궁녀의 가마에 타고 있었다 하니 그야말로 슬픈 역사의 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대한제국 당시 미국공사관이 제작한 정동지도에는 덕수궁 선원전(璿源殿)과 현 미국대사관 사이의 작은 길을 ‘왕의 길(King’s Road)’로 표시하고 있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몸을 피했던 바로 그 길이다. 서울시는 지난해 그 동안 단절됐던 돌담길 총 170m 가운데 100m 구간을 보행길로 정식 개방했다. 100m 구간은 주한영국대사관이 자리한 탓에 60여 년 동안 끊겼던 구간이다. 이 길은 구한말 당시 덕수궁에서 선원전(현재 경기여고 터)으로 들어가거나 러시아 공사관이나 경희궁으로 가기 위한 주요 길목이었다. 100m 구간의 돌담길은 담장이 낮고, 곡선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담장이 사람의 시선 아래 펼쳐져 있어 도심 속에서 고궁의 고요하고 평온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이 돌담길과 이어져 정동공원과 러시아 공사관까지 연결된 길이 바로 최근 복원이 완료된 ‘고종의 길’이다. 3년간 석축과 담장을 쌓아 복원한 이 길은 8월 한달 동안 일반에 공개된 후 10월경 정식 개방할 예정이다.
우리 근현대사의 부끄러운 편린을 간직한 ‘언덕 위의 하얀 집’
정동공원 내에 위치한 구 러시아 공사관은 비운의 ‘아관파천’ 현장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신변 위험과 일본을 견제한다는 목적으로 세자 순종을 데리고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간다. 이후 고종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곳에 머무르면서 정사를 돌본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거처했던 방은 공사관에서 가장 안락한 방으로, 내부가 르네상스풍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공사관은 광복 직후 소련 영사관으로 활용되다가 한국전쟁 중 폭격으로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1973년 르네상스식 첨탑만 복원됐다. 완만한 경사길에 자리잡은 언덕 위의 하얀 집, 러시아 공사관 건물은 당시 정동에서 가장 좋은 입지 조건을 자랑했다고 한다.
하얀색으로 빛나는 탑 일대는 지금도 정동공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면서 꽤나 이국적인 느낌을 풍긴다. 외세에 기대어 국가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러시아 공사관은 1977년 사적 제253호로 지정됐으며, 문화재청과 서울 중구청의 주관으로 2021년까지 그 원형을 복원, 정비할 계획이다.
대한제국과 고종황제의 야망이 느껴지는 상징적 공간
조선을 이어 들어선 대한제국의 주요 무대였던 덕수궁은 다른 서울 시내 궁궐들과는 달리 근대 초기의 건물들이 많다. 그 중 중화전과 정관헌은 고종황제의 야망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중화전이 완공된 1902년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지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기간 동안 고종황제는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각종 개혁정책을 시행하고, 근대도시 서울을 건설하기 위한 가로 정비와 공원 건설 그리고 대중교통과 철도 건설 등 근대국가로서의 기틀을 새롭게 다졌다.
중화전 건설은 고종황제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정전을 갖추지 못한 채 급박한 정치 현실에서 출범했던 대한제국의 ‘미완의 프로젝트’를 완성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화전(中和殿)’이라는 이름 역시 당시 조선을 둘러싼 세계 열강들 사이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피력이다. 복잡한 세계 질서 속에 대한제국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자리매김 하겠다는 고종황제의 꿈이 중화전을 통해 비로소 구현된 것이다.
중화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면의 5개 칸 중에서 중앙에 위치한 어칸은 다른 칸에 비해 더 넓게 만들어 중앙의 상징성과 기능성을 반영했다.
중화전 내부를 들여다보면 가장 먼저 띄는 것이 임금이 앉는 의자인 어좌와 그 뒤에 놓인 일월오봉도(또는 일월오악도)다. 일월오봉도에서 오봉은 동서남북과 중앙에 있는 산을 상징하는데, 이는 곧 전 국토를 의미한다.
그림에 나오는 태양과 달, 소나무 등은 하늘과 땅을 비롯한 임금의 권위가 미치는 모든 것을 상징한다. 그래서 모든 궁궐의 정전에는 일월오봉도가 그려져 있다. 어좌 위로는 집 모양을 하고 있어 ‘집 속의 집’이라고 불리는 닫집이 있다.
대한제국의 외교 행사장이자 차와 음악을 즐겼던 고종황제의 휴식처
덕수궁 북쪽 제일 높은 위치에 자리한 정관헌(靜觀軒)은 이름부터가 ‘고요하게 내려다본다’는 뜻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서양풍에 전통미가 가미된 독특한 구조의 건축물이다. 1900년경, 우리나라 궁궐 내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러시아 출신 건축가 사바친이 설계했으며, 정면 7칸, 측면 5칸의 형태로 지어졌다.
정관헌은 고종황제가 다과회를 열고 음악을 감상했던 휴식처이자 외국 사신과의 연회나 외국 공사들과의 접견 장소로도 쓰였던 곳이다. 정면과 좌우 측면에는 화려한 느낌이 나는 발코니를 만들었고, 붉은색 벽돌을 사용해 지금 보아도 이국적인 느낌을 듬뿍 담고 있는 반면, 난간과 기둥머리 부분의 문양에는 한국적인 요소를 곳곳에 가미했다. 한편, 정관헌 내부는 일반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다. 실내화로 갈아 신은 후 정관헌 안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궁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잠시나마 대한제국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황제국으로서의 위용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했던 성역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장소로 고려시대부터 설치와 폐지가 되풀이됐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세조 3년(1457)에 환구단을 중건해 제천 의례를 올렸으나 7년 만에 중단됐다.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고, 제후국인 조선은 그러한 권한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환구단 복원은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선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대한제국 이전 환구단 자리에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별관 ‘남별궁’이 있었다. 고종황제는 아관파천 후 경운궁을 환궁하면서 남별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환구단을 복원했다.
고종은 1897년 10월 황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금으로 채색한 가마에 올라 덕수궁에서 환구단으로 향한 뒤 제천의식을 거행했다. 1897년은 고종이 이곳에서 하늘과 땅에 자신이 대한제국의 황제임을 선포한 해인 것이다. 하지만 이후 환구단은 일제에 의해 수난을 당해야 했다. 일제의 침략 야욕으로 제국의 꿈도 환구단과 함께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일본은 1913년 조선철도호텔(현 조선호텔 자리)을 짓는다는 명분 아래 황궁우만 남겨둔 채 본단을 비롯한 환구단의 주요 시설물 대부분을 철저했다. 고종황제는 대한제국의 성역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환구단은 현재 제사를 지내던 3층 팔각 건물의 황궁우(皇穹宇)와 북 모양 조형물인 석고(石鼓) 3개, 삼문, 협문만 남아 있는 상태다. 황궁우는 제사의 주요 대상인 하늘신, 땅신, 태조의 신위를 모신 장소로, 팔면의 창호는 소슬꽃살무늬로 꾸미고, 기둥 사이에는 물결과 연꽃무늬를 새긴 장식물인 낙양을 설치해 화려한 느낌을 준다. 1902년에는 고증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을 황궁우 옆에 세웠다. 석고의 몸체에 부각된 용 무늬는 조선 말기 조각의 걸작으로 꼽힐 만큼 정교하다.
을사늑약 이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까지, 제국의 아픔이 서린 현장
덕수궁 돌담길을 돌아 정동극장 쪽으로 걷다 보면 골목길 한 켠에 중명전(重明殿)이 자리하고 있다. 중명전은 덕수궁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정비해 가는 과정에서 황실의 서적과 보물들을 보관하는 도서관 용도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하지만 1904년 덕수궁에 큰 불이 일어나자 고종황제는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편전으로 사용했다. 원래 이름은 수옥헌이었으나 중명전이라는 이름이 새롭게 붙여졌다.
중명전은 1905년 11월 17일, 우리의 외교권이 박탈당했던 ‘을사늑약’이 맺어진 치욕스러운 장소이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4월 20일 네덜란드 헤이그로 특사를 파견한 곳이다. 고종황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강제 퇴위 당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광복 후 중명전은 외국인을 위한 사교클럽으로 주로 쓰이다가 자유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유재산으로 편입되었다. 1963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중명전을 돌려주었다가 1977년 다시 민간에 매각되었다. 그 후 문화재청에서 관리를 해오다가 2009년 복원을 거쳐 2010년 8월부터 현재의 전시관 형태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제1전시실 <덕수궁과 중명전>, 제2전시실 <을사늑약의 현장>, 제3전시실 <을사늑약 전후의 대한제국>, 제4전시실 <대한제국의 특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제2전시실에 마련된 을사늑약 체결의 방은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재연해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은 몰락의 길을 걸으며 13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남긴 채 사라진다. 이는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의 꿈이 멈추는 순간이기도 했기에, 중명전을 거니는 일은 꽤나 서글픈 일이었다.
위 치 |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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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람 료 | 무료 |
문 의 | 02-751-0753, 02-732-7521 |
안내해설 | 화~금 14:00, 15:30 / 토~일 11:30, 14:00, 15:00 / 공휴일 14:00, 15:30 |
이용시간 | 09:30~17:30 (매주 월요일 휴관) |
덕수궁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싶다면 대한문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1동 13층 정동전망대에 올라보자. 이곳은 시민들에게 무료 개방되고 있는데, 카페도 함께 겸하고 있어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높은 곳에서 덕수궁을 내려다볼 수 있는 특별한 곳이다. 투명한 유리창 밖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하게 들어선 빌딩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의 고즈넉한 덕수궁의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 보면 고전적인 붉은 벽돌로 마감된 서양식 건물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배재학당 동관 건물로 현재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선교사 아펜젤러가 고종황제에게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신식 교육 보급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전달했고, 이에 고종은 아펜젤러의 뜻에 따라 직접 현판을 하사하며 배재학당 설립을 허가했다. 배재학당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규모로 현재 상설전시장, 기획전시장, 체험교실, 세미나실로 구성되어 있다. 체험교실에는 개교 당시 사용했던 돌 칠판과 낡은 책상으로 당시의 교실을 재현해 놓았고, 상설전시장에는 고종이 하사한 배재학당 현판, 유길준의 친필 서명이 든 <서유견문>, 120여 년 전 학생들이 공부했던 교과서 등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출처 :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홈페이지>
정동극장 바로 옆에 위치한 덕수정은 30여 년간 한 자리를 지켜온 전통 있는 식당이다. 덕수정에서 가장 유명한 메뉴는 바로 밥도둑 오징어볶음. 통통한 오징어와 양파가 푸짐하게 들어간 오징어볶음은 보기와 달리 맵지 않고 단맛이 나 매운 음식을 못 먹는 이도 부담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부대찌개는 세월이 느껴지는 찌그러진 냄비에 햄, 소시지, 당면, 두부, 다진 고기, 파 등 갖가지 재료가 넉넉하게 담겨 나온다. 부대찌개는 끓일수록 맛이 깊어지는데, 뒷맛은 깔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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