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스캔들

차이코프스키와 쇼스타코비치

희대의 스캔들 : 차이코프스키와 쇼스타코비치 러시아 천재음악가 스캔들희대의 스캔들 : 차이코프스키와 쇼스타코비치 러시아 천재음악가 스캔들
 
  • 이동통신망을 이용하여 영상을 보시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네트워크 상황에 따라 재생이 원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동영상 재생이 안 될 경우 FAQ > 멀티미디어를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세계인이 가장 사랑하는 발레곡
<백조의 호수>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세계인이 가장 사랑하는 발레곡<백조의 호수 />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전 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발레곡 <백조의 호수>. 러시아의 천재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명곡이다. <호두까기 인형>, <비창> 등 수많은 명곡들을 탄생시킨 19세기 위대한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그의 곡들은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불안하고 외로울 때가 많았다. 차이코프스키에 관한 스캔들과 의문들은 오늘날까지 숱한 이야기로 남아있다. 그의 나이 겨우 열 살. 어머니와 떨어진 채 홀로 법률학교 기숙사에 보내졌다. 4년 후엔 콜레라에 걸린 어머니가 사망하고 만다. 불운했던 유년기를 보낸 그였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커져만 갔다. 28세가 되던 해 그의 첫 번째 오페라 <지방 장관>이 완성됐다. 같은 해 제1번 교향곡 <겨울날의 환상>은 최초로 모스크바 무대에 오르는 기쁨을 누렸다.

후원인이자 소울 메이트였던
폰 메크 부인과의 특별한 인연

희대의 스캔들 : 후원인이자 소울 메이트였던 폰 메크 부인과의 특별한 인연
<백조의 호수>가 완성된 해인 1876년, 천재 예술가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운명의 편지 한 통이 배달된다. “나는 당신을 후원하고 싶습니다. 매 해 6천 루블을 당신이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습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폰 메크 부인. 철도 사업가의 미망인인 그녀는 음악 애호가였다. 차이코프스키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단, 그녀의 조건이 있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만나서는 안 됩니다.”
조건을 받아들인 차이코프스키는 곧바로 후원에 대한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편지는 14년 동안 계속됐다.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1,200통 이상이었다. 실로 방대한 소통이었다.

“작품 안에 당신과 나의 친밀한 생각과 느낌이 반영된다는 걸 당신은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후원자를 넘어 그의 소울 메이트였던 폰 메크 부인. 그녀 덕분에 차이코프스키는 자유로이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동성애자라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고자 선택한 위장결혼

희대의 스캔들 : 동성애자라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고자 선택한 위장결혼
그런 그에게 고민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사랑에 대한 정체성이었다. 사실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자였다. 당시 러시아 정부에서 동성애는 지탄의 대상이었다. 적발 시 시베리아 유형을 보낼 정도였다. <제1번 피아노 협주곡>, <백조의 호수> 등 불안정한 사랑을 해온 그였지만 명곡들은 대부분 그 시기에 쏟아져 나왔다. 대중의 사랑과 함께 동성애에 대한 그의 고민도 커져만 갔다. 1877년 밀류코바라는 여성에게 받은 팬레터엔 아래와 같이 적혀 있었다.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자살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어서 제게 와 주세요.” 동성애자인 그가 선택한 것은 밀류코바와의 위장 결혼이었다. 그렇게 결혼은 했지만 결혼 생활은 하지 않는 불행한 관계가 시작됐다.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한 뒤 괴로워하는 마음, 그리고 영혼의 동반자인 폰 메크 부인에 대한 감정까지. 그의 음악 중 가장 변화무쌍하고 정열적인 곡으로 평가받는 <제4번 교향곡>은 폭풍 같은 그 시기, 폰 메크 부인에게 바친 선물이었다.

자신의 영혼을 모조리 쏟아 부은
위대한 교향곡, 비창

희대의 스캔들 : 자신의 영혼을 모조리 쏟아 부은                                     위대한 교향곡, 비창
그러던 두 사람의 관계는 1890년 10월 갑작스레 종지부를 찍는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친밀한 내용의 서신을 교환한 두 사람이었다. 재정적 곤란이 그 이유였지만, 그녀의 아들이 협박했다는 설도 있다. 후원을 계속할 경우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리겠다고 한 것이다. 그녀와의 결별 후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차이코프스키는 3년 후인 1893년 11월 6일 갑작스레 세상을 뜨고 만다. 그가 죽기 9일 전에 탄생한 명곡 <비창>에 대해 차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영혼을 모조리 이 교향곡에 쏟아 부었다. 수수께끼로 들릴 것이고, 사람들은 저마다 해석할 것이다. 오직 신만이 처벌하고 응징하라.” 단 한 번도 떳떳한 사랑을 하지 못했던 차이코프스키. 인류 음악 역사상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이 멜로디 속에 그의 진심이 담겨있지는 않을까?

예술가에 대한 탄압과 억압의 시대를 살았던
구소련의 모차르트

희대의 스캔들 : 가에 대한 탄압과 억압의 시대를 살았던                                     구소련의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가 사랑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음악으로 승화시켰다면, 정치세력에 맞서 음악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음악가도 있다. 예술가에 대한 탄압과 억압의 스캔들로 얼룩졌던 구소련 정부 시대. 1932년 데뷔곡 <제1번 교향곡>으로 음악계에 주목받는 신인 작곡가가 등장했다. 그의 나이 열 아홉. 소련의 모차르트로 불린 쇼스타코비치다. 화려한 찬사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안과 초조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당시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소련의 예술가들은 자유로운 창작을 할 수 없었다. 같은 해, 스탈린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공표한다. “예술은 곧 사회주의 이념에 봉사해야 한다.”
예술가들에 대한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쇼스타코비치도 마찬가지였다. 물리학자인 처남이 구속됐고, 천문학자인 장모는 집단 수용소로 보내졌다. 후원자였던 친구는 총살에 처해졌다.

1936년 5월, 그는 <제4번 교향곡>의 초연을 돌연 취소했다. 음악적 신념과 가족의 안전, 이 사이에서 어렵게 내린 결론이었다. 권력의 압박 속에서 가족의 죽음을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어서였다. 결국 이 초연은 1961년에야 이뤄질 수 있었다.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깊은
위로, 쇼스타코비치의 <레닌그라드>

희대의 스캔들 :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깊은                                     위로, 쇼스타코비치의 <레닌그라드 />
1942년 8월 9일, 소련의 레닌그라드 교향악단 연주홀에 울려퍼진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였다. 1시간 20분 동안 관객은 숨 죽이며 감상해야만 했다. 1941년 나치의 침공을 받아 포위된 도시 레닌그라드, 쇼스타코비치는 당시 레닌그라드에 머물며 이 곡을 작곡했다. “잠시 쉬는 동안 화가 나서 거리에 나가면 내가 이 도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된다.” 당시 시대적 상황이 고스란히 담긴 곡. 그리고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 <레닌그라드>. 1악장은 전쟁, 2악장은 회상, 3악장은 조국의 광야, 4악장은 승리였다. <레닌그라드>는 스탈린의 폭력과 나치의 침략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곡이다. 초연 당시 극장 밖에서는 여전히 총성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의 69년 인생 중 58년은 러시아 공산주의 체제 안에 있었다. 쇼스타코비치, 그는 암울했던 정치 스캔들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걸어간 위대한 음악가였다. 스캔들. 충격적이고 불명예스러우며, 단순한 뒷소문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희대의 스캔들은 대부분 인간의 본능에서 시작한 것들이었다. 어쩌면 스캔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인 사랑, 고뇌, 욕망, 갈등, 경쟁, 그리고 예술의 다른 이면일지도 모른다.
  • · 본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 · 본 콘텐츠는 사전 동의 없이 상업적 무단복제와 수정, 캡처 후 배포 도용을 절대 금합니다.
작성일
2018-08-07

소셜 댓글

SNS 로그인후 댓글을 작성하시면 해당 SNS와 동시에 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