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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비정한 아버지, 영조
세상에서 가장 슬픈 상자. 뒤주 안에 든 사람은 아들이었고, 뒤주의 자물쇠를 직접 채운 사람은 아버지였다. 1762년 5월 13일 조선 최고의 비극적인 스캔들 임오화변. 사도세자와 그의 아버지 영조의 이야기다. 조선 21대 왕 영조는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던 인물이다. 근검절약과 절제를 실천한 애민의 군주, 영조가 왜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죽였을까? 이 스캔들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배경은 영조를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콤플렉스에서 시작된다. 첫 번째 콤플렉스는 출생이다. 영조의 아버지는 숙종, 그러나 어머니는 궁중의 우물에서 물을 긷고 바느질을 했던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였다. 영조의 두 번째 콤플렉스는 경종의 독살설. 영조에게 이복형 경종은 평생 마음의 짐이었다. 그가 보낸 게장과 생감을 먹은 후 경종이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엄한 잣대와 집착이 불러온
부자간의 균열
영조는 경종의 독살설과 어머니의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항상 긴장하고 학문으로 자신을 갈고 닦은 영조. 영조의 편이었던 노론은 영조 즉위 후 본격적으로 정권을 차지했다. 그러나 지나친 노론의 세력은 영조에겐 부담이자 견제할 대상이기도 했다. 아들 사도세자 역시 노론에 맞서 개혁정치를 꿈꿨다. 당연히 소론과 가까이 지냈던 사도세자. 영조는 사도세자가 자신처럼 학문으로 신하들보다 우위에 서길 바랐다. 사도세자를 늘 다그치고, 심신에 압박을 주었다. 아버지의 엄한 잣대, 집착… 아들은 변했다. 누구보다 훌륭한 아들이었던 사도세자는 어느새 우울증에 폭언을 일삼고 있었다.
정치권력의 희생양이 되어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
당시 형조판서 윤급의 겸종인 나경언은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만다. 세자의 비행 10가지를 영조에게 고발한 것이다. 1762년 일어난 나경언의 고변사건이다. 1. 여승을 궁에 들인 것
2. 북성으로 나가 유람한 것
3. 시전 상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갚지 않은 것 이에 대한 영조의 분노는 엄청났다. 사도세자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아바마마, 나경언과의 대질을 허락해 주소서!” 돌아오는 아버지의 대답은 차가웠다.
“차라리 발광을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사도세자는 석고대죄를 시작했다. 그러나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궁궐에 사도세자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아내 혜경궁 홍씨도 남편 사도세자의 편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녀의 친정은 사도세자의 반대 세력인 노론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 훗날의 정조만이 아비를 살려달라고 울며 간청했을 뿐이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갈 것을 명했다. 뒤주에 자물쇠를 영조가 직접 채웠고, 사도세자는 좁은 뒤주 안에 갇혔다. 그리고 8일간을 신음한 끝에 결국 굶어 죽었다. 1762년 사도세자의 나이 27세. 정치권력의 희생양, 사도세자의 죽음 뒤엔 노론의 음모가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통해 그 동안 얻지 못했던 긍정적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방관한
모두를 벌한 아들, 정조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지 15년 후, 정조가 즉위한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말.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개혁군주이자 예술 문화를 꽃피우며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성군 정조. 정조의 국정 목표 중 하나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방관한 핵심 인물들은 모두 벌했다. 노론의 중심이었던 외가인 홍씨 가문을 사실상 몰락시켰다. 그런데 어머니에 대해서는 어찌할 길이 없었다. 정조가 왕이 된 이듬해인 1777년, 창경궁 가장 높은 언덕에 어머니를 위한 건물인 자경전을 지었다. 가장 높은 언덕에 자경전을 지은 이유가 있었다. 창경궁 자경전에서는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이 보인다.
어머니가 자경전을 출입할 때마다 경모궁을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느끼기를 바랐던 것이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를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경기도 화성에서 열었다. 아들의 이런 행동에 혜경궁 홍씨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혜경궁은 환갑잔치를 한 그 해부터 <한중록>을 열심히 집필했다.
“사도세자는 정신이상 증세 조울증 증세와 유사한 광증을 앓고 있었다.”
“우리 집안은 사도세자의 죽음과 무관하다.”
<한중록>의 전체적인 내용이다. 엄밀히 말하면 <한중록>은 친정과 자신을 변호한 글인 것이다.
조선 정치사 최고의
비극적인 스캔들로 남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어느 한 가지에서만 원인을 찾기가 어렵다. 당쟁 권력싸움의 희생양이었을까, 왕권에 대한 영조의 야망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사도세자의 광증 때문이었을까? 작지만 무거운 뒤주. 그것은 살아 남아있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였다. 단순히 한 가족의 비극적인 사건이 아닌, 회오리 같은 조선 정치 역사의 비극적인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조선 최고의 비극적인 스캔들이었던 사도세자의 죽음. 회오리 같은 조선 정치세력 속, 정치엔 부정(父情)도 없다는 말을 실로 대변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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