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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반역죄로 재판정에 선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
반역부터 살인까지 온갖 혐의를 놓고 왕부터 예술가까지 다채로운 캐릭터가 역사의 심판대 앞에 서는 법정. 법정을 무대로 펼쳐진 세계 역사 속 결정적 장면들이 있다. 영국의 역사를 바꾼 헨리 8세와 앤 불린(Ann Boleyn)의 스캔들 뒤에는 희대의 법정 스캔들이 있었다. 헨리 8세의 절대적 지지 속에 대법관의 자리까지 올랐던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 그는 헨리 8세가 앤 불린을 만나기 전 왕과 캐서린 왕비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매일같이 밤늦게까지 토론을 하곤 했다. 능력 있고 유머러스한 모어를 유달리 아꼈던 헨리 8세. 그러나 헨리 8세의 이혼과 재혼으로 둘 사이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모어는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 취소를 요청하는 편지에 서명하지 않고, 앤 불린의 왕비 대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급기야 앤 불린의 아이가 왕위계승권을 갖는다는 왕위 계승법(Act of Succession)까지 거부한 모어. 이러한 행위를 반역이라 생각한 헨리 8세는 결국 ‘반역죄’로 그를 재판정에 세운다.
절대적 군주에 맞선
모어의 마지막 법정 드라마
1535년 7월 1일, 단 15분 만에 사형선고를 받은 토마스 모어. 언제나 유머러스한 말과 행동을 잃지 않았던 그는 죽는 순간에도 사형 집행인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내 수염만큼은 왕의 비위를 거스른 적이 없지.” 이렇게 말하며 수염이 잘려나가지 않도록 사형 집행인에게 주의를 당부한 모어. 반역죄로 처형당한 모어의 머리는 런던 브리지에 한 달 이상 걸려 있었다. 이는 절대적 군주에 맞선 시대의 양심이라 평가받는 모어의 법정 드라마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훌륭한 언어와 논리가 동원되며, 사람들에게서 생애 최고의 퍼포먼스를 끌어내는 법정. 법정은 한 인간의 삶과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공간이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스파이 혐의를 받고 법정에 선 드레퓌스
1894년 9월, 프랑스군 정보국에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에 심어놓은 정보원을 통해 메모 한 장이 입수된다. 프랑스군의 신병기 대포 개발 현황, 전시 포병부대 배치도 등이 담겨있는 명세서. 프랑스 육군의 일급 기밀이 독일 스파이를 통해 빠져나간 것이다. 그때, 정보부가 범인으로 지목한 용의자는 바로 군사전문학교 출신의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였다. 명세서의 필적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체포된 드레퓌스. 그러나 지휘부가 혐의를 확신한 근거는 놀랍게도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였다. 스파이 혐의를 지속해서 부인한 드레퓌스. 도벽이나 금전, 여자 문제 등 스파이로 포섭될 만한 정황 증거와 물적 증거가 확보되지 않은 가운데, 검찰 측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이 바로 정보국의 위베르 앙리 소령이었다.
드레퓌스가 독일군 스파이라는 제보를 받은 적이 있다고 증언한 것이다. 결국, 악명 높은 ‘악마의 섬’ 종신 유배 선고를 받은 드레퓌스. 위계 박탈식에서 어깨의 계급장이 뜯기고, 제복 바지의 리본마저 떨어져 나가는 굴욕까지 겪게 된다.
드레퓌스, 법정의 희생양에서
정의의 상징으로 다시 일어서다
그런데, 약 1년 뒤 진짜 범인이 나타난다. 바로, 프랑스 육군 보병 대대장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소령. 도박과 낭비벽으로 항상 빚에 몰려 있었던 에스테라지 소령이 명세서를 쓴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철저하게 감춰졌다. 체면을 지키고 싶었던 프랑스군은 에스테라지 소령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그는 곧바로 영국으로 도피해 버린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프랑스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드레퓌스 구명 투쟁이 시작된다. 의회 연설과 대통령 면담을 통해 군 수뇌부의 막장 행태를 알린 상원 부의장부터,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기고하며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조작”이라고 일갈한 에밀 졸라까지. 프랑스 최고 베스트셀러의 글이 실린 잡지 <로로르>가 20만 부 넘게 팔리면서 여론이 들썩이는 가운데, 드레퓌스의 유죄를 증언했던 위베르 앙리 소령이 진실이 조작됐음을 인정하고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마침내 역사의 심판대 앞에 다시 선 드레퓌스. 그는 1906년 무죄를 최종 확인하면서 장장 12년 만에 명예를 되찾을 수 있었다. 법정의 희생양이 되었던 드레퓌스가 결국 법정에 다시 서서 정의의 상징이 된 것이다.
훌륭한 언어와 논리로
생애 최고의 퍼포먼스를 끌어내는 법정
무죄 추정이 아닌 유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스파이 취급을 받았던 드레퓌스. 그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피해 가능한 한 조용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말년에 어느 지지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불운하게도 제 갈 길을 가지 못한 포병 장교일 뿐입니다.”
고전 문학의 거장, 프리드리히 실러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세계의 재판소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가장 훌륭한 언어와 논리가 동원되며, 생애 최고의 퍼포먼스를 끌어내는 무대, 법정. 법정에 등장하는 인물이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역사적 인물이라면 그 극적 효과는 더욱 커진다. 세계 역사를 결정짓는 결정적 사건들이 지금도 역사의 법정 위에서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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