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서울 도성 안의 사대문이라 하면, 동대문은 흥인지문, 남대문은 숭례문, 북대문은 숙정문, 서대문은 돈의문을 말한다.
그 중 현존하지 않는 유일한 문이 바로 서대문이다. 무엇이 서대문을 사라지게 만들었을까?
서대문은 왜 아직까지도 복원되지 못하고 있을까?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한국사 전문가 최태성 작가와 함께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서대문의 슬픈 역사를 지금 바로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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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서대문의 터는 현재 강북삼성병원 입구인 정동 사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행정구역상 어디에 속할까? 이름 그대로 서대문구일까? 정답은 서울시 중구에 속한다. 1975년까지 서대문 터는 서대문구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해 서울시 중구 정동을 비롯한 서쪽 지역이 서대문구에서 중구로 편입이 되면서 오늘날까지 서대문은 서대문구가 아닌 중구에 있게 된 것이다.
조선 건국 후 서대문은 원래 지금의 독립문 근처인 사직동 고개 쪽에 처음 세워졌다. 그러나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건의가 올라오자 태종은 1413년 서대문을 폐쇄한다. 문이 문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서대문의 슬픈 ‘이동의 역사’는 시작된다. 이후 경희궁이 있던 서쪽 언덕으로 이동한 서대문은 1422년 다시 세종에 의해 또 한번 이동하게 되는데, 이 자리가 바로 현재의 서대문 터다. 이 때문에 서대문은 다른 사대문과는 달리 세종 때 ‘새로 세워진 문’이 된 것이다.
신문로는 서대문 터를 관통하고 있는 도로의 이름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 곳에 경향신문사 건물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여기서 ‘신문(新門)’이란 세종 때 새로이 문을 열었다는 의미로, 현재 이곳 도로명으로 쓰이고 있는 새문안로 역시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서대문과 동대문 사이를 오가는 전차를 복선으로 운행하기 위해 서대문을 철거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동대문은 그대로 놔두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전차는 대한제국 시절,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당시 쓰나미처럼 밀려오던 근대화의 물결이 500년 동안 서울 땅을 지켰던 서대문을 덮친 격이 되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