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설의 처음과 끝

조남주 저 <82년생 김지영> - 82년생이 아니고 김지영이 아닐, 당신

그 소설의 처음과끝 : 조남주 저 <82년생 김지영> -82년생이 나이고 김지영이 아닐, 당신-
그 소설의 처음과끝 : 조남주 저 <82년생 김지영> -82년생이 나이고 김지영이 아닐, 당신-
그 소설의 처음과끝 : 조남주 저 <82년생 김지영> -82년생이 나이고 김지영이 아닐, 당신-
소설의 처음

“김지영 씨는 우리 나이로 서른네 살이다. 3년 전 결혼해 지난해에 딸을 낳았다.
세 살 많은 정대현 씨, 딸 정지원 양과 서울 변두리의 한 대단지 아파트 24평형에 전세로 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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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씨는 1982년 4월 1일, 공무원 아버지와 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두 살 위 언니 김은영 씨에 이어 태어났다. 셋째로 태어날 예정이던 여동생은 ‘또 딸’이라는 죄목으로 지워졌다. 집에서는 ‘귀한 아들’인 다섯 살 아래 남동생에게 많은 걸 양보해야 했고, 학교에서는 남학생들에게 부여된 우선순위를 견디며 자랐다. 취직해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러 불이익을 겪다가, 결혼과 출산과 퇴직과 육아로 이어지는 ‘여성의 삶’으로 편입되었다.

부당함을 느꼈으나 항거하여 바꾸기보다는 침묵을 택하며 살았다. 이렇게 요약된다. 이 땅에 여성으로 태어난 모든 이들은 ‘82년생 김지영’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나. 당신은 아마도 82년에 태어나지 않았을 테고 당신의 이름은 아마도 김지영이 아닐 텐데 당신은 왜 당신을 ‘82년생 김지영’이라고 부르는 건가. 이제는 이걸 더 생각해봐야 할 때다.

“하나의 현상이 되어버린 소설 <82년생 김지영>,
과연 극사실주의 소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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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14개월 만에 판매 부수 50만을 기록했다는 것은 <82년생 김지영>이 하나의 현상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어떤 소설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읽히는’ 소설인지부터 주목해 마땅하다. 독자 반응 중 눈에 띄는 것은 ‘하이퍼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이다. 극사실주의,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소설. 어떤 뜻으로 쓰인 말인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 현상을 괄시하는 이들 역시 같은 프레임으로 접근한다는 게 문제다. 과감히 묻자. 이 이야기는 정말 ‘사실’일까? 이 소설의 가치를 사실에서 찾을 때, 곧 얼마나 사실에 가깝냐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일 때, 논쟁에서 불리한 쪽은 오히려 사실임을 증명해야 하는 이들이다. 이게 다 거짓말이라는 정도까지 갈 것도 없이 단 하나의 거짓을 찾아내는 것만으로도 한 치의 과장이나 거짓 없는 사실이라는 논리는 쉽게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것을 거짓이라 간단히 치부하는 논리에 맞서려면 논의를 복잡한 쪽으로 끌고 와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완전 내 이야기’라는 수사는 너무 간단해서 위험하다. 다시금 말하건대 이것은 아마 당신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 김지영 씨의 아버지는 퇴직과 함께 상가를 매입해 장사를 시작했다. 언니는 비록 완전한 자의는 아니었을지언정 교사라는 꿈을 택해 교대에 진학했으며, 김지영 씨는 부모의 돌봄 아래 학자금 대출 없이 과외 아르바이트까지 했다. 그렇게 ‘스카이’ 아닌 서울 소재 대학의 인문학부를 다녔음에도 졸업과 동시에 취업했고,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도 24평형 아파트 전세로 신혼 생활을 시작했으며, 딸 정지원 양이 태어나기도 전에 맞벌이로 전세 대출금을 다 갚았다. ‘금수저’이거나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로 여유로운 생계를 꾸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동시에 김지영 씨는 그보다 사회적 경제적으로 더욱 소외된 적지 않은 이들보다는 분명 나은 처지다. 그 아파트는 변두리라고는 해도 서울의 대단지다. 남편 정대현 씨가 ‘IT 계열 중견 기업’에서 매년 벌어오는 돈은 못해도 삼천만 원은 될 것이다. 그들이 육아를 위한 입주 도우미를 쓰지 않는 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우선 내키지 않아서다. 요컨대 김지영 씨에게는 ‘삼포 세대’가 감히 꿈도 못 꾸는 모든 것들이 가능했다. 이 수많은 차이를 간단히 무시한 채 ‘나도 김지영’ 정도로 만족한다면 그것은 “동일성과 차이의 논리를 통해 배타적인 동성사회적•남성중심적인 내부를 구성하고 이를 근거로 여성을 배제하는 전형적인 여성혐오 논리”(심진경)를 반복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소설은 사실이 아니라 진실을 다루는 장르이므로,
김지영 씨의 가감 없는 진실에 주목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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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이런 것. 82년생 김지영 씨의 삶은 62년생 이영숙 씨에게는 저보다 나아 보일 수 있고, 02년생 박서연 씨에게는 저보다 못해 보일 수 있다. 다시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아마도 이영숙 씨에게는 조금이나마 나아 보일 것이고 박서연 씨에게는 그 반대일 것이다. 근거는 멀리 갈 것도 없이 <82년생 김지영> 안에서 있다. 적어도 김지영 씨는 잠 깨는 약을 삼켜 가며 방직 공장에서 밤낮없이 일해 번 돈으로 오빠나 남동생들의 학비를 대지 않아도 되었다. 김지영 씨의 중학교 여후배들은 남학생들처럼 면티를 입고 운동화를 신을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큰 틀에서는 그대로라는 말도 맞고 이 변화가 사소한 것이라는 말도 맞지만, 반대로 사소하게나마 무언가 틀림없이 바뀌었다는 것도 맞다. 그 작지만 큰 변화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걸 어렵게 바꿔온 이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을 없는 것 취급하는 셈이 된다. 이는 주로 남성들만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기억해온 그간의 과오를 반복하는 일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역사가 소외시킨 여성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피해자’로 상상하고 그 고통에 연대하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고통은 연대의 약속과 실천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매개일 뿐이다. 고통 자체에 연대하라고 하면, 남는 건 서로 경쟁적으로 ‘상처받았다’고 하는 말들뿐일 것이다.”(권김현영)

그 소설의 처음과끝 : 조남주 저 <82년생 김지영> -82년생이 나이고 김지영이 아닐, 당신-

그러나 이러한 지적들을 곧장 <82년생 김지영>이 과장된 이야기일 뿐이라거나 피해의식으로 점철된 소설이라는 식의 몰지각한 말들에 편승하려는 의도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본디 소설은 사실이 아니라 진실을 다루는 장르고, 이 소설 또한 ‘82년생 김지영’의 가감 없는 진실이다. 우리는 2018년의 대한민국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2018년의 대한민국이 하나라는 뜻은 아니다. 나에게는 나의 현재가 있고 당신에게는 당신의 현재가 있다. 이것이 진실이다. 이를테면 소설이 인용하고 있는 통계 같은 것들이 ‘사실’이다. 예컨대 2006년에 10.22퍼센트던 여성 관리자의 비율이 2014년에 18.37퍼센트가 되었다는 통계적 사실. 그렇다면 진실은? 소설에서처럼 “아직 열 명 중 두 명도 되지 않는다”(98쪽)고 해도 진실이고, 10년도 되지 않는 동안 무려 두 배 가까이 늘었다고 해도 진실이다. 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을 피할 길이 없는 김지영 씨에게는 물론 앞의 것이 진실이다. 개인의 진실은 검증이 아니라 존중되어야 하며, 그것을 두고 맞느냐 틀리냐를 논하는 짓은 무례를 넘어 모욕이다. 우리의 일은 바로 이러한 진실에 접속하는 것이다.

“침묵을 강요당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마침내 김지영 씨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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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면 이 소설의 한계를 차분히 짚어봐야 한다. 그 한계까지가 결국에는 진실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학자 김고연주가 해설했듯 <82년생 김지영>의 소설적 설정의 핵심은 여태껏 침묵을 강요당했던 여성들의 말이 김지영 씨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한 김지영 씨의 증상은 “목소리를 잃어버린 김지영을 위한 여성들의 연대 행위”(186쪽)인 동시에, 목소리를 잃어버린 여성들을 위한 김지영의 연대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설정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독자들의 옹호도 비판도 대개 ‘사실’들에만 핀트를 맞추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또한 앞서 보았듯 여러 복잡한 맥락들이 삶을 가로질러 놓여 있음에도 김지영 씨가 자신을 시종일관 ‘피해자’로만 인지한다는 것도 문제다. 소설은 사건이라는 원인이 낳은 인물의 변화된 내면이라는 결과를 플롯이라는 장치를 통해 진득하게 설득하는 장르이기에, 김지영 씨의 갑작스러운 증상 하나를 그려내는 것만으로 그 복잡하고 섬세한 과정을 대신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페미니즘은 약자를 ‘위한’ 정치학이지, 약자가 ‘되자’는 정치학은 아니”(권김현영)므로, 이렇듯 여성의 정체성이 ‘피해자’로만 상상되고 고정될 때 무엇을 잃게 되는지는 비판하는 쪽이 아니라 옹호하는 쪽에서 도리어 절실히 검토해야 할 문제다.

“여성의 ‘진실’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이기에
독자와 작품 간에 아직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한 <82년생 김지영>”

그 소설의 처음과끝 : 조남주 저 <82년생 김지영> -82년생이 나이고 김지영이 아닐, 당신-

2016년 10월에 이 책, <82년생 김지영>은 분명 시작이‘었’다. 그러니 지금 이 현상의 문제점들을 모두 소설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위에 거론한 한계들이 간단히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분노’라는 새로운 형식을 선보였다는 커다란 의의가 있다. 그간 여성들이 견뎌온 불합리와 부조리가 실체 없는 것들이 아님을 ‘사실’에 근거하여 증명하고자 애쓰는 이 작품의 태도는, 왜 아닌지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서는 아닌 것을 아니라고 쉽사리 말하지도 못했던 여성들의 ‘진실’과 완벽히 맞닿아 있다. 이제 남은 건 이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더 나아가는 일이다. 그래서 대화가 필요하다. 찬반으로 나뉜 이들 사이의 대화 이전에 독자와 작품 간의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원래 소설은 그렇게 읽는 거니까. 이를 ‘진정한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간단히 말해버리는 태도는 이 책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간단히 ‘페미니스트 낙인’을 찍어버리는 이들의 태도와 얼마나 먼가. 간단한 이야기를 복잡하게 하는 건 어쩌면 나쁘지만, 복잡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는 건 분명히 나쁘다.

아, 물론 이것은 당신이 적어도 결말의 저 분열적인 정신과 의사와는 다르길 바라며 하는 말이다. 그 의사처럼 알겠는데 모르겠다는 건 결국 모르겠다는 말 아닌가. 조심스레 앞으로 가기 위해 우리가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중이거늘 님아, 어찌 그리 홀연 뒤로 가시려는가. 그러니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여전히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애석하게도 당신에게는 이렇듯 복잡한 처방이 당장은 필요 없으니 일단 읽으시고, 두 번 읽으시고, 그래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면 그냥 외우시라.

소설의 끝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

<82년생 김지영>은 어떤 책?

슬하에 딸을 두고 있는 서른네 살 김지영 씨가 어느 날 갑자기 이상 증세를 보인다. 시댁 식구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친정 엄마로 빙의해 속말을 뱉어 내고, 남편의 결혼 전 애인으로 빙의해 그를 식겁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남편이 김지영 씨의 정신 상담을 주선하고, 지영 씨는 정기적으로 의사를 찾아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소설은 김지영 씨의 이야기를 들은 담당 의사가 그녀의 인생을 재구성해 기록한 리포트 형식이다. 리포트에 기록된 김지영 씨의 기억은 ‘여성’이라는 젠더적 기준으로 선별된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공포, 피로, 당황, 놀람, 혼란, 좌절의 연속에 대한 대한민국 여성의 인생 현장 보고서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소설로, 작가 조남주는 1982년생 '김지영 씨'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고백을 한 축으로, 고백을 뒷받침하는 각종 통계자료와 기사들을 또 다른 축으로 삼아 30대를 살고 있는 한국 여성들의 보편적인 일상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82년생 김지영>의 또 다른 문장들 곱씹어보기

 

“넌 그냥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 이제껏 더 심한 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김지영 씨는 갑자기 견딜 수가 없어졌다.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아 숟가락을 세워 들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딱, 하고 단단한 돌덩이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숟가락으로 식탁을 내리쳤다. “당신은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런 고리타분한 소릴 하고 있어? 지영아, 너 얌전히 있지 마! 나대! 막 나대! 알았지?” - p. 105

그런데 왜 어머니는 힘들다고 얘기하지 않았을까. 김지영 씨의 어머니뿐 아니라 이미 아이를 낳아 키워본 친척들, 선배들, 친구들 중 누구도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 TV나 영화에는 예쁘고 귀여운 아이들만 나왔고, 어머니는 아름답다고 위대하다고만 했다. 물론 김지영 씨는 책임감을 가지고 최대한 아이를 잘 키울 것이다. 하지만 대견하다거나 위대하다거나 하는 말은 정말 듣기 싫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힘들어하는 것조차 안 될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p. 150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들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 p. 149

 

문학평론가 황현경
서울대 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 2012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평론 <반격! 김사과>로 등단 / 현재 명지대, 서울예대, 추계예대 등에서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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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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