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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소설책이 인기를 끌었으나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던 조선 후기,
이야기에 굶주린 백성들에게 책을 읽어주던 이들이 바로 전기수였다. 이들은 책의 내용을 통째로 외운 뒤 이야기를 생생하고
흥미롭게 포장하여 전달했는데, 그들 가운데 이업복은 낭랑한 목소리에 마음을 사로잡는 연기로 당대 최고의 전기수로 꼽혔다.
구성진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수상한 사내
쓰개치마를 둘러쓴 수상한 사람이 한 양반가의 안채로 들어왔다. 쓰개치마를 벗자 놀랍게도 수염이 성성한 사내였다. 안채에 있던 양반집 규수 여럿이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오래 기다리고 있었네. 어서 시작하시게나.”
“알겠사옵니다. 일전에 어디까지 했었는지요?”
“진사가 편지를 받는 장면까지 들었네.”
사내는 꼿꼿이 허리를 세운 뒤, 구성진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편지를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정은 지난날보다 배나 더하여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듯 했습니다.”
이야기에 굶주린 백성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사람, 전기수
규수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내이름은 이업복. 한양에서 가장 유명한 전기수였다.
전기수란 책을 읽어주는 자로, <삼국지> 같은 중국 고전과 <임경업전> 같은 영웅소설, <운영전> 같은 애정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들려주었다.
이들은 책의 내용을 통째로 외운 뒤 이야기를 생생하고 흥미롭게 포장하여 전달했다. 본래 천직이었던 이업복은 낭랑한 목소리에 마음을 사로잡는 연기로 당대 최고의 전기수가 되었다.
“하하하.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번에 마지막 이야기를 전달해 드리지요.”
이업복은 규수들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쓰개치마를 뒤집어 쓴 채 집을 나섰다.
“오늘은 어디로 가시오?”
“어디 보자. 오늘은 초엿새니까 종루(현재 보신각)로 가는 날이요.”
조선 후기 소설책이 인기를 끌었으나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거기다 책은 비싸고 귀한 물건이었다. 이때, 이야기에 굶주린 백성들에게 책을 읽어주던 이가 바로 전기수였다. 이들은 주로 청계천과 종로 일대를 옮겨 다니며 공연을 했는데, 때로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담배가게나 시장에서 판을 벌이기도 했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전기수들의 명연기
이업복이 종루 앞에 자리를 잡자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그의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자, 오늘은 <임경업전>을 들려주겠소. 화설, 대명 숭정 말에 조선국 충청도 충주 단월 땅에 한 사람이 있으니, 성은 임이요 이름은 경업이라!”
이업복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장수가 오히려 죽으며 항복하였거늘 무명 소장이 감히 큰 말을 하느냐! 하면서 모든 장수가 일시에 달려드는지라.”
임경업의 활약을 생생하게 이야기하던 이업복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아, 그래서 경업은 어찌된 거요? 아이고 답답해라. 어허~ 옜소!”
다음 대목을 듣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은 앞다투어 돈을 내던졌다. 돈이 제법 쌓이자 그제서야 이업복은 입을 열었다.
“경업이 선봉장 둘을 베고 진을 깨쳐 들어가자, 사면에 복병이 일시에 덤벼드는데!”
다시 이업복의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임경업이 위기에 처하는 장면이 나오자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경업이 역적이므로 잡아 가두고자 하였나이다 하자, 경업이 고성을 지르며 네 벼슬이 높거늘 무엇이 부족하여 나를 해코지 하느냐!”
살아있는 책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던 전기수들의 삶과 남다른 사명감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에이~ 나쁜 놈아! 어휴!”
이업복의 실감 나는 연기 때문에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한 순간 종루 앞은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주변 사람이 흥분한 사내를 붙잡아주어 이내 정리가 되었다.
“허허허, 그대 덕분에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만들어지겠소. 자, 그럼 이어서 하겠소이다.”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웃음과 눈물을 선사했던 전기수는 이야기 공연으로 돈을 벌어 집을 살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지만, 음란하고 근본 없는 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근대화 이후에도 살아남아 지방 장터에서 이야기판을 벌였고,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이들의 후예라고도 할 수 있는 변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글을 읽을 수 없는 백성들에게 전기수는 살아있는 책과 같았다네. 이야기가 있는 한, 책이 있는 한, 전기수는 영원할 것이요.”
거리의 이야기꾼, 전기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종로거리 연초 가게에서 짤막한 야사를 듣다가 영웅이 뜻을 이루지 못한 대목에 이르러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물면서 풀 베던 낫을 들고 앞에 달려들어 책 읽는 사람을 쳐 그 자리에서 죽게 하였다고 한다.” - <정조실록> 14년 8월 10일
글을 못 읽는 이에게, 책을 살 수 없는 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거리의 이야기꾼, 전기수. 이제는 거리에서 그들을 볼 수는 없지만, 라디오나 팟캐스트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전기수의 후예들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시대가 바뀌어도 ‘이야기의 힘’은 변함이 없으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은 달라졌을 지라도 대중은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에 목말라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