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설의 처음과 끝

김영하 저 <오직 두 사람> - 이 시절을 두 번

그 소설의 처음과끝 : 오직 두 사람
그 소설의 처음과끝 : 오직 두 사람
그 소설의 처음과끝 : 오직 두 사람
소설의 처음

“보고 싶은 언니에게
어제는 재미있는 기사를 하나 읽었어요. 한번 상상해보세요.
언니는 희귀 언어를 사용하는 중앙아시아 산악 지대의 소수민족 출신으로,
스탈린 치하를 피해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떠난 수십 명 중 하나예요.
뉴욕에서 이 언어를 쓰는 사람은 언니네가 전부예요.
고향에서는 러시아어가 표준어가 되었고, 언니네 언어는 이미 소멸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와요.”

<오직 두 사람(2017)>은 김영하의 다섯 번째 소설집이다. 1995년, 지금은 없어진 <리뷰>라는 계간지에 <거울에 대한 명상>을 발표하며 등단한 지 이십이 년 만에 다섯 번째 소설집이니 사 년 조금 넘어 한 권꼴이다. 그가 발표한 장편은 모두 일곱 편이다. 제1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 수상작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1996)>가 처음이고 <살인자의 기억법(2013)>이 마지막이다. 장편은 3년 조금 넘어 한권 꼴이다.

소설집 중 하나를 꼽자면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1999)>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2010)> 사이에 위치한 세 번째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2004)>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표제작이자 책의 첫머리에 놓인 「오빠가 돌아왔다」만으로도 이 소설집은 일등이다. 장편 중 하나를 꼽자면 고민할 것도 없다. <아랑은 왜(2001)>와 <빛의 제국(2006)> 사이에 놓인 그 책, <검은 꽃(2003)>이다. 한국문학에 입문하려는 이에게 나는 매번 이 놀라운 소설을 가장 먼저 추천한다.

산문집은 모두 아홉 권이다. ‘김영하 영화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는 있으나 김영하가 본 영화 이야기라기보다는 그저 영화를 본 김영하의 이야기라 해야 할 <굴비낚시(2000)>로부터 최근의 삼부작 <보다(2014)>, <말하다(2015)>, <읽다(2015)>까지다. 각기 매력이 달라 하나를 꼽는다는 게 큰 의미는 없겠지만 나는 <랄랄라 하우스(2005)>를 가장 아낀다.

꼽아본 세 권을 출간 순으로 세우면 2003년의 <검은 꽃>, 2004년의 <오빠가 돌아왔다>, 2005년의 <랄랄라 하우스>다. 여기에 딱 한 권만 더 추가하자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고민이 되지만 결국 내게는 <빛의 제국(2006)>이다. <빛의 제국>까지 하면 내가 꼽은 네 권은 2003년부터 정확히 한 해 간격으로 출간된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 시절이 김영하의 전성기였던 걸까?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된 것 같다.

그 소설의 처음과끝 : 오직 두 사람
그 소설의 처음과끝 : 오직 두 사람


김영하에 대해 쓸 때면 언제나 나는 그가 직접 한 말들, 그러니까 책의 ‘작가의 말’이나 산문집에서 뽑은 문장들과 인터뷰에서 했던 말들로 지면을 채워보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낀다. 이유는 간단하다. 김영하 소설에 대해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이는 다름 아닌 김영하 자신이기 때문이다. 얼핏 당연한 말 같지만 결코 당연한 말이 아니다. ‘이 작품은 무엇이다’라는 말을 작품 그 자체로 대체하는 게 작가들이고, 그 작품들에는 우리 인간의 딱 잘라 명쾌히 설명할 수 없는 지점들이 ‘논증’이 아니라 ‘예증’의 형태로 표현된다. 그것들은 어떤 말로도 시원스레 설명할 수 없기에 소설이라는 형태로 그려진 것들이고, 그게 바로 작가들의 말하기 방식이다. 그런데 그는 소설로도 제 말로도 자신의 작품을 말한다. 그러한지라 예컨대 ‘90년대의 선언’ 혹은 ‘80년대의 종언’으로 평가해 마땅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설명하려면 책에 수록된 인터뷰의 다음과 같은 말을 옮기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역사와 민족 등이 90년대의 인간에게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역사와 민족 등의 범주를 동시대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틀로 규정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80년대를 풍미하던 역사와 민족 등이 빠져나간 상태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으며,
때문에 후일담 문학이나 리얼리즘 소설을 부정하는 자리를 나의 출발점으로 살았다.
90년대는 80년대를 풍미했던 준거집단이 해체된 상태이며, 그 결과 어느 누구도 나를 비추는 객관적인 거울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p. 170~171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만큼이나 이게 맞는 말들이라는 것도, 더구나 소박하지 않다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는 그의 등단작 「거울에 대한 명상」이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90년대적인 무언가’로 과장 없이 평가하고, 특히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이 작품을 기준으로 80년대가 끝나고 90년대가 시작되었다고도 과장 없이 이야기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90년대는 1990년에 시작되지 않았다. 산해진미도 그 맛을 모르고 먹었다면 ‘먹었다’고 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로, 저가 살고 있는 시대를 모르고 살면 그들에게 그 시대는 살아진 게 아니다. 김영하의 90년대 작품에 열광하던 동시대 젊은이들은 저가 어떤 시대를 어떻게 살고 있으며 그 시대를 사는 자신은 누구인지를 그에게 배웠다.

여기까지를 이야기하고 나서야 <오직 두 사람>에 대해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책에는 2014년 겨울에 발표된 「아이를 찾습니다」를 가운데 두고 그보다 앞선 「옥수수와 나」, 「슈트」, 「최은지와 박인수」, 그리고 그에 뒤따른 「인생의 원점」, 「신의 장난」, 「오직 두 사람」이 수록되어 있다. 이게 무슨 책인지를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빌려 적는다.

“(…) 지난 칠 년간의 내 삶도 둘로 나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세 편에선 「옥수수와 나」의 찌질하고 철없는 작가, 생물학적 아버지의 유골을 받으러 뉴욕으로 떠나
양복만 걸치고 돌아오는 「슈트」의 편집자, 싱글맘이 되겠다는 직원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 출판사 사장이 나온다.
그에 비해 이후의 네 편은 훨씬 어둡다. 희극처럼 시작했으나 점점 더 무거워지면서 비극으로 마무리되는 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아이를 유괴당했거나, 첫사랑을 잃었거나, 탈출의 희망을 버렸거나,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는 딸의 이야기를, 나도 모르게 쓰고 있었던 것이다.”

- <오직 두 사람> p. 270

그 소설의 처음과끝 : 오직 두 사람

직전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이후 그의 칠 년을 둘로 나눈 기점은 물론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 그리고 그해 겨울의 「아이를 찾습니다」다. 그는 이 소설들 모두가 “뭔가를 상실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늘 그랬듯 정확히 소개하며 앞의 세 편을 이렇게 해설한다. “옥수수가 아니라 믿으면 됐고, 아버지의 양복이 있으니 됐고, 위선과 작별했으니 된 것이다.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안하기 위한 연기를 하고 있다.” 뒤의 네 편은 이렇게 정리한다. “그들은 자위와 연기는 포기한 채 필사적으로 ‘그 이후’를 살아가고 있다.”(270쪽) 아래에 덧붙인 말들은 이렇다.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 <오직 두 사람> p. 270

그 소설의 처음과끝 : 오직 두 사람

「오직 두 사람」에서 평생을 아버지 슬하에 머물렀던 까닭에 그것이 타의였는지 자의였는지를 구분할 수조차 없게 된 주인공 현주의 남은 생은 ‘그 이후’일 것이다. 아버지와 딸이라는 그 좁은 관계 안에서 둘만이 공유했던 무언가가 그녀의 전부였을 터, 소통할 수 있었던 ‘오직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떠났으니 이제 그녀는 ‘오직 한 사람’이다. ‘그 이후’ 그녀의 삶은 누군지도 모르고 실재하는지도 모를 ‘언니’에게 그녀가 길게 쓴 편지 한 통만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의 형식 자체가 암시한다. 그녀를 통해 우리는 지금 우리가 ‘상실 이후’를 살고 있음을, 무언가 사라진 빈자리를 채우려 허공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 혹은 누군가에 닿길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한 시절의 소설은 우리가 누구고 어떤 시절을 보내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 소설의 처음과끝 : 오직 두 사람

김영하의 전성기는 2003년에서 2006년에 이르는 기간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김영하였고 지금도 김영하일 뿐, 그저 내가 그 시절의 김영하를 사랑하는 것이리라. 사실 나는 그 책들을 나중에서야 읽었는데, 그때 비로소 그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젊어서 젊음을 몰랐던 그때를 뒤늦게나마 만끽하며 다시 보냈고, 그러고서야 그 시간들을 기억 속 잊혀서는 안 될 것들이 모인 그곳으로 보내줄 수 있었다. 그 작품들 덕에 그 시절과 그때의 나를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작품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와 첫 소설집 <호출(1997)> 시절의 김영하를 그리워할 것이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가 그 소설들을 읽던 그때의 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것 같다. 후에 <오직 두 사람>을 기억할 누군가가 지금 이 시절의 자신을 애틋하게 되돌아보리라는 것도, ‘그 이후’를 견디느라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던 이 시절이 그제서야 그에게 다시 살아지리라는 것도, 미리 조금은 알 것 같다.

소설의 끝

“그렇게 그들의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오직 두 사람>은 어떤 책?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이후 7년 만에 펴낸 김영하의 소설집. 그동안 다채로운 스펙트럼으로 한국문학의 지평을 확장해온, 이른바 ‘김영하 스타일’이 총망라된 작품집으로,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들, 그리고 상실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일곱 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2014년 겨울에 발표한 제9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 ‘아이를 찾습니다’를 기점으로, 그 전과 후의 삶과 소설 모두가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해 4월에는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참혹한 비극이 있었다. 그 이전에 쓰인 소설들은 무언가를 잃은 인물들이 불안을 감추기 위해 자기 기만에 가까운 합리화로 위안을 얻고 연기하듯 살아가는 반면, 그 이후에 쓰인 소설 속 인물들은 자위와 연기를 포기한 채 필사적으로 그 이후를 살아간다.

인생에는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엄존하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리고 문학을 통해 혼란으로 가득한 불가역적인 우리 인생에 반환의 좌표를 제공한다.

<오직 두 사람>의 또 다른 문장들

 

아빠와 담배가 없는 삶. 둘 중 그 어떤 것도 다시 시작하기 싫었어요. 끊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알고는 싶었어요. 이 공허와 권태는 둘 중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어느 쪽이 더 치명적인가.    -    「오직 두 사람」   p. 37

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큰 차이가 있어. 대부분의 사람이 그래. 지금은 날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겠지만 말야. 물론 그 마음이 진심이란 것 알아. 하지만 진심이라고 해서 그게 꼭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법은 없어.    -    「인생의 원점」  p. 92

나는 쥐가 돌아다니는 집에서 아랫배가 뻐근해질 때까지 글만 썼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미친 듯이 써나가는 가운데 내 영혼과 육체에서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꿈꿔왔던, 모든 창작자들이 애타게 찾아 헤맨다는 에피파니의 순간일지도 몰랐다. 뮤즈가 강림한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작가가 됐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   「옥수수와 나」  p. 151

그는 어느새 탐정이 알려준 주소지 앞에 도착해 있었다. 아이폰에 받아둔 구글맵을 따라가니 실수가 없었다. 우주의 인공위성이 자신을 죽은 아버지에게로 인도했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에 신은 없다.” 우주 공간으로 올라간 유리 가가린이 말했었지. 신은 없지만 아버지는 있어. 위성의 눈으로 나를 보고 있지.   -   「슈트」  p. 180

나는 우울을 믿어. 인간은 천둥이 치고 비가 퍼붓는 궂은 날씨에는 울적하도록 진화했어. 가만히 동굴에 틀어박혀서 날씨가 좋아지길 기다리는 게 유리하거든. 에너지를 아끼면서 말이야. 인류가 이렇게 진보한 건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끝없이 자신의 과오에 집착해온, 사실 나 같은 우울증 환자들 덕분이야. 그들은 헛된 희망을 품지 않아. 스스로를 과신하지도 않고. 그래서 살아남은 거야.   -   「신의 장난」  p. 247

 

문학평론가 황현경
서울대 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 2012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평론 <반격! 김사과>로 등단 / 현재 명지대, 서울예대, 추계예대 등에서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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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06-0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