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감명 깊게 보았고, 그래서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자신만의 ‘추억의 명화’ 리스트에 담긴 영화들을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다시 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가끔씩 템포도 지루하고 촬영도 촌스럽고 음악도 그저 그런데,
이 영화가 그때는 왜 그렇게 좋았을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릴 적 살던 곳을 찾아가면 넓었던 길은 좁은 골목이 되었고
커다랗던 건물이 왜소하게 줄어들어 있는 것을 보는 느낌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다시 보아도 여전히 새롭고 또 다시 감동하는 영화도 있으니
이런 작품이 진정한 ‘명화’라고 불리는 게 아닌가 싶다. <탐포포>가 그랬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일본 영화 <탐포포>를 수십 년 만에 다시 보았다. 이 작품은 1985년에 나왔다. 33년이나 된 영화인데 어디 한 군데 고루하게 느껴지거나 요즘의 경향과 거리가 느껴지는 대목이 없어 놀랐다. 이타미 쥬조 감독 작품인데 그의 재능에 다시 한번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 화가, 디자이너, 배우였던 그는 나이 오십이 넘어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리고는 십여 년간 맹렬히 활동하며 10개의 작품을 만들고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그만의 독특하고 예리한 풍자와 해학이 넘친다. <탐포포>는 먹는 것에 관한 영화인데, 민들레를 뜻하는 탐포포는 영화 속 여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맛있는 라멘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미망인 탐포포와 그녀를 돕는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가 큰 줄거리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은 기본 줄거리에 곁가지를 친 다양한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빼곡히 걸려있는데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앞으로 이 영화를 감상하실 분들을 위하여 자세히 소개하지 않고, 이 작품을 통해서 나타난 일본의 음식문화를 이야기하기로 한다.
우선 이 영화의 소재가 된 ‘라멘’이야기다. 여기서 라멘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한국인이 세계에서 제일 많이 먹는다는 인스턴트 식품인 ‘라면’과 구별하기 위해서다. 노란 생면을 삶아서 간장, 된장, 돼지뼈 국물 등을 베이스로 한 국물에 각종 고명을 얹은 일본의 ‘라멘’은 원래 중국 음식이다. 라멘이라는 말 자체가 중국의 잡아 늘렸다는 ‘拉麵’을 소리나는 대로 받아 적은 것이다. 옛날에는 중국국수라는 뜻으로 ‘시나소바(支那そば)라고도 했고 지금도 ‘쥬카소바(中華ソバ: 중화소바)라고 부르는 가게도 더러 남아있다. 그러나 일본사람들의 라멘 사랑은 이 음식의 국적을 완전히 일본으로 바꿔버렸다. 외식산업의 통계를 보면 라멘업계의 매출이 우동이나 소바업계의 매출을 앞지른 지 오래다. 이게 일본 음식문화의 특징이기도 한 것이 우리가 일본음식하면 흔히 연상하는 일본초밥 ‘스시’의 경우도 전체 산업의 규모로는 한국에서 건너간 불고기집 ‘야키니쿠’ 산업의 그것보다 작아진 지 오래다.
그만큼 일본사람들은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익숙하고 또 그것을 발달시키는데 능하다. 일본에는 우리가 잘아는 다꾸앙(단무지)을 비롯해서 이런 저런 야채 절임이 발달하였는데, 몇 년 전부터 그 가운데 김치가 매출순위 1위가 되었다. 한국사람들이 좋아하기만 할 일은 아닌 것이 그들의 것은 엄밀하게는 ‘기무치’로 양념과 발효법이 한국김치와 다르다. 일본에서 발달한 ‘라멘’은 지금 뉴욕 등 구미의 대도시에서도 조용히 붐을 일으키고 있는데 홍콩, 대만, 상해 등 중화권에도 일본음식 ‘라멘’으로 역상륙을 하여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한국사람들이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언젠가 기무치가 김치를 제치고 해외에 더 넓게 보급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다시 영화이야기로 돌아가자. 영화 도입부에 ‘라멘먹기 40년’이라는 어느 노인에게서 젊은 청년이 라멘을 제대로 먹는 법을 전수받는 장면이 나온다. 청년이 묻는다.
“선생님, 라멘이 나오면 우선 국물을 마십니까, 아니면 면을 먹습니까?”
근엄한 얼굴의 노인이 대답한다.
“우선 라면을 잘 관찰합니다. 대접에서 올라오는 향기를 맡으며 라멘을 감상하는 겁니다. 국물 표면에 무수하게 떠있는 자잘한 기름 방울에 젖어 반짝이는 죽순 절임, 서서히 젖어 들어가는 김, 잠긴 듯 떠있는 듯 걸쳐있는 썰은 대파, 무엇보다도 주역이면서도 얌전히 들어있는 차슈(돼지수육) 세 조각…. 젓가락으로 우선 표면을 어루만지듯 쓰다듬습니다. 이건 라멘에 대한 애정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차슈를 집어 올립니다.”
“아, 먼저 차슈부터 먹는 거군요!”
“아닙니다. 젓가락으로 차슈를 사뿐히 집어 들어 오른쪽 구석에 담가놓습니다. 중요한 건 이 때 마음속으로 ‘조금만 기다려줘’하고 속삭이는 겁니다.”
시작부터 유머가 넘치는 장면이지만, 여기에도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일본사람들은 음식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도 열심이지만 돈을 내고 사먹는 손님들도 성실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맛있게 만들면 몇 시간이고 줄을 서서 기다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발품을 팔아 먼 길을 찾아가는 걸 아까워하지 않는다. 진지하게 만들어 내는 쪽과 그걸 알아주는 소비자의 호흡이 잘 맞아야 음식문화가 발전하는 법인데 일본이 그런 경우이다.
이 영화의 남자주인공은 ‘고로’라는 떠돌이 트럭운전사다. 전국을 누비며 맛있는 라멘을 먹어본 사람이다. 그가 탐포포의 간청에 못 이겨 그녀의 라멘을 맛있게 만드는 프로젝트에 선생이 된다. 제일 먼저 그가 한 일은 그녀에게 ‘평소 하던 대로 라멘을 한 그릇 만들어 보라’고 시킨 것이다. 그리고는 줄줄이 지적사항이 나온다. 우선 손님이 카운터에 앉으면 손님을 잘 관찰할 것. 시간이 급한 손님인가, 배가 고픈 손님인가, 술은 먹은 상태인가, 지나가다 들린 건가, 소문 듣고 온 건가. 차슈는 두껍게 썬다고 능사가 아니다. 3mm 정도가 알맞은 거다. 라멘을 내고 손님의 표정을 잘 봐라. 금방 나온 라멘 국물을 훌훌 마시는 건 온도가 낮다는 증거다. 미지근한 국물은 치명적인 결함이다. 그는 줄줄이 지적을 하고는 특별 훈련에 들어간다. 물이 찬 커다란 냄비를 요령 있게 옮기기, 면 삶기, 면 나누어 담기, 고명 만들기 이런 걸 스톱워치를 가지고 제한된 시간 내에 완성하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체력 단련. 그리고는 남의 가게를 전전하며 좋은 건 배우고, 안 좋은 점도 반면교사 삼으면서 자신의 역량을 늘려간다. 국물을 낼 때 닭은 상하기 쉬우니 언제나 신선한 것을 사입할 것, 센 불에 부글부글 끓이면 국물이 탁해지니 불 조절을 잘할 것, 거품을 걷어내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 것, 돼지뼈를 잘못 삶으면 누린내가 남고, 야채를 너무 오래 삶으면 단맛이 늘어나 산뜻한 맛이 사라지고, 죽순은 식감이 중요하고, 면을 만들 때 넣는 간수(탄산나트륨, 탄산칼륨)의 양 조절, 반죽에 압력을 가하는 정도 등 전문적인 지식이 탐포포의 학습을 따라가며 영화 안에서 흥미롭게 펼쳐진다.
한국어에서 딱 들어맞는 표현을 찾기 힘든 일본말 가운데 ‘匠’라는 글자가 있는데 읽기는 ‘다쿠미’라고 읽는다. 탐포포를 보면서 이 글자가 생각났다. 이는 우리말로 장인이라는 의미의 ‘장’자이다. 그런데 일본어로 다쿠미와 우리말의 장인은 그 뉘앙스가 전혀 다르다. 그냥 장인이라고 하면 전문 기능인이라는 뜻 말고 별달리 다른 뜻이 들어있는 것 같지 않다. 그다지 지위가 높지 않은 기술자라는 느낌도 든다. 그렇다고 해서 ‘거장’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하게 뽐내는 듯한 위엄이 들어있는 듯 하다. 일본어로 ‘다쿠미(匠)라고 하면 일정한 경지에 오른 사람에 대한 존경과 찬사의 뜻이 들어있다. 술에도, 그릇에도, 옷에도 그리고 물론 라멘에도 자랑스럽게 이 글자를 브랜드로 붙인다. 몇 대씩 대를 이어 기업을 이어온 다쿠미들이 일본에는 각 분야에 걸쳐 수두룩하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반열에 오른 대가를 칭하는 새로운 단어가 생겨날 만큼 많은 장인이 여러 분야에서 나왔으면 좋겠다. 더 바람직한 건 ‘장인’이라고 기왕에 있는 말에 이러한 존경심과 칭송이 실리도록 사회적 분위기가 변하는 것이겠지만 언어현상을 고려해도 그렇고 그리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영화 <탐포포>는 앞에서 간단히 언급했듯이 라멘 말고도 많은 음식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어 관객을 즐겁게 해준다. 그 중 고급 프랑스 레스토랑에서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어느 대기업의 전무, 상무, 이사, 부장, 과장 그리고 말단사원으로 구성된 6인 그룹이 고급 프렌치 레스토랑을 찾는다. 웨이터가 정중하게 주문을 받는다.
웨이터: 주문 정하셨습니까?
전무: 글쎄…. 상무: 나도 별로 배가 안고파서, 뭐 가벼운 거 없을까.
부장: 난 메인은 혀가자미 무니에르. 수프는 콘소메. 샐러드는 됐고.
웨이터: 음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부장: 맥주. 하이네켄.
전무: 나도 혀가자미 무니에르. 수프는 콘소메. 샐러드는 됐고 마실 건 맥주.
이사: 나도 같은 거 줘요.
과장: 나도 같은 거 주세요.
대충 이러고 넘어가려는데, 여기서 일이 벌어진다.
말단: 잠깐. 여기 메뉴에 끄넬을 부댕풍으로 했다면 끄넬을 소시지처럼 해서 만들었단 건가요?
웨이터: 그렇습니다.
말단: 이거 옛날에 따이유방에서 먹었던 것 같은데….
웨이터: 잘 아시네요. 저희 셰프가 전에 따이유방에서 근무했었습니다.
말단: 그럼 소스는 캐비어 소스…. 웨이터: 그렇습니다.
말단: 그럼 그거하고 파이로 싼 에스카르고… (중략)… 그리고 와인은 꼬르똥 샤를르마뉴 81년 있나요?
웨이터: 소믈리에를 불러오겠습니다.
말단: 그렇게 해줘요.
보기에도 초라한 말단사원의 돌출행동은 중후한 중역 및 상사들의 얼굴을 시뻘겋게 만드는데, 이 장면은 단체행동을 중시하고 무엇보다 서열을 중시하는 일본의 기업문화를 풍자하기도 하지만 프랑스 요리의 격식만 알고 내용을 즐기지 못하는 일본 샐러리맨의 애환을 묘사하기도 한다. 세월은 흘러 지금은 많이 바뀐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장면에서는 우아한 귀부인의 모습을 한 강사가 결혼을 앞두고 예절교육을 받는 아가씨들에게 서양요리 먹는 법을 가르친다. 그날의 메뉴는 스파게티인데, 서양에서는 소리를 내는 게 예절에 어긋나므로 스파게티를 먹을 때 절대로 먹는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한 서양사람이 후루룩 쩝쩝 매우 큰 소리를 내며 스파게티를 먹는다. 수업은 엉망진창이 된다.
다시 <탐포포>의 메인 스토리로 돌아오면, 맛있는 라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가 고로는 마지막 카드로 ‘스승’을 찾아간다. 원래는 산부인과 의사선생님이었는데 취미 삼아 라멘집을 하다가 부인도 잃고 병원도 잃은 사람이다. 지금은 거지들과 함께 살며 식도락을 즐긴다. 여기서 식도락은 맛있는 식당의 남은 음식을 골라먹는 것이다. 그야말로 거지주제에 칼튼 호텔의 비프스튜가 어떻고, 어떤 집의 돈카츠는 요즘 돼지품질이 떨어지고 양배추도 기계를 들여놓아 손으로 안 썰어서 망했네, 얼마 전 긴자에서 마시다 남은 삐숑 라랑드 80년이 있어 디캔터해서 마셨더니 맛이 그만이었네 등등의 경험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 중에 한 명은 맛있게 오므라이스를 만드는 걸 보여준다. 실제로 이 오므라이스는 이 영화가 나온 뒤에 도쿄 니혼바시에 있는 다이메이켄이라는 양식집에서 ‘탐포포 오므라이스’라는 인기메뉴가 되었다.
지금까지 든 예만 얼핏 보아도 알 수 있는 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음식메뉴에 우리가 생각하는 ‘정통 일본요리’가 없다는 것이다. 소개는 생략했지만 영화에 나오는 일본요리는 소바와 단팥죽 정도다. 외국음식으로는 이 밖에도 딤섬, 볶음밥, 북경오리 등이 나온다. 어느 정도 친해진 주인공 탐포포와 고로가 썸을 타는 대목은 한국 야키니쿠 식당에서다. 둘은 숯불 위에 갈비를 구워 상추에 싸먹으며 서로의 아픈 과거를 이야기한다.
돈카츠는 오스트리아의 슈니첼이 들어와 변형된 것인데 지금은 완전히 일본음식으로 자리를 잡고 또 많은 진화를 해서 일본의 국민음식이 되었다. 카레 역시 마찬가지다. 개화기에 해군이 영국으로부터 배워왔다고 하는데 지금은 인도의 난이나 빵이 아니라 흰 쌀밥에 어울리는 일본식 카레로 정착하였다. 초등학교 급식에서도 제일 인기가 있는 카레를 외국음식이라고 여기는 일본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크로켓이 변한 고로케가 그렇고, 유럽에서 16세기에 들어왔다는 덴푸라도 같은 경우다. 덴푸라는 하도 오래되어 고문헌을 뒤져도 그 어원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정도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은 덴푸라도 각종 신선한 소재 선별에서부터 튀김용 기름을 다루는 데까지 정성을 다하여 ‘다쿠미’의 경지에 오른 가게가 많다. 튀김옷을 만들 때도 바삭거리도록 하려면 밀가루에 글루텐이 지나치게 생성되지 않아야 하므로 얼음물로 살짝 갠다거나 하는 건 기본에 속한다. 이런 일본음식의 깊은 속을 두 시간여 동안에 조금이라도 들여다 보게 하는 것도 <탐포포>의 매력이다.
한국의 홍대 앞을 가면 건물 전체가 이자카야인 곳을 비롯해 일식집으로 가득찬 상점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요즘엔 알뜰하게 계획을 세워 일본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는 젊은이들도 많이 늘어났다. 일본음식이 그만큼 경쟁력이 있다는 얘기다. 일본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한식의 세계화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도 꼭 한번 권하고 싶은 영화가 <탐포포>다.
이주익
영화제작자
영화제작자. SCS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영화 <워리어스 웨이>, <만추>, <묵공> 을 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음식과 요리에 관심이 많아, 취미로 음식에 대한 연구를 했고 음식 전문 서적 수천 권을 보유중이다. 음식 관련 영화와 TV 드라마 제작을 준비하고 있다.